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22
24.10.16
때는 15년도. 나카이 히사오의 [분열병과 인류]를 읽었을 때 이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가 해당 책에서 기술한 '분열친화적 미분회로 인지' 모델은 나를 겨냥하는 듯했으며,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경도되어 뒤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기술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다름아닌 '인간'과 '세계'의 관계였다. 왜 어떤 사람은 세계를 이렇게 살아낼 수밖에 없는가? 왜 어떤 사람은 보다 더한 고통과 괴로움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가? 하는 거창한 질문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피부에 난 상처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나에겐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닌 너무나 실감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9년이 흘렀다. 그를 필두로 기무라 빈, 안영호 등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책들이 너무나 읽고 싶었다. 이들은 일본 정신의학자 들이다. 인터넷 검색으로만 알 수 있는 정보들은 거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다.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모든 검색 사이트에서 해당 이름, 개념 등을 샅샅이 살폈다. 티끌 하나라도 손쉽게 발견하고 마는, 이런 인지의 특징이 강화되어 있는 나에겐 너무나 당연한 절차였다(실제로 나는 음식에 있는 '먼지'라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 강박증으로 강화시키지 않았기에 잘 써먹는 능력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 눈이 그걸 발견한다). 남은 건 책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외국어니 당연하다. 너무나 읽고 싶지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그 느낌은 나에게 현실 부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히사오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경을 느끼기 때문에 현재의 자기 자신을 향한 부정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유익했다. 나는 그들의 책을 실제로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에 어떤 개념들이 실려 있는지를 얼추 알 수 있었다. 그런 마음에 현실이 보답이라도 한듯, 19년도에는 우연히 알게 된 일본 분께서 직접 그 책을 사서 나에게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미나 상 감사합니다). 하지만 읽어내지는 못했다. 그 분도 나에게 책을 줄 때, 이렇게 어려운 책을 어떻게 읽으시려구요 하는 걱정을 내비췄다. 이후 시간이 계속 흘렀다. 나는 마치 '때가 됐다'는 느낌처럼 자그만치 9년이라는 세월 동안 특정 때가 올 때마다 그들을 향한 구애를 발휘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절판된 책들을 하나하나 구했고, 이번에 추가로 구한 책들까지 더해 지금 총 13권을 손에 넣었다. 때마침 Chat GPT 녀석의 실력이 늘었다. 이전까지 어떠한 번역 장치도 '읽을 수준'이 아니었는데, 이제 GPT 녀석은 읽을 수준까지 발전되어 있었다. 가로막던 현실적 제약이, 별다른 수고와 노력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현실'이 난도를 한참 낮춰 준비가 됐다. 본격적인 때가 온 거 같았다.
22년도에 조금이나마 일본어를 공부한 게 확실히 번역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동안 언어 장벽 때문에 미뤘던 외서들도 번역 작업에 포함했다. 말이 번역 작업이지 일은 GPT가 다 하고, 나는 이 녀석이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밑작업을 한다(그리고 검토를 한다). 나는 그저 수반되는 돈만 내면 됐다. 내가 직접 일본에 갈 수 없으니 대행 업체에 돈을 내고, 절판된 책을 판매하는 일본 업체에게 돈을 내고, 항공료를 내고, PDF 작업에 돈을 내고. 물론 번역을 위한 교열 작업에는 순수한 노동이 필요했다. 하루에 14시간 씩 매일 작업했다. 본래 교정교열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할 만했다.
교열 작업을 하면서도 스멀스멀 무언가가 느껴졌다. 뭔가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이게 히사오 선생이 말한 '마음의 솜털'인가?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일단 기무라 빈의 [시간과 자기]를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시간에 대한 내용인데, 괜시리 울컥울컥했다. 감정이 올라왔다. 기무라 빈 선생은 조셉 가벨과 루카치의 언어에서 따온 Festum 개념을 채택해 각각의 정신병 상태에 대응되는 시간 의식-자의식을 개념화 했는데, 인간학적으로 말하면 지금 내 상태는 이제야 비로소 축제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에서 이들과 관련된 관심과 호기심이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일단 한국어로의 검색은 단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겐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노출시켜둔다. 내가 지금 읽으려고 준비한 책은 다음과 같다.
1. 『時間と自己』 - 木村敏
2. 『自己・あいだ・時間 - 現象学的精神病理学』 - 木村敏
3. 『人と人との間 精神病理学的日本論』 - 木村敏
4. 『分裂病の現象学』 - 木村敏
5. 『直接性の病理』 - 木村敏
6. 『分裂病と他者』 - 木村敏
7. 『躁うつ病の精神病理4』 - 木村敏
8. Deviation Into Sense - O.S.Wauchope
9. 精神の幾何学 - 安永浩
10. ファントム空間論 - 安永浩
11. ファントム空間論の発展 - 安永浩
12.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 安永浩
13. 徴候・記憶・外傷 - 中井 久夫
14. 自明性の喪失 - W.ブランケンブルク
이외 사용자 환상이나 쓰레기 이론, 비의식과 관련된 케서린 헤일즈, 나이절 스리프트, ANT 이론 쪽 마이크 마이클, 미드의 현재의 철학, 제임스 깁슨의 Affordance, 귄터 안더스 등을 준비했다.
현실의 당연한 조건이라면, 내가 직접 이러한 책들을 읽을 수 있게 언어 능력을 길러 읽어야 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항상 이런 갈등이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갖춰야 할 언어 학습 시간' VS '이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책을 읽는 시간'. 나는 9년 동안 늘 후자를 골랐다. 그리고 발달된 인공지능 덕분에 전자의 시간을 최대한 아낄 수 있게 됐다. 늘 해왔던 것처럼, 부지런히 읽고 쓰기만 하면 되는 때가 된 것이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책은 일단 내가 당장 읽고 싶은 책을 먼저 구했고, 정보 부족으로 1권만 준비했다. 일본 책들은 한두 권 빼고는 모두 번역 작업을 마쳤다. 대충 훑어 보면서 어떤 순서로 읽을까 내심 고민이었는데, 일단 기무라 빈 선생 책을 가볍게 3권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워쵸프와 안영호 선생을, 마지막으로 히사오 선생을 보는 커리큘럼을 짰다. 근데 또 히사오 선생 글을 먼저 볼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세 명은 동시대 사람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면서도 보태는 관계이기 때문에 순서가 의미 있을까 싶다.
9년 전부터 내가 '정신병리에 관심이 있다'고 말해왔지만, 실지로 읽고 싶었던 책들은 위에 나열한 책들이다. 그 전까지 읽었던 프로이트, 라캉, 융, 도이 다케오, 제임스 매스터슨, 기시다 슈 등등 번역된 관련 책들은 코스 요리로 따지면 에피타이저에서 메인 전까지랄까. 바꿔 말해 왜 나는 이토록 끈질기게 이쪽 텍스트를 읽으려고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한 번도 제대로 정리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주제를 잡는다면 그나마 [창조와 광기]라고 정할 수 있겠다. 나라는 인간이 최초로 '문학'을 만난 건 헤르만 헤세의 책이었고, 그 내용은 분명 '고통'에 대한 것이었다. 창조에도 여러 수단이 있지만, 일단 문학 한정해서 말하자면, 보다 탁월한 문학이란 인간의 고통을 얼마나 아름답게-생생하게, 소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인가에 대해 나는 몹시 회의적이었다. 무엇이 보다 뛰어난 예술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나에겐 너무나 편협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보다 올바르게 느껴졌던 질문은, 왜 어떤 사람은 아프게 사는가?라는 것이었고, 아픈 사람이 하필이면 표현 수단을 활용하는 기예가 탁월했던 게 예술가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 와전되어 예술을 하려면 아픈 사람이어야 한다, 퇴폐적이어야 한다 따위로 가져가는 것도 현실에선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는 건 생각보다 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일종의 퍼포먼스는 잠시 배제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꾀병을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정신에는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망쳐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인간 정신이 가진 탁월한 능력이다. 아픈 것 같아가 실제로 아프고 마는 건 더 이상 꾀병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고통이든, 그것은 반드시 '현실'이다. 나에게는 그런 현실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예술'과 어떤 관계인지를 스스로의 감각으로 파악하기 위한 여정이 나의 예술 기반 중 하나였다. 돌아와 말해 [창조와 광기]라는 주제는 단순히 아픈 사람이어야 예술을 더욱 탁월하게 한다느니 따위가 아닌, 왜 어떤 사람은 아플 수밖에 없으며 그런 사람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일종의 창구가 예술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 '아프다'는 것은 실로 특정 상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세계와의 불화뿐 아니라 환경 적응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충돌, 갈등, 어긋남 등등을 포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러한 아픔을 매우 수월하게 처리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해 더욱 괴로워지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도 한다. 실정이 이럴진데,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알아본다는 것은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알아본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나아가선 '현실'이라는 이름 자체가 담고 있는 사람 정신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와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즉, 내가 정신병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지금까지도 붙들고 있는 이유는 이렇다. 그것은 내가 시를 쓰는 '나'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상의 '나', 이런 나 들을 둘러싼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 필수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필수란, 정신에의 탐구를 위해선 그것을 수행할 수단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정신'에의 탐구인지가 전제되어 있다. 멀쩡히 제 몫을 다하는 인간의 철학 책도 탁월하고 유의미할 수 있지만, 정신 노동을 떼어놓고 봤을 때 성인으로서 1인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의 정신 산물 또한 탁월하고 유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말하건데, 어떤 태도로 보고 대할 것인지에 따른 것이지 그들 자체에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나에겐 정신병리 현장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람(용어로는 환자)'들이 훌륭한 선생님들인 셈이다.
국내 정신의학자나 한국어로 집필된 책들에서는 이러한 방향성을 갖는 책을 아직 찾지 못했다. 아마 찾으려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우연으로 도착한 책을 먼저 보고자 하는 게 나의 의미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 내가 가져가고 싶은 건 창조다. 사람들의 아픔이 새롭고 낯선 창작 재료가 된다는, 그런 정상인의 기만적인 우월감은 일찍이 내다 버린 지 오래다. 물론 그걸 재료로 써먹는 작가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기무라 빈 선생과 히사오 선생의 용어를 빌리면, 나는 분열 친화적인 안테 페스툼적 인간이다.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에게서 공감과 이해를 느낄 수 있는, 친화적인 사람인 셈이다. 실로 나같은 유형의 인간은 기무라 빈 선생이 말하듯 '아마 병에 걸리지 않은 친화자들이 몇 배는 더 많을 것'이다. 만약 문학이 '공감'이라는 충동을 밥으로 삼는다면, 화폐로 삼는다면,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살아남는 콘텐츠들은 결국 당대 인간들에게서 '투사'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에 걸맞지 않아, 혹은 먼저 태어나 버린 작품들이 어떤 시대의 정신에게서 '의미'로 재생산되는 현상은 내 눈에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깥에서 확인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내 정신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 이 태도는 '왜 분열 친화자임에도 불구하고 분열병에 걸리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가능한 대답 중 하나일 것이다. 현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이 태도. 실패하더라도, 부정당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기무라 빈 선생의 용어대로라면)자기의 자기성. 좀 더 살펴볼 일이지만 나의 모토인 '같지만 다른 현실'이 분명 나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나의 시 또한 같지만 다른 현실의 세계 위에 구축되고, 이 태도를 현실화-구체화-언어화 하기 위한 여정이 바로 내 삶 전반인 것이다.
여러 책을 읽으며 은연 중에 느끼지만, 이 코드는 동시대에 흐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시대에 어긋난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소외된 사람도 아니다. 이러한 기반들을 재확인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온갖 저자들이 나의 방에 놓여 있다. '나의 방'이라는 공간에 그들 책이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기의 자기성'을 알아 볼 수 있다.
그토록 접하고 싶었던 기무라 빈 선생의 페스툼 개념 구도를 읽고 있다. 그 개념이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알게 됐다. 지도가 밝혀지는 기분이다. 지금 나는 축제에 와 있다. 정신의 축제. 몸이 가볍다. 이 가벼운 몸으로 나는 '일'을 한다. 왜인지, 홀가분한 기분이다. 나는 축제에서 만끽하는 사람이 아니다. 축제에서 일을 해야 마땅한 사람이다. 이 일이 즐겁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안타깝게도 '다양성'이 적용되지 않을 만큼 너무나 깊은 나의 고유성이다. 지금의 나로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불가능하게만 느껴진다. 타인의 정신을 알아볼 수 있는 인지 다양성이 나날이 확장되고는 있어도, 이 여정 속에서 절대 변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성 또한 재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축제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기무라 빈 선생이 자주 발췌하는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트라-페스툼적 인간이고, 그러한 인간이 작품을 썼을 때 그런 내용이 다뤄지는 것처럼, 나 같은 안테-페스툼적 인간이 무언가를 생산했을 때 어떤 모습인지는 미리 선취되는 게 있으면서도 여전히 미지다. 이 축제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기쁘다. 어긋났던 시간 의식이 점점 들어맞기 시작한다. 이 자아감을, 어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문학적 표현으로도 나는 불만족스러울 것 같다. 이 고유함은 키냐르가 말하듯, 자신의 비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