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9
24.05.10
불과 한 달 전, 책을 덜 읽자는 다짐이 무색하게 닥치는 대로 책을 붙들고 있다. 올해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마무리를 짓자는 결심은 너무 멀어, 여전히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붙든다. 어쩔 수 없나, 이 놈의 근시안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근래 눈이 더 나빠지는 기분이다. 안경을 써도 어쩐지 초점이 드문드문 흐려지는 기분이다. 시력 없는 삶은 어떤 삶이 될까.
근래 읽은 책은 5권이다. 각기 다른 책이지만, 나의 문제의식으로 억지로 묶어 버리면 '순간을 의식한다는 것에 대해'다. 조너선 크레리는 근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관찰자'가 어떤 구조적 여건을 드러내는지 시각 발명품을 갖고 풀어낸다. 폴 오닐은 20세기 중후반부터 형성된 '큐레이팅-큐레이터'에 대한 동시대의 역사를 훑어준다. 이 둘은 서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도 억지로 '사실 상관 있다'고 말을 지어내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들이 관찰하는 '사람'으로 초점을 옮기면, 공통 분모는 하나씩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추상화'다. 큐레이팅 문화가 전면 부상해 오늘날 소비와 맞물려 너도나도 큐레이터의 역량을 조금씩 기르는 데에 기반이 되는 시선 중 하나는 추상화의 시선이다. 돌려 말해 추상화의 시선이 없으면 큐레이팅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큐레이팅의 부상은 지배적인 제도권의 약화, 탈신화화, 나아가 문화화와 결합해 '독립성'을 갖춰 나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이 가능하려면 보이는 것 이면, 너머, 예외를 포착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한 시선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미리 예정된, 고정된, 마련된 걸 제공하는 사회적 합리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추상적인 것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재촉한다. 추상적인 걸 본다는 건, 바꿔 말해 한 인간이 '추상의 시선'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여러 조건들을 살핀다는 건, 마찬가지 추상을 알아볼 수 있는 시선이 요구된다. 즉, 이것은 독립된 언어-의식이다.
이 독립은 다른 말로 차폐된, 닫힌, 고립된, 구별된 등등으로 유연하게 접근 가능하다. 공간으로 다가갔을 때 우리는 이러한 독립이 '구획 짓는' 어떤 벽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전부터 정신의학-정신병리 텍스트를 참조하며 왜 인간 정신에 있어 '닫힌 의식'이 발생되는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다른 현실'이 출현하는지, 그리하여 공유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지를 궁금해 했었다. 아주아주 기초적인 문장은 이렇다. 겉으로 드러나는 '몸'은 물질성을 띄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공유할 수 있다(그러나 '몸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정신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변하는 언어 표현은 고유의 처가 없다. 그것은 발화라는 순간적인 행위이자 사건으로 출현하는 동시에 소멸하거나, 쓰기라는 (알고 보면 참으로 기이한 현상인) 지속적인 행위로 인식 가능한 형상으로 매개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대충 뒤섞어 한 인간 총체를 어떤 때는 알 수 없는 것으로, 어떤 때는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으로 말한다. 어떠한 구분 없이, 혹은 의도적으로 구분을 제거한 채 서로 연관없는 내용이 한 곳에 모여 막무가내로 다뤄지는 걸 이성 사용자들은 몹시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런 현상이 일반 인간의 자연스러운 '몸짓'이지만, 구분과 차이는 의미 발생을 도모하며 이런 덩어리진 언행을 정리하고자 한다. 면밀히 이런 현상을 관찰하고자 하면 우리네 정신은 실로 중층다중의 어마무시한 독립 체계가 매우 신속하게 서로를 넘나드는 걸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가령 '형이상학'적 사고와 시선을 독립된 언어 체계의 하나라고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보인다. 무언가가 독립적이라고 말할 때, 그 다음이 뒤따라와야 우리는 그것에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용적으로 어떤 쓰임이 있다든지, 윤리적으로 어떤 정서-의미를 자극한다든지, 때로는 과시용으로 어떤 주목과 인정을 받는다든지 따위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회 논리가 뒤따라오지 않을 때, 엄밀히 말해 '독립된 체계'의 확인은 가시화될 확률이 낮다. 언어란 소통을 통해서만이 어떠한 존재자가 기능하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가 없으면 발신자도 없다.
일단 추상의 시선은, 내가 느끼기로 오늘날 동시대의 주요한 관찰 태도다. 언어화가 진행되지 않아도 거진 모두가 이 시선을 뒤섞어 사용한다. 한 영화를 보고 '감독'과 '프로듀서'의 의도나 개입, 그들의 의사결정이 영화라는 콘텐츠에 개입되어 있음을, 그 맥락을 포착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인간'이 일반 대중에서 확인되는 건 정말이지 21세기 고유의 특징일 것이다. 그 어떤 시대에서도 추상의 화신인 '컴퓨터-스크린' 위에서 노닐며, 시선 자체도 늘 항상 '그 너머의 가정'에 두고서 유동하는 일반 인간의 모습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역사를 공부해야만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여러 공부, 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때는 마찬가지 행위의 동일시를 벗어난 추상적 모델로서의 유사한 형식, 태도, 개념, 구조 등으로 보다 풍성한 관점을 제공할 확률이 높다. 기본적으로 역사적 의식으로서의 연구라 함은 추상의 시선이다. 추상화 없이는 '역사'를 그려낼 수 없다고 느낀다.
국내에는 번역도 되어 있지 않고, '나카이 히사오'나 '조르주 아감벤' 같은 학자의 인용 및 발췌를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소개된 일본 정신의학자 기무라 빈의 인지 모델이 있다. 그는 하이데거와 메다드 보스의 교류로 인해 일종의 화학작용이 일으켜진 '인간학적 정신의학'의 유학생이었다. 그는 독특하게도, 우리 인간이 겪는 일종의 '정신병'이 각기 다른 시간 의식에 따라 구조화된다는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또 그의 '아이다(사이)'라는 개념이 야스나가 히로시에 이르러 공간 의식으로의 구조화로 파생되기도 했다. 히로시의 '팬텀 공간론'은 한국어로는, 특히 인터넷 검색으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된 바 있는, 레크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독화가 진행된, 이 정신-인지 모델들은 내게 있어서 매우 반짝거리는, 독창적인 것으로 '읽혔다'.
기무라 빈이 일단은 '시간'을 직선으로 여겼는지, 곡선으로 여겼는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구조로 여겼는지, 완전히 다른 '형상'으로 여겼는지는 나로서 알 수 없다. 내가 현재 알고 있는 정보로는, 그가 시간을 '전-중-후'로 접근했다는 것뿐이다. 가령 카를로 로벨리의 말을 빌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인식하려면 어떤 이는 물리-수학의 추상화 모델링에 익숙해 그것에의 스케치가 가능하거나, 루이스 멈퍼드나 폴 비릴리오 같은 기술사학자-기술철학자를 따라 (가능하다면 후설을 경유해) 시간 의식이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정신 활동을 야기했는지로 일단 인식을 분절시킨 뒤 칸트식 물 자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시간' 그 자체에의 의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거진 시간을 대하는 우리에 대해서 뿐일 공산이 크다. 대상화할 수 없는 무엇을 언어로 붙들고, 끊임없이 외부 현실의 무엇들과 관계 구축을 시도하면서 마치 그것이 외부 현실에 있는 것처럼 가정할 때 결국 알 수 있는 건 그 '무엇'이 아닌 무엇을 둘러싼 우리네 반응이다. 이 구도는 '무의식'에도 유사하게 적용 가능하고, '신'에도 적용 가능하고, 특정 어휘에도 두루두루 적용 가능하다.
이러한 반사 작용으로서 비추어 알 수 있는 것. 이것은 정확히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관찰 방식'이다(동굴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즉, 우리는 이런 의식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관찰하고, 또 그에 맞춰 어떤 활동을 하는 데에 이미 충분히 익숙하다. 잘 활용되고 있는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이것을 언어로 잘 유도했을 때 꽤 높은 확률로 인식 활동에 성공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여기에서는 아직 '개인의 고립된 독립 정신'은 그렇게 주요한 것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이 특징은 크레리가 지적한 것과 같이 18세기 낭만주의와 더불어 같이 자리잡았다. 그 형상이란 바로 어두운 방에 있는 한 고독자의 상태다.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로 넘어가 이방인으로서 지낼 수 있어서 비로소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명석판명한 명제에 도달했다는 건 나에게 그러한 힌트를 제공해준다. 이런 시선은 사람들에게 아직 그렇게 매력적인 맥락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심리학-정신분석의 유행과 더불어 파생되기 시작한 '관찰 방식'이 문화권에 정착한 시대 특징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러한 시선은 한 인간의 어떤 행위를 서사나 이력, 에피소드와 같은 사실-사건뿐 아니라 '정신사적 흐름'도 고려하는 시선이다. 이것이 가장 잘 활용되고 있는 분야는 바로 범죄 프로파일링이다. 내가 알기론 추리 소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리잡은 걸로 알고 있다.
한 인간이 어떤 눈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즉, 개별화된 눈이라고 하는 건 단순히 신체-감각적 안구를 의미하는 게 아닌 관점과 비전, 시선이라는 행위로 다뤄지는 '인식-언어'를 가리킨다. 이전 사람들, 특히 중세 사람들에게는 개별화된 눈이 주요한 쟁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단 눈 그 자체가 신체와 분리된 것으로 다뤄질려면 먼저 인식과 감각의 분리를 필요로 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인식이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대를 두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느낌을 갖는지 우리는 일단 '다를 것'이라 가정한다. 탐색을 하고 검증을 하고 교류를 한다. 이 특징은 익명이 구성되기 시작한 대도시화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제 더 이상 '실제'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진 이미지-스펙타클의 범람부터 우리는 니클라스 루만이 2차 질서 관찰이라고 부른, 한 단계 복잡한 관찰 체계를 체득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보이는 것, 보이지 않으나 보여지는 것을 넘어 자기-지시적 관찰을 덧댄다. 보는 순간 나 또한 보여지고, 보여지지 않을 때에도 언제든 스스로를 보는 순간의 중첩이 한 덩어리가 된다. 오늘날 진부해질 정도로 익숙한 인공 지능 모델에게 이러한 인지 방식을 학습시키려고 할 때, 얼마나 복잡한 체계 구조화를 꾀해야 할지 아찔해지지만 유아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습득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 시대의 인식 체계가 어떤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수준을 한 단계 더 복잡하게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는 시절의 소급이 점진적인 게 아니라 무수한 것들을 생략한 채 한 덩어리로 바로 습득할 수 있기에 인류는 '학습'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느끼기로 이런 일련의 과정이 가능한 데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게 바로 '닫힌 의식'인 거 같다.
축제를 다루는 김홍열의 텍스트와 스포츠를 다루는 한스 굼브레히트의 텍스트를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떤 순간에 몰입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기무라 빈은 시간성에 따른 인지 모델의 개념에 Festum이라는 라틴어, '축제'를 채택했다. Post-Festum, Intra-Festum, Ante-Festum 이렇게 세 개다. 순서대로 축제 후, 축제 중, 축제 전이다. 그가 어떤 맥락으로 Festum을 채택했는지는 아직 추적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기에 '현존재'라는 정신 상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굼브레히트가 스포츠의 매혹적인 순간을 '현존의 미학'이라 일컬은 것이 꽤 유의미하게 설명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즉, 우리 인간에게 축제란 무엇인가? 축제라는 어떤 시공간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정신 관계를 맺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현존하고 있다는 바로 그 상태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시공간이다.
현존은 하이데거를 참조하기 전에, 먼저 '집단 의식으로의 동일시'에 가깝다. 이는 융이 분석심리학에서 꽤나 경계하고 때로는 질색팔색하는 바로 그 행위다. 융은 개인 정신의 운용을 위해 과감히 집단 의식과 결별할 것을 요청한다. 집단 의식은 오물탕이다. 집단 의식은 개인 정신을 목졸라 죽여버린다. 집단 의식에 들어가 있는 이상, 개인 정신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뉘앙스를 군데군데 풍기고 있는 융의 입장이 있는 반면, 굼브레히트는 도리어 집단 의식에 과감히 참여해 그것에의 찬양, 우상, 감사, 열광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에게 집단 의식, 공동체 의식, 참여, 군중화-대중화란 무엇일까? 왜 어떤 개인은 대중을 그렇게나 혐오하고, 어떤 개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중의 부분이 되는가? 나에게는 비밀처럼 여겨지는 이 상반된 정신 태도를 풀기 위해 몇몇 책을 추려놨다. 다만,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조금 다른 해석이다. 나는 여전히 기무라 빈의 인지 모델에 꽤 매력을 느끼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의식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을 때 발생하는 여러 덩어리진 심리 오류(단순 그림으로 비유하면 정해진 회로로 신호가 작동하는 게 아닌 다른 회로로 신호가 끼어드는 식의 혼선을 일으키는 오류)가 우리 인간 정신에 놀랍도록 심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호기심은 사실 꽤 위험한 접근이다. 만약 이 호기심이 명석판명하게 설명될 때, 그래서 이 접근이 사회로 공개-공유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 본다면 나는 이걸 알게 됐다고 해도 평생 공개하지 않을 거 같다. 왜냐하면, 이것이 드러나면, 우리는 한 인간을 소위 '정신병'에 걸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우발적인 사건과 사고, 우연적인 정신사와 더불어 유전적 특징의 조합으로 인해 예측불허로 나타나는 '정신병'이, 의도되고 계획적으로 접근 가능해진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도한 우려는 줄일 필요가 없다. 새로운 인식은 절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의 미학으로 다뤄지는 축제-스포츠-어떤 열광의 몰입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현실'을 살게 만든다. 그 세계는 철저히 '닫힌 세계'다. 그래서 닫힌 의식으로만이 넘나들게 되고, 게임 세계가 동시대에 폭발적으로 증식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우리가 소위 '현실' 운운하는 바로 그 일상의 의식으로 보기에 '다른 현실'로 여겨지는 데 어떤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나의 직관은, 사실 우리가 일상의 의식 자체가 이 다름을 유발하는 '닫힘의 체계'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니까 본래 고대 인류부터 주구장창 수행되었던 축제-코마 상태-소위 약빤 상태-몰입-몰아 등등의 특징적인 정신 상태는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의 강한 이끌림을 중독으로, 의존으로, 어떤 집단 의식에의 동화로 한발짝 떨어져 거리를 두는 데에 모종의 자책감, 죄책감, 부정적 정서 등등을 느끼는 사태가 이 닫힌 체계 간 충돌인 것이다.
일이 있어서 글을 억지로 중단해야 해서 아쉽지만, 21세기는 각각의 닫힌 의식 간 얼마나 호환을 이끌어내는지가 점점 부각되는 시대 문제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 요청에 따라 호환은 어쩔 수 없이 산업근대의 논리에 의존해야 한다. 즉, 표준화, 평준화, 일반화에 기대야 한다. 그래서 알쓸신잡이니 5분 요약이니 무엇이든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고 짧고 재밌고 등등으로 일단 하수구처럼 흐르는 것이다. 이는 문화 상품으로 접근했을 때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의 소비 최적화로 포착된다. 그러나 소비자가 된 일반 인간이 무엇에 자극을 받고, 필요를 느끼고, 또 기꺼이 시간이든 돈이든 소비하게 '열리는지'는 조금 다른 이야기여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자는 소비자의 '정신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알고리즘화되는 접근으로부터 이제 호환을 끝마쳤다. 소비자는 여전히 자신의 소비 속에서 반사 현상으로서 자신의 진정성, 의미, 가치, 정서 자극을 맛보지만 자신이 어째서 그러한 '소비 방식'에 휘말리고 있고, 더 자극에 노출되게 되고, 이러한 거시적 흐름으로부터 어떤 존재인지를 비평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립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소비자의 자율적 소비, 그러니까 자신의 순간순간 판단과 행위에 어떠한 '의식화'가 촘촘하게 적용되는 그런 상태로의 자립에 있지는 않다. 소비자는 이제 피드백을 좀 더 강화해야 한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이제 시작이지 않을까, 그런 변혁이 느껴진다.
원래는 21세기 관찰자의 눈이 어떤 눈인지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만 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