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와 돌멩이 May 24. 2024

아버지


24.05.24



약 2주 전 누나 방에 있던 아빠의 유품을 들고 왔다. 2011년 4월 1일 집에서 죽은 아빠의 물건을, 누나는 챙겨두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등병이었고, 부고 소식을 부대에서 들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고 곧장 부대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부대에 갇혀 우울증을 앓고 난 뒤, 경도된 정신으로 쭉 살았기 때문에 전역을 하고 나서도 내 삶을 사는 데 급급했었다. 중간중간 아빠의 물건을 살피고 챙겨두긴 했지만 유품을 살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빠는 기억할 물건을 간직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버릇은 누나와 나에게도 은근히 물려졌는데, 나보다는 누나가 좀 더 아빠스럽게 버릇을 갖고 있는 거 같다. 덕분에 아빠의 물건이 남아 있다. 엄마는 이것저것 버리려고 했다는데, 내가 느끼기론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하려는 마음이었던 거 같다. 물건을 정리하는 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 언젠가는 죽어 사라진 사람의 삶을 정리해야 한다고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 다시 들춰볼까 싶어 기록으로 남겨둔다.






60년 여름에 태어난 아빠는 두메산골 큰집의 장남이었다. 이후 태어난 동생들로 7남매 중 둘째. 여러 편지와 어릴 때부터 겪은 친가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통해 당대 삶이 어떠했는지를 그려볼 수 있다. 특정 정권 시기에 불거진 지역에 대한 공동체 의식의 정체화는, 나로서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체험이라 선명하진 않다. 아빠는 전라남도 순천 사람이다. 도시 네이티브인 나로서는 대한민국 7~80년대부터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소위 베이비 붐 세대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지역 정체화를 공감할 순 없다. 하지만 드문드문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영향에 대한 흔적을 발견하곤 한다.


 60년대 두메산골의 큰집이라 함은 근대화로 넘어가는 문턱에 놓인 농경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놓였다는 뜻이다. 서서히 지역에 학교-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그래서 의무 교육과 함께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하자'는 삶에의 강력한 명령이 자식들에게 떨어지던 시기다. 우리가 몇몇 콘텐츠를 통해 접할 수 있듯,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이라는 이름의 신분 상승 혹은 출세로 한 사람-인격이 숭앙됐다는 이미지와 유사하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렇게 불러도 크게 벗어나는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행해졌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즉, 단순 시골이 아닌 두메산골에까지 그 영향이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방방곡곡 뻗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빠에게도 무척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윤리가 있다. 우리 젊은 인간들이 소위 꼰대식 문화라 부르는, 유교 문화의 윤리다. 솔직히 이쪽으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왜 '유교' 문화인지는 모른다. 눈치로는 분명 잘못된 개념일진데, 일단 통념에 따르고 있다. 해당 윤리는 농경 공동체와 밀접한 결속을 맺고 있다. 그래서 그냥 농경 윤리라고 부르는 게 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인 통계 수치로 획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농경 마을에는 단위가 있어 보인다. 이 단위는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인데, 집으로 따지면 약 10채 언저리다. 한 집당 인구를 얼추 3~5명으로 잡더라도 한 마을 인구는 약 3~50명이었을 거 같다. 


 또한 장을 기준으로 마을마다 소통과 교류가 이어진다. 어디 마을의 누구, 또 친인척으로 연결되는 어디 마을의 누구 등등 네트워크가 구축된다. 도시 네이티브들에게는 겪어보기 힘든 유형의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고정되어 있고, 무거우며 질기다. 그 이유는 농경 생활의 패턴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무슨 일을 할지가 공통 분모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도 어떠한 일을 하는지 쉽게 말해 예측 불허가 아니다. 또 계절에 따라 특정 땅에서 특정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는 건 사람을 그 장소에 머물게 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조건들이 한데 모여 농경 윤리가 모양난다. 자식을 많이 낳는다는 건 우리가 익히 배운 것처럼 인력=노동력=자원으로 긍정된다. 간혹가다 가난한 집에서 왜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냐고 비아냥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족이라는 특정 모델이 언제부터 자리잡고 인간으로 하여금 추구되기 시작했는가를 보면, 자식을 낳아 가족 인원 수를 늘리는 것이 어째서 추구되는가와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찾아보면 연구 자료가 있을 텐데, 일단 중요한 건 이러한 모델에의 인식이 당사자들에게는 없다는 게 중요하다. 즉, 이유고 나발이고 일단 살아가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근대화의 문턱, 농경 윤리의 요소는 나의 아빠에게 이러한 삶을 모양 냈다.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할 것. 장남으로서 책임을 질 것. 남아선호사상이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시골에서, 그 특권을 제대로 발휘할 것 등등. 여기에 근면 성실함, 양심, 책임감, 자신을 향한 성찰성, 사람들을 이끌고 아우르는 '그릇' 등의 요소. 이러한 면모들이 적극적으로 수긍되고 표출되는 게 바로 나의 아빠였다.


 아빠의 남매 중 남자는 총 2명이었다. 나에게는 작은 아빠라 불린 아빠의 동생이 있고, 나머진 모두 여자였다. 아빠는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군 복무를 했다. 군 복무는 하사관으로 들어가 한 부대에서 분대장을 일임했다. 군 복무 당시 나의 아빠는 소설 1편과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는 글 한 편을 남겼다. 소설의 제목은 '젊음의 함성'이고, 내가 이상하게 여긴 글 한 편의 제목은 '의식개혁운동 성공 사례문'이다. 


 전자는 군 생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자전 소설이다. 아빠는 엄마와 결혼하기 전 누군가와 연애를 했다고 이전에 들었는데, 그 흔적이 엿보인다. 아마 지금 군대는 수십 년 이어지는 기이한 관습의 끈이 이제 끊어지고 있겠지만, '라떼는'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격 훈련 당시 로프를 타고 떨어지기 전 꼭 '애인 있냐'고 묻는 게 그중 하나다. 그러면서 있다고 하면 애인 이름을 외치고 떨어진다. 아빠의 첫 애인 이름은 '연아'였다. 소설을 보니까 아마 고무신 거꾸로 신은 거 같다. 


 아빠는 분대장으로서, 군인으로서 적합한 인격이었다. 사명감, 복종심, 통제력, 지도력, 모범 등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역량들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한 가치들을 본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단련하는 데에 남들과 다름을 나타냈다. 어쨌든 대한민국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에 대다수 남자들은 군대에 다녀오기 때문에,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남자들은 전쟁에의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상상의 여지가 생긴다. 군대를 갔다 온다고 해서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 사람들은 마음 한 켠에 무언가가 자리잡는데 그것은 바로 '군인'에 대한 자리다. 유사시에, 비상시에, 위급시에 등등 어쩌면 나타날 수도 있는 특정 상황에 의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자리. 나의 아빠는 그런 자리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군대에서는 농담삼아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전쟁 나면 간부 새끼들 따를 바에 쏘고 죽는다. 저 새끼 믿고 따르단 죽는 거 시간 문제다. 등등. 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나의 아빠는 그래도 목숨을 걸어도 괜찮은 사람이었나 보다. 나도 군대를 갔다 오고나서 은연 중에 생긴 의지 중 하나는 죽을 자리를 자진해서 걸어가는 것이었는데, 나의 아빠에게도 그런 게 있었다. 나는 지금도 전쟁이 나면 나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먼저 죽을 마음이 있다. 노인과 여자와 아이는 살려야 한다는 게 무식하리만치 맹목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합리적으로 여기면 참 어이없어도, 때로는 이런 의지의 영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밖에서는 도무지 소용도 없고 쓸모도 없고 오히려 부정적인 가치관이다. 나는 모드 전환을 하는 것처럼 마음 한 켠에 숨겨 둔다. 일상을 살아갈 때는, 시 작업을 할 때는, 머리를 쓸 때는 꺼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꺼내야 할 때는 꺼내야 한다. 아빠가 쓴 '의식개혁운동 성공 사례'는 이런 정신 함양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나고 제5공화국이라 불리는 전두환 시기의 흔적이다. '의식개혁운동'이라니. 오늘날 시선으로 보면 참 얼토당토 않은, 한편으로는 같잖은 것이지만 또 그렇게까지 가치 박탈을 할 정도로 우스운 건 아니다. 해당 내용은 근대화에 들어서며 '국민성', 특정 국가 체제의 시민 의식에 대한 여러 규율적 접근 등이 녹아들어 있다. 푸코의 논의들이 거진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나의 아빠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들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모양냈고, 여기에 잘 달라붙는 농경 윤리의 근면 성실이, 양심과 책임감이 어우러져 꽤나 규율적인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로 그는 '아빠'로서 매우 적격인 사람이었다. 나의 엄마는 남자를 볼 때 오직 책임감만을 따지는, 꽤나 단순하고 전형적인 당대 사람이었다. 이 둘은 서로에게서 여러 조건들이 맞물린 '적합함'을 확인했던 거 같다. 각자의 마음에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의식에 숨겨진 여러 현실 조건들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나의 엄마 또한 시골 마을에서 큰집의 장녀였다. 이 둘은 서로에게서 어떤 위안, 의지, 편안함을 느꼈던 거 같다. 나는 엄마를 볼 때 소의 우직함을 자주 엿보고는 하는데, 아빠의 가치관으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인격으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볼 때 인격이 얼마나 성숙한가를 살피게 되는 건 엄마아빠가 나에게 교육시킨 게 아닌데도 물려받았다.


 융의 시선을 빌려와 바라보면, 나의 아빠란 사람은 그 집안의 그림자가 통과되는 일종의 밝은 통로였다. 아빠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수록, 그 외의 사람들은 그림자로 살아가도 괜찮았던 것이다. 자립과 독립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또 사회로 진출하는 과정에 있어서(군대 생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던 나의 아빠는 말그대로 적응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나와는 정반대로 외향적인 사람이었고, 사람들과 관계를 구축하고 또 인격 함양에도 꾸준함을 보이는 균형잡힌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 아빠는 집안의 그릇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릇이 되도록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융이 몇몇 신화와 연금술 과정을 통해 소개해준 이런 '왕-왕자'의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한 사람이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만들어낸다.


 나의 아빠가 서울에 자리를 잡고 하나씩 하나씩, 근면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일궈갈 때 그의 동생들은 서울에 있는 큰 오빠에게 입을 벌렸다. 아빠는 동생들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오빠 돈 좀 부쳐줘'였다. 언어에 예민한 나는 고모들의 편지, 남동생의 편지 너머의 어떤 욕망이나 마음을 희미하게라도 읽어낸다. 엄마와 아빠의 안부를 묻고, 계절에 따른 자연 얘기를 하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하는 '문구'를 남기지만 '어서 돈 좀 줘'가 맨 앞에 있기 때문에 편지를 썼다는 게 보인다. 앞서 구구절절 썼듯이 나의 아빠는 책임감이 강한 그릇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동생들의 아기 새 같은 입벌림에 늘 돈을 넣어줬다. 자신은 하숙집 생활을 해도 늘 집안 걱정, 동생 걱정, 자신이 집안의 대들보라는 짐을 짊어졌다. 누군지 모르지만 아빠의 한 친구는 아빠에게 vip라고 불렀다. 이런 건 당대 사회에서 간혹가다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유형 중 하나다.


 아빠는 서울교통공사에 취직해 공무원이 되었다. 서울에서 하숙집 생활을 시작으로 반지하 단칸방, 외할아버지가 살던 한 집을 건너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전세 집을 얻었다. 나는 반지하 단칸방 시절에 태어났다. 아빠의 유품 중에는 누나와 내가 태어난 기록 몇가지가 있다. 누나는 태어났을 때 실명이 될 뻔한 일이 있었다. 이제 눈을 뜰 때가 됐는데 눈을 뜨지 않아 엄마는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디서였는지 모르는데 엄마가 울면서 도움을 청하다 한 아주머니가 영등포인가 구로의 어디 안과를 가보라고 했다고. 거기서 누나의 눈물샘을 뚫어주고 누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의 진료증을 아빠는 갖고 있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력했던 두메산골의 큰집이었기 때문에, 누나의 탄생은 축복받지 못했다. 이 흔적은 어릴 때부터 은연 중에 알고는 있었으나 어쨌든 나는 '남자라서' 당사자성을 가질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와 누나 편에 서서 이들을 옹호하는 일뿐이었다. 나의 아빠도 당연히 이에 대해 극복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작은 아빠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나의 아빠가 매우 속상해 했다는 것이다. 작은 아빠는 아빠에게 '형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요,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데 만족해야지'라고 아빠를 타일렀다. 지금 가치관으로는 당연히 욕을 먹고, 부정적으로 다뤄지기 일쑤지만 당대 사회 속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소재였다.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고, 또 그에 따라 한 사람의 정신적 고통이 만들어질까? 이를 제대로 알아보고 이해하기 위해선 지금으로선 소실되어 느끼기 힘든 무수한 체험들이 필요하다.


 작은 아빠는 나의 아빠를 형으로서 믿고, 의지하고, 의존했다. 나는 아빠를 닮지 않고 작은 아빠와 성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작은 아빠가 아빠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 비열한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싶지 않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감수성은 정확히 내 감수성이다. 융의 인간관으로 빗대어 표현하면, 나의 아빠는 외향적 사고 유형을 주로 가지며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작은 아빠는 완벽히 내향적 유형으로, 외부 현실로부터 쉽게 상처를 받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예민하게 느끼며 (정신적으로)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작은 아빠에게는 현실 세계에 적응해 스스로의 삶을 일궈갈 역량이 잘 길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나의 아빠가 정신이 무너져 먼저 죽고, 곧장 작은 아빠도 덩달아 정신이 무너져 시골에 홀로 남아 고독사 같은 느낌으로 삶을 마감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작은 아빠는 그래도 아빠에게 여러 의지를 했던 모양이다. 특히 누나가 태어났을 때, 그래도 옆에서 잘 달래줘서 아빠도 균형을 잡았던 게 아닐까 싶다. 유년 때부터 그랬지만 우리 집안에서 성차별은 거의 없었다. 다만 강력했던 건 '책임감'이었다. 나는 이에 면책되었는데, 그 이유는 둘째라서 그렇다. 엄마와 아빠 둘 다 첫째라는, 장남 장녀의 윤리관을 적극 수긍하며 성장했기 때문인지 나의 누나는 어릴 때부터 나의 잘못이 곧 누나의 소홀함으로 직결됐다. 최악 중 차악이라 함은, 아빠의 정신 무너짐으로 가정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에 그래도 이런 윤리관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되어 점차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아빠가 죽고 나서는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유년 때는 누나가 나 때문에 불평등을 자주 겪긴 했다.


 이후 내가 태어나고, 아빠는 비로소 '하나의 가정'이 구축된 걸 뿌듯하게(?) 당당하게(?) 여겼는지 우리 가족의 최초 등본(나와 누나가 출생 신고를 마친 뒤 나온 첫 등본)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 엄마와 신생아인 나에게 영양 주사를 놓은 영수증도 갖고 있더라. 아빠는 대체로 이런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해외 여행을 갈 때 준비를 한 흔적. 유추하는 것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장난감으로 갖고 놀았을 장난감(난 당연히 기억 안나는데, 아빠 유품에 어떤 119 미니 자동차가 있었다). 온갖 사진의 필름. 누나와 내가 보낸 편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보낸 편지들. 엄마가 보낸 편지. 나의 엄마는 언어 능력이 길러진 적이 없었다. 그 서툰 표현 속에서, 원체 감정 표현도 잘 하지 않는 엄마가 나의 아빠에게 이런 문구를 남긴 적이 있다. '나의 사랑'. 그리고, '우리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살자는 말. 그 말을 건넨 배우자가 어떤 연유로 정신이 망가져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이성을 잃고는 칼을 손에 쥐고 죽이겠다 협박을 했고, 하도 술을 쳐먹어서 이제는 발작을 일으켜 몸을 달달 떨며 나무 토막처럼 경직되는 걸 같이 잠들던 침대에서 발견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 열심히 살아요. 아마도, 이런 마음은 아빠에게 잊혀졌던 모양이다. 엄마에게도. 나는 마음을 간직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당연하다. 한때는 사랑한단 말을 하고. 걱정을 하고. 행복을 빌고. 형 오빠, 믿음직스럽다고. 오빠가 있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되는지 몰라라며. 그런 말들이 나오는 마음을 나는 거짓된 것으로 보진 않는다. 그 말을 하면서 동시에 돈 좀 달라고, 아빠가 일할 때 철로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을 때도, 죽었을 때도.


 젊었을 때부터의 아빠는 어떤 것들을 견디며 살았을까. 감당하며 살았을까. 그 막대한 것들이 그림자로 한 번에 터져나왔던 게, 정신의 무너짐은 아니었을까? 수십 년의 부담. 수십 년의 책임. 갈수록 커져가고, 짙어지고, 무거워지던 것들이 결국 무언가를 엎지르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잘 살던 사람이. 근면 성실하게 살아왔으면서, 그런 배우자를 옆에 뒀으면서 뭐가 부족하고 조급해서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걸 걸게 되었을까. 


 유품 중에 카세트 플레이어와 카세트 테이프 하나가 있었다. 테이프에는 '취급주의'라고 손으로 써져 있었다. 유품 중에서 확인하지 못한 건 이 카세트 테이프가 유일하다. 플레이어가 오래 돼 고장이 났는지 작동되지 않아 들어보지 못했다. 뭐가 담겨 있을까. 무슨 내용일까. 내가 그토록 풀고 싶었던 아빠의 비밀일까. 별 거 아닐까. 판도라의 상자일지,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통조림일지 감이 안 온다. 


 아빠의 군대 시절 소설에는 통속적인 사내들의 인생관, 사랑관, 가치관이 담겨 있었다. 아빠란 사람은 특별하지도 않고, 무언가가 특출난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시대 태어난 사람들 중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이다. 태어난 환경, 시대적 환경 등등이 맞물려 이런 사람으로 살았고, 이런 사람으로 죽었다. 군대 훈련병 때 나는 편지에다 글 쓰는 게 재밌다고, 꼭 책을 내고 싶다고 애새끼처럼 굴고 있었다. 그랬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아빠에게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이제 나도 다 컸다고, 아빠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나도 이제는 아빠의 짐을 나눠 들 수 있을 거란 마음이 싹틀 때, 어딜? 하는 운명으로 그냥 다 갖고 가버렸다. 아빠란 사람은 그릇을 가진 사람임에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참 재밌는 건, 누가 시킨 것처럼 나도 아빠도 군대에서 법구경을 읽었던 것이다. 피라는 게 이런 건가.


 아빠의 가족, 나의 가족. 가족에서의 아빠, 가족에서의 나. 가족 관계는 하나의 모델이지만, 그 모델 안에서 벗어나는 건 이전 시대까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아빠를 구시대의 유물 따위로 여기진 않는다. 나의 역할은 결국 중재이고, 연결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리 잡는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기억으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 영적인 이야기일까? 나는 이런 부분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나서부터는 사람들에게 이런 연결 감각이 다른 층위에서 형성되고 활용되고 있지만, 소위 구시대의 연결 감각은 나름의 독립 체계다. 나는 딱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거나, 전달하고 싶거나,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동시대의 적응 코드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알려고 하거나, 전달받고 싶어 하거나, 듣고 싶어 하는 욕구를 느낀다. 나의 성향은 발신자보다 수신자에 가깝다. 그러니까, 아빠는 나에게 도착해 있다.


 아빠의 유품들은 모두 아빠에게 도착한 것들이다. 내가 가장 궁금해 하는 건 아빠가 보낸 것들이다. 편지도 그렇고, 누군가를 향한, 바깥을 향한 것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찾을 수 없다. 자신에게 도착한 것들은 결국 자신이 꺼낸 것들의 반응이다. 아빠 친구들의 여러 안부들. 동생들의 지저귐. 몇 가지 물건들. 나에게 도착한 아빠는 내가 아빠에게 꺼낸 것들이기도 하다. 아빠를 알려고 하는 마음. 아빠를 전달받고 싶은 마음.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 마음을 간직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른다. 이게 사람들에게 통용될 만한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나는 사람들이 마음을 간직하지 않아도 잘 살아간다고 느낀다.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왜 간직해야 할까. 나의 경우에는, 돌려받지 못해서다. 앞서 작은 아빠를 닮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바깥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너무 순수하게 꺼낸다. 안에 있어야 할 것을 바깥으로 꺼내고 만다. 그래서 쉽게 잃어버리고, 아프고, 다친다. 그것이 '다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 이유는 마음이 곧 나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과의 동일시가 가능한 사람들이 늘 이렇다. 그래서 삐뚤어지기도 하고, 닫혀 버리기도 하고, 작은 아빠처럼 '비열한 인간 새끼들'이라고 등질 수도 있다. ㅋㅋㅋㅋ 왜 이렇게 웃긴지. 비열한 인간 새끼.


 아빠의 정신이 무너졌다는 사건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정신의 무너짐. 나는 근래 '방심한다'는 것과 '사로잡힘'에 휘둘리며 산다. 과연 내가 이 열등함을 발달시킬 수 있을까? 괜히 부딪히다 싸게 말해 좆되는 건 아닐까? 합리화는 어쨌든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간 정신의 최대 기능이다. 우리 인간은 늘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생각하고 움직인다. 나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보호를 해제하는 미련한 짓거리를, 근데 나는 또 하게 된다. 해야 한다고 느낀다. 무언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닌데. 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은데. 도박 정신의 원초적인 상태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희미한 무언가를 좇고, 그 정체를 붙들기까지 그것만 좇아야 하는 다른 의미로 사로잡힌 상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근시안은 나를 여러모로 표현해주는 메타포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산다. 보이지 않으면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게 몸에 밴 삶이다. 









작가의 이전글 한몸이 아닌 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