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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Apr 13. 2024

예열

작업 노트 6


24.04.13


한 주의 일기



작업 기간이 시작됐다. 어머니의 일이 끝나고, 외주 받은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이번 주 화요일부터 작업 모드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동안은 시 쓰는 데 갇혀 지낼 거 같다.


 안 써서 퇴화된 여러 습관들을 되살리기 위해 예열에 들어갔다. 먼저 쓰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정신 관찰을 시작했다. 이번 주를 포함해 3주간은 적응 기간으로 두고 있다. 3주간 어떻게 체화하느냐에 따라 잃어버린 여러 습관들이 자리잡을지 판가름난다. 


 이에 발맞춰 생활 속 비의식들도 조금씩 구조 조정을 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핵심인데, 비의식의 구조 조정에 실패하면 안정적인 쓰는 상태가 될 수 없다. 비의식은 깨어 있는 시간 중 의식하지 않는 모든 시간이다. 농담삼아 암흑 에너지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어떠한 시간 의식도 느끼질 않기 때문에 마치 없는 시간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이런 정신의 그림자와의 균형이 맞질 않으면 기획은 불가능하다. 작년에 융을 읽은 건 내게 무척 설렘을 느끼게 한다. 정말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만능 지팡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작업 모드에 선택지가 있는 느낌이다. ver 1.0이라고 부를 만한 상태는 15년도 초에 겪었던 상태인데, 어떠한 외부 방해도 없이 오직 읽기와 쓰기만 하던 시기였다. 이 상태에 있으면 바깥에서 들어오는 온갖 시지각 정보들이 영감이 된다. 다만 구조는 소위 낭만적 자아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단점이 있다. 또한 이 상태는 마치 원래 주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의식적으로 기획해낸 상태는 아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른 채 마냥 즐겁게 할 뿐이다. 


 그때에 비하면 자기 관찰과 더불어 정신에의 이해, 세계 인식 등이 월등히 분화되고 풍부해진 지금, 다음 단계의 작업 모드로 들어가려 한다. 이 와중에 멀티까지 될지는 자신이 없어서 조금 난처한 기분이 들기는 한다. 그래도 심리의 문제라는 게 확인이 되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는 느낌이다. 세상 어떤 문제든 심리 문제라면 이제는 힘을 낼 수 있다. 다만 목전에 두고 있는 건 바로 '정체성'이다. 사실 창작에 있어서 이 구조는 알파이자 오메가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핵심적이다. 정체성 구조를 어떻게 갖고 가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구조로 인해 반드시 자신의 열등한 부분이 투사되고, 그 투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휘말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획에 포함될 수 없는 구조다. 아무리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의식을 선취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망상일 뿐이다.


 이런 부분은 과감히 괄호를 쳐야 한다. 열등함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지만, 인식 이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 분화가 요구된다. 주름 접혀진 어떤 표면을 강제로 펴서 불편하게 걸어야 하는 길이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거의 반 자동적으로 '처리'해 버리려는 인식 습관들이 대개 그런 불편함이 적용되어야 할 순간이다. 이는 어떤 측면으로 보든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하고 시간 낭비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런 작업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전까지의 나도 그렇게 여겨왔다. 왜 그런 수고로인 정신 노동을 해야 하는지의 닻이 없으니 하더라도 쉽게 포기하게 된다. 편리하고 비겁한 태도가 싸게 먹히니까. 그렇게 외면하고 방치했던 일상 속 순간들이 산더미처럼 있을 거다. 그랬던 시간 만큼이나 앞으로 이를 다리미로 다리듯 잘 펴는 일이 더 고되면 고됐지, 수월할 리 없을 게 눈에 선하다.


 미화된 과거 기억으로 보면, 나의 편리한 포기는 18년도부터였다. 이때부터 스스로의 합리화로 '남들도 하는데 뭐 어때'라는 면죄부를 입었다. 표면상으로는 피상 세계와 소비 세계, 외면 세계를 체험해 보자, 였다. 그 결과 잃어버린 게 훨씬 더 많다. 근 6년 동안의 일반인 코스프레를 이제 그만두고(해봤자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정말로 그런 기울기였다) 창작자로 회귀하려는 요즘, 그래서 뭘 경험했나 반성해 보면 요약되지는 않는다. 융의 연금술 비유로 들면 그저 니그레도에 너무 가담해 오염되어 잔뜩 물이 든 상태일 뿐이다. 더러운 느낌, 없애버리고 싶은 얼룩이 든 느낌, 죽여버리고 싶은 해충이 기생하는 느낌 따위는, 다행히 아니다. 앞서 낭만적인 정체성 구조였다면 100% 그런 느낌으로 또 온갖 자기 부정을 주문처럼 외우며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런다고 정화될 리 만무한 몸부림을, 인간은 할 수 있긴 하다.


 다만 6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인간을 길들이는 데 아주아주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소위 '노예 상태'가 아주 많다. 사실 난 이런 표현은 별로 안 좋아하긴 한다. '노예'라는 어휘에 맞물린 부정적인 정동은 잘 열리지 않는 블랙박스다. 또 비평가들이 으레 즐겨 사용하기도 하는데, 어른스럽진 않다. 아직 발달이 되지 않은 이성 상태일 때는 주로 특정 어휘를 빌려 자신의 열등함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부정적인 정동을 빌려 쓰기 마련이다. 우리 인간이 자발적 노예 상태로 하염없이 시간을 죽인답시고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고, 또 쓸데없다고 일컬어지는 온갖 갈등 회피와 외면을 지적하는 등의 비판들은 아주 편리한 비판이다. 불변의 현실 원칙 중 하나인 인간은 모든 걸 할 수 없다는 비판자도 비판 대상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자발적 수동성의 상태는 꽤 뿌리 깊다. 여기에 손을 대는 건 신중해야 한다. 그간 여러 책을 통해 파악한 인간 정신에의 이해로, 보통 이런 순간이 곧 소위 '정신질환'의 씨앗이다. 메스로 절개해 버리듯 언어 폭력으로 난데없이 들추는 일이나, 자의든 타의든 반 강제적으로 그걸 꺼내 입맛에 맞춰(보통은 기호에 따르기보다는 어떤 사회적 명령에 따라 바꾸기 마련이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부자들의 생활 습관' 따위...) 조작하는 행위는 정신 입장에서 불화다. 그럼에도 우리 정신은 참으로 뛰어나서 본인이 자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제로는 불화가 없다고 여기게 해준다. 대개 이런 '자의식'은 일상 속 비의식들로 그 폐해가 누적되기 마련이다.


 신중해야 하는 이 작업은 불가피하게 과도한 의식 가열을 필요로 한다. 이 기간은 경험상 3개월에서 6개월로 보고 있다. 30대 중반인 신체 조건을 고려한다면 이보다 좀 더 천천히 진행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은 의식이 너무 과도하게 질주하지 않을 수 있게 의식으로는 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확보해두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금 내 정신 상태에서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인 '두려움'이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앞서 말한 길들여진 상태에서 나의 두려움이 가장 왕성하게 증식한 지평이 바로 경험에의 두려움이다. 이게 참 까다롭다.


 주관적인 객관성으로 스스로를 관찰해 봤을 때, 나는 경험을 두려워해서 늘 숨고 다니는 정체성이 아니다. 다만 분명히 해두어야 할 건, 두려움은 늘 언제나 새로운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융을 읽은 독자로서 균형을 안 맞출 수 없다. 이전의 두려움, 앞으로의 두려움은 어떤 스테이지를 통과하듯 '해소'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는 쉬운 '두려워하지 말고 직면해라' 따위가 허언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두려움은 그저 어떤 상태의 징표일 뿐이다. 과도한 방식으로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두려움에의 용법들은 대개 정신의 이런 상태를 마치 맞서야 하는 '적'으로 묘사하길 즐겨한다. 이런 방식으로 두려움을 대하는 심리 태도는 사실 분화 발달을 촉진하기보다 힘의 발달을 촉진한다. 그것은 에고 입장에서 고양심을 느끼게 하지만, 정신 입장에선 활화산의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로 대하고자 하는데, 이 분리의 미묘한 수용 방식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지 아직 적확한 어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번 주에는 [무질서의 효용]을 읽었다. 젊은 세넷이 쓴 책이라 그런지 참 청년스러운 내용이라고 여겨졌는데, 지향성에서는 동질감을 느껴 반갑고 그랬다. 도시 생활에서 어떻게 정신을 안착시킬 수 있을까? 수 년간 붙들고 있는 나의 문제의식도 이와 같은데, 결은 달라도 누군가는 역시 작금의 이 상황에서 다른 비겁한 선택을 유보한 채 어쨌든 면역이 활성화되기를 겨냥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한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정신의 표현을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도이 다케오가 20세기 중후반의 일본 젊은이들을 두고 '보육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대'라고 말한 대목은 참으로 명쾌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소위 '선진국'이라면 어디에서든 확인할 수 있는 인식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풍요라는 인큐베이팅에서 태어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청소년기의 정신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란 어떤 모습일까? 묻는다면 그저 21세기 대도시를 보면 된다고. 리처드 세넷은 20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이 모습을 관찰했다. 안나 프로이트의 '청소년기의 지성화' 개념을 갖고와 도시 현대인의 정신 상태에 접지시킬 때 인식 가능해지는 여러 면모들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모로 불편함을 야기시키는 게 사실이다. 이는 고일대로 고인 기성 세대의 '요즘 젊은 것들은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다'와 중첩되어 인식 이전에 부정적 정동을 자극해 닫혀 버리는 불랙박스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다만 이를 인식 가능한 어휘로 풀어내는 게 쉽지 않을 뿐이다. 일본에서 한때 유행했던 '모라토리엄 인간'도 같은 어휘 창안의 시도지만, 역시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여기에 융의 세계관을 덧대면, 우리는 과도해진 대가리로 사람들을 마치 피실험체 동물인냥 이리저리 판단하고 분석하는 편리한 인식을 마냥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 수밖에 없다. 사람 일반은 편리하고 손쉬운 판단과 선택, 행위를 할 수밖에 없고 해야 한다. 한 사람이 인간 일반을 그리며 이렇게 저렇게 발달하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것은 언제까지고 현실이 될 수 없는 전망이라는 걸 수긍해야만 한다. 나이 먹은 세넷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지만, 젊은 세넷은 도시의 무질서와 다양성을 긍정하면서도 섣불리 이런 요인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성인기의 정신으로 발달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고 가정하는 비약을 감행했다. 인류 문명에 있어 지금까지 전방위적으로 무언가가 수용되고 받아들여진 여러 대상들에는 늘 이런 허들이 있었다. 작금의 상황에서도 한쪽에서는 기후 위기를 '현실'로써 내세우며 여러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방대한 인간 일반은 그런 '현실'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옳고 지속가능한 대안의 기획이라 하더라도, 집단 정신은 늘 의도할 수 없다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목도한 인간은 늘 순수함에 취약해지기 일쑤여서 오직 하나의 상만을 간직할 공산이 크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성 이슈'는 세넷 말마따나 우리로 하여금 어쨌든 성숙해지기를 자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은 마치 주가가 언젠가 오를 거라는 말과 같은데, 이성은 늘 현재에 봉사해야 한다. 세상의 다양성,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정신의 다양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성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벌어지는 충돌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다양성의 위협을 축소시키려는 정신을 구축한 정체성도 그저 다양성의 일부일 뿐이다. 나의 두려움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정체성들에게 영향을 받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공동체나 집단,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상정하는 건 나에게 있어 두려움이다. 사람이 이래야 한다는 것도 두려움이다. 어떤 인식, 감수성, 정보, 감정을 갖지 않음에 도덕이나 윤리, 인격적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도 두려움이다. 이전까지의 나는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별별 몸부림을 다 치고 다녔다. 아무리 고민하고 걱정해도 세상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 참 애를 많이 먹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체험이, 세넷이 말하는 '실패'겠지. 낭만적이고 진정성 있는 자아로 세상에 눈을 뜬 수순이라면 이런 과정은 불가피하다. 다만 실패를 끊임없이 유보한 채 무언가를 계속해서 붙들고 있는 '유예 기간'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라고. 이 차이를 이제는, 체화할 수 있을까? 인식은 가능하지만 내 몸이 될지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는다. 해 봐야 알 거 같다.


 경험에의 두려움이 열등하게 남아 있으면 책에의 의존성이 강화된다. 다음 주의 겨냥은 아마 이 부분이 될 거 같다. 이번 주의 예열 기간 동안 정신의 '닫는 기술'이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는 걸 새롭게 포착했다. 한동안 점진적으로 구조화시킬 작업 모드에 필수불가결한 비의식인 거 같다. 세넷은 도시에 살면서 풍요를 보다 삶의 의미로 활용하기 위해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제안했다. 지난 6년간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지낸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은 절대 결코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쪽이 거부하는 이 마주침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만남은 결코 일방적일 수가 없는 데 말이다. 근데 또 가만 보면 어떤 조건과 상황 하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며 산다. 그게 익명, 대중, 인간 일반, 혐오하는 이미지 들에게는 건네지지 않을 뿐.


 아마 '서로의 다름'이라는 건 다른 데 함정이 있는 거 같다. 그러니까, 다르다는 인식 자체의 구조 문제가 아니라 언어 사용의 문제일 뿐, 인식 구조가 달라지면 뒤따라올 언어 교정으로 말미암아 과밀해진 대도시에서의 개인성이 다르게 포착될 여지는 있다고. 어쨌든 지금은 그런 실정이 아니긴 하다. 우리는 여전히 과도한 개인성으로 여러 고통을 호소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여러 대안과 선택들을 이러저러한 정신 상태라며 비판하는 건 조금 못 된 짓이다. 인식이 불충분하면 엄한 대상을 꼬집게 되니까. 다들 그러고 산다. 나도 마찬가지다. 정신의 발달이니 성숙이니 하는 건 패러다임이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으레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추구된 미덕이었다면(사실 좀 더 면밀히 관찰해 보면 그런다고 다 그렇게 됐던 것도 아니다. 역할의 부담만 커졌지), 21세기 대도시에서는 옵션으로 여겨져야 다양성 문법에 걸맞는 태도로 보인다. 쉬운 인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가장 쉬운 조건과 상황에서부터 이런 어휘 용법이 차곡차곡 누적되었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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