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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n 07. 2024

첫 만다라

내면 작업 19


24.06.07



꿈 #1 (24.06.05)


몇몇 프로게이머 얼굴을 한 남자 친구들과 무언가를 같이 하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다.



꿈 #2 (24.06.05)


축제 시장 같은 곳. 서점 운영?도 나왔던 거 같다. 한 아니마가 나에게 점을 쳐줬다. 나는 어떤 한자 같은 형상 글자 하나를 뽑았는데, 아니마가 그건 엄청 좋은 행운이라고 말해줬다. 이후 어딘가로 갔던 거 같다.






오늘 새벽 5시 쯤 일어나 잠깐 일을 보고 다시 자려고 누웠을 때, 환상 이미지로 만다라를 봤다. 근래 꿈 기록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무언가를 꿔도 선명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잠들기 전 자주 흰색 이미지가 나타났었는데, 오늘 본 만다라는 이런 느낌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폐허가 된 신전이다. 흰 돌기둥과 벽으로 이루어졌다. 현실에서 언젠가 만져본 적이 있는 듯한 촉감이 떠올랐다. 약간 사각거리는, 그런 새하얀 돌의 표면. 군데군데 무너진 흰 돌기둥도 있었다. 나는 이 이미지를 위의 사진처럼 공중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듯 보고,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는 시점으로도 봤다. 


 신전은 내가 처음으로 무의식과 아니마를 의식으로 인식한 뒤 꿨던 꿈에서부터 나타난 소재다. 융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꿨던 꿈이었다. 꿈 분석 사례에서도 간혹 발견할 수 있듯, 분석 초기에 마치 예지몽과 같은 느낌의 미리 예견하는 듯한 꿈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브런치에도 기록해뒀지만, 그 꿈은 벽에 난 사각형 모양의 창문 같은 틀 너머로 어떤 신전(꿈에서는 왜인지 일본 풍이었다)을 구경하다 사적인(현실적인) 문제가 심적 걸림돌이 되어 다시 돌아가는 길에 아니마를 만났고, 아니마는 나에게 푸른 나비의 모습을 한 연을 선물해줬지만 그걸 받지 않았다. 아니마가 매우 수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 경사였고, 나는 어쩐 일인지 아무리 걸어도 그 고개를 넘지 못했다. 자꾸 디딤발이 미끄러졌기 때문인데, 옆에서 반대 방향으로 넘어오는 남자 둘에게 어떤 수상한 눈초리를 느꼈다. 이후 나는 간신히 고개를 넘어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는 내용의 꿈이었다.


 환상 이미지는 만다라 형상의 신전을 본 뒤 갑자기 풍뎅이 한 마리가 나타났고, 이후 아주 불쾌한 녹조 물, 고여 있고 마치 한 여름에 달궈진 듯한 그런 온도의 늪 같은 물에서 몸을 담가 세신하는 순서였다. 물은 실지렁이 같은 해조류? 따위의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는 그런 물이었다. 약간의 끈적거림, 미끈거림, 무언가 썩는 듯한 느낌.


 어제부터 시작한 하이데거 정리를 하다가, 아무래도 이 만다라 이미지를 붙들어야 싶어서 이렇게 이미지로 붙들고 기록을 남긴다. 존재자의 본질적 자리에 비로소 위험의 구원자가 솟아난다는 하이데거의 메시지를, 나는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물론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참조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융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나만의 만다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오늘 새벽에 만난 만다라 이미지는 너무 '나'같다. 사막의 황폐함, 모래뿐인 공간. 그곳은 정확히 나의 정신 세계다. 나는 그곳에서 '녹색'이나 '푸른 물'을 만들어내는 존재의 자리로 향한다. 어떤 이는 이런 세계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물이 넘쳐나는 곳에서 불을 다뤄야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득실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동굴, 누군가는 고요한 숲 속, 누군가는 강, 집, 어떤 고요한 방 등등 아마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거 같다. 융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이러한 자신의 고유성을 얼마나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다.


 나에게 있어 황폐함의 이미지, 폐허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편안한 안식처다. 누군가에겐 이런 공간이 얼마나 숨막히는, 미래라곤 느껴지지 않는 척박한 곳일까? 하지만 나에겐 모든 것이 열리는 절대 공간이다. 이런 정신 세계를 갖고 있으니, 당연히 현실에서 집단 의식을 피하는 경향성을 띤다. 어릴 때부터 자주 갖는 습관 중 하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닿지 않는 '구석'을 남몰래 찾아 시선을 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거의 자동적으로, 남들이 시선을 주지 않는 현실의 공간을 찾아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경향성은 당연히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내가 읽는 대부분의 책은 절판된 책, 아무도 읽지 않는 책들이다. 베스트 셀러 따위의 책을, 나는 절대 읽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가볍게 말하면, 재미 없어서인데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런 걸 읽는 걸까 이해도 가지 않고 공감도 되지 않지만 최대한 그런 집단 정신에 등을 돌리지 않는 게 숙제일 뿐이다. 황폐하고 척박한 정신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현실 세계의 왁자지껄한 인간 정신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적응하기 위해 지금까지 왔다. 사막 한가운데 폐허인 신전 만다라는, 내가 무의식의 일과 의식의 일을 어떤 관계로 임하는지 적어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거 같다.


 첫 만다라를 생각보다 일찍 만난 기분도 든다. 이제 시작이다. 그렇다고 뭔가를 하진 않을 예정이다. 무의식에 더 힘을 준다든가, 꿈 기록을 다시 성실히 한다든가, 의식 에너지를 다시 되돌린다든가 하는 전향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식은 의식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균형을,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배운 거 같다. 참 오래 걸렸고, 이제 시작이라는 기분이다.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만남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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