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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Oct 21. 2024

비례 세계-메타 세계와 나

작업 노트 23


24.10.21



0.

이 글은 (자주 그래왔듯) 스케치다.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를 한 뒤 윤곽을 어느 정도 잡고서 디테일을 첨가하기 전, 거칠게나마 언어로 붙들어 놓으려는 시도다. 어쩌면 완성을 못할 수도 있다. 히사오 선생은 [징후•기억•외상]에서 '세계에 있어서의 색인과 징후'라는 에세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도해를 남겼다. 아래의 도해는 히사오 선생 책에 실려 있는 걸 그대로 옮겨 그리며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이다.


[徴候・記憶・外傷], 中井久夫, みすず書房, 2004, 28p. 안영호 팬텀 이론의 개인적 해석에 따른 도해


 위의 도해를 알아보기 위해선 해당 도해에 배치된 개념들의 출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무라 빈 선생의 Festum 개념(Ante, Post, Intra), 안영호 선생의 팬텀공간론이 그것이다. 현재의 내가 스케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직 안영호 선생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영호 선생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O.S.Wauchope의 [Deviation into Sense]를 정독해야 한다. 시간이 좀 걸릴 일이다.



1.

잠깐, 여기까지 당도한 나의 여정을 키워드로 그리면 이렇다. (15년) 나카이 히사오의 [분열병과 인류]속 분열친화적 미분회로 인지(+적분회로 인지) -> (16~18년) 아즈마 히로키, 사사키 아타루, (아사다 아키라, 가라타니 고진), 도이 다케오, 기시다 슈, 마츠모토 타쿠야, 치바 마사야 -> (19~23년) 검색으로 볼 수 있는 몇몇 소논문(기무라 빈, 안영호, 나카이 히사오), 번역되어 있는 몇몇 일본 정신의학자들, 융. 이 과정 속에서 기무라 빈 선생의 Festum 개념들을 곳곳에서(그렇다고 많진 않다. 그나마 아감벤 책?) 발견할 수 있었고, 히사오 선생의 베버-페히너형 감각에 따른 미분회로-적분회로 인지를 갖고 연구하는 젊은 일본 학자들의 논문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안영호 선생의 팬텀공간론 만큼은 참 접근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뭐랄까, 문자 그대로 해당 내용은 팬텀 공간에 놓여 있다는 듯 쉽사리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고로 씨라고 하는 한 일본 분께서 블로그에 관련 내용을 잠시 다뤄주신 적이 있었기에 그걸 보며 위안을 삼았을 뿐이었다. 이번에 '세계에 있어서의 색인과 징후'를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은, 히사오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 '나는 야스나가(안영호)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의 이론은 아직 나에게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를 통해 히사오 선생이 자신의 '납득'을 어디에 연결시키려 했는지를 보다 확신을 갖고서 알게 됐다. 


 현재 나에게는 안영호 선생의 책 4권, 워쵸프의 유일한 저서 1권이 있다. 이것들을 꼼꼼히 읽고 다시 저 도해로 돌아오면 좀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썬 모두 '가정의 세계', 히사오 선생의 용어대로라면 '메타 세계1-2'에 머물러 있는 단상들이 있다. 그것들을 일단 다뤄보고자 한 게 바로 이 글의 목적이다.



2.

먼저 비례 세계란, 다른 일본 분의 블로그를 보면서도 얼핏 감각하고 있었고, 또 히사오 선생의 글을 보니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상 세계'다. 일상에 대한 여러 도시-사회학적 탐구를 통해 소위 '일상성'이라고 부른 것과 무슨 접점이 나타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좀 더 다채롭게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는 직관으로만 갖고 있다. 일단 '도시의 일상성'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꽤 기호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이에 대한 기여(내가 느끼기로 한국이 받아들인 영향(?))는 세르토나 르페브르, 벤야민과 몇몇 학자들, 예술 비평(큐레이팅-퍼포먼스-참여-인터렉티브 등의 키워드로 형성된 현대적 조류) 등등이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해 왔다. 특히 '대중'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도시의 일상'이란 매우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반복되는 '정서 박탈의 시공간'으로 작용되고 있다는 시선이, 내가 알기론 처음 대도시가 형성된 시기(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딱 집을 순 없지만 나의 독서로는 일단 18세기 유럽부터)부터 줄곧 문제시되었던 현상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이자 대답, 때로는 '회복 작용-면역 작용'이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일상 속에서 감각과 정서를 되살릴 수 있을지, 의미와 가치를 되살릴 수 있을지, '나'를 되살릴 수 있을지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안다. 물론, 지금 한국에서도 그러고 있음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변부로 이런 독서의 기억들을 소환시켜 연결짓는 이유는, 어쨌든 나의 목표가 '세상을 알아보기', '나 자신을 알아보기' '이 둘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21세기 현대 사회라 불리는 바로 지금 이 모습들, 우리들, 사람의 정신들, 비인간들, 행위 유발자들, 다른 종들, 생명-무생명이라 분류된(혹은 분류되지 않은) 대상들, 인공성과 자연성을 포착하게 만드는 존재들, '나' 들에 대한 '인식'이 목표라는 말과 같다. 당연히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잘 해내는 사람을 찾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저런 책들을 하나하나 보며 어릴 때 내가 줄곧 몰아적 세계로 빠질 수 있었던(기무라 선생의 용어대로라면 Intra-Festum적 세계) '퍼즐 맞추기'처럼 삶을 살았던 것이다. 위에 올린 안영호 선생의 팬텀 이론에 대한 히사오 선생의 도해도 마찬가지다. 나의 눈에는 히사오 선생이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보완하지 않았는지가 얼핏얼핏 보인다. 


 그 전에 먼저 비례 세계=일상 세계라 부르는 이 인식을 어떻게 '같지만 다른 의미'로 가져갈 수 있는지를, 히사오 선생의 말에 귀기울여 보자. 


그렇다면 징후에 의해 미래 예측이 난무하고, 또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과 연결된 '하위 세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떠오르니, 이는 거의 악몽과 다름없다.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것은 비례 회로적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호론이 적용되는 것은 이 비례 회로적 인지 시스템의 세계, 즉 '비례 세계'뿐이라는 말은 과장이겠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아닐까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게 바로 '일상 세계'란 말이지. '미분 세계'도, '적분 세계'도 '비례 세계'와 관련된 한에서 정당한 존재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비례 세계와의 소통이 나빠지면 악몽이 되어버리는 거야. '미분 세계'의 악몽화는 징후가 난무하는 것이므로 더 상상하기 쉬울 테지만, '적분 세계'도 꽤나 악몽화할 수 있어. 가끔 책의 책등을 보면 내용이 전부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모두가 등을 돌리게 되는 수밖에 없어. 책등은 원래 책장을 볼 때마다 서브리미널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책을 팔아버리면 훨씬 기억하기 어려워진다. '쌓아두기'에도 나름의 효과가 있는 것은 책 표지의 제목이나 두께, 장정이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제 '미분 세계', '적분 세계'라는 말을 썼지만, 실제로는 '비례 세계—베버-페히너 세계'를 '세계'라고 부른다면, 이들은 '메타 세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세계를 색인으로 삼으면 열리는 것은 '적분적 메타 세계'다. 프루스트의 세계는 '적분적 메타 세계'의 개시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례 세계'적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 책은 하나의 '메타 세계'의 색인 자체이며, 쓰여진 글은 그저 색인일 뿐이다. 물론, '비례 세계'와 '미분적 메타 세계'를 내부에 포함한 세계이지만—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있더라도 악몽이 되었을 것이다—내부의 그것들은 고작해야 '서브 세계'에 불과하며, 일반적으로 '세계'라는 이름에 걸맞은 통일성과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번거로워서 일단 페이지 출처는 남기지 않겠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위의 히사오 선생 말 중에 밑줄을 긋자면,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것은 비례 회로적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들은 메타 세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세계라는 이름에 걸맞은 통일성과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등이다. 단순히 보면 비례 세계->일상 세계->메타 세계와 같이 해당 단어들이 이름을 달리 하며 혼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베버-페히너형 감각 세계가 무얼 가리키는지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히사오 선생이 해당 법칙에서 이끌어낸 포인트는 '외부 강도가 10배 되어야 우리는 2배 정도 감각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어떤 '감수 세계'에 대한 것이다. 


 '감수 세계', 이것은 내가 히사오 선생의 '비례 세계'를 대신해 부르고 싶은 말이다. 오늘날 개인들은 '감수성'에 매우 예민해진 채 살고 있다. 아마 이것의 이성적 층위에서 낙수 효과처럼 내려온 건 분명 '정동 이론'의 유행일 것이다. 마수미를 필두로 국내에 활발히 번역되고 또 다뤄진 '정동Affect'은 다소 까다롭고 어려워 보이는 철학적 개념 밑에 바로 이 '감수성'을 다루겠단 시선이 일관성있게 흐른다. 이것을 어떤 '현상' 혹은 '유행'으로 보는 건 보고자 하는 이성 사용자의 자유일 것이다. 나의 경우엔 레크비츠가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다소 나이브하게 '정서'로만 다뤘던 그 지평, 문화화된 개인들이 의미나 가치를 향한 몸부림을 무엇으로 수행하는가에 대해 '가치 설정-가치 박탈 간 투쟁'으로 지시했던 바로 그 상태를 가능케 하는 '감수성'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나의 독서 여정에서도 꽤 군데군데 스며들기 쉬운 관점이어서 수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령 순간주의를 포착하는 여러 사회학자들의 시선에서도, 사람들은 왜 즉각적인 보상, 피드백, 선정성, 키치함, 이미지 등에 사로잡히고 매료되는가?에 대해 나는 반드시 이 '감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다룰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시간'을 둘러싸고는 더욱 그렇다. 어쨌든 15년도에 처음 히사오 선생의 개념을 만나면서 동시에 만난 기무라 선생의 Festum 개념들 덕분에 나는 독자적으로 '시간 의식'을 향한 인식 확장을 위해 독학을 시도하게 되었다. 후설, 하이데거, 루이스 멈퍼드, 조너선 크레리, 폴 비릴리오,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등은 나에게 '시간 의식'을 다루는 정신이 어떤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지 유용한 조각들을 제공해주었다. 곁다리로 몇몇 사회학자들이 다루는 '시간' 책들, 나는 이걸 '시간 시리즈'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본다, 에서 그것을 푸코적으로 접근하든, 데리다적으로 접근하든, 들뢰즈적으로 접근하든, 어떤 이데올로기에 맞선 캠페인적으로 접근하든 내 눈에는 그 안에서 무엇을 의식하고 반응하는지의 모델을 제공해주었다. 따라서, 내가 얻은 건 이것이다. 히사오 선생의 비례 세계-감수 세계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선, 안타까운 결정으로 느껴지지만, '(양적)의식'을 왜소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읽으려고 준비 중인 [The User Illusion]이 아마 유용한 조각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나의 직관이 포함되어 있다(역시 나의 Ante...). 국내에서는 다소 유행하지 못한 듯해, 해당 저자의 책이 대중서로 한 권 번역 출간되어 있지만 일본에서는 꽤나 유행한 모양인지 그 흔적을 찾는 게 꽤나 쉬운 편이고(심지어 바키 만화에서도 나오더라 ㅋㅋ), 개인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비의식non-consciousness의 관련 책들에서도 심심찮게 다뤄지고 있다. 일단 이 글은 스케치이므로, 간략히 말하자면, 감수 세계-비례 세계-베버 페히너적 세계라 부를 수 있는 히사오 선생의 '미분회로-적분회로적 세계'란,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을 어떤 양태-태도로 '감수'하는지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선 '강화된 의식'으로는 그 문법-코드가 알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소비지상주의'라 부를 수 있는 현대인들의 소비 인식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 바우만의 [소비하는 삶 소비되는 삶]이 번역 출간되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다시 돌아가 말하면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건 비례 회로적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보는 기초가, 그러니까 '어째서 인간은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바로 그것이 어째서 가능한가 물었을 때 쉽게 말할 수 없는 바로 그 기초-공리가 안영호 선생에겐 워쵸프의 '패턴 이론'이고, 독일 정신의학자 볼프강 블랑켄부르크가 말한 '자명성'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을 알아보는 게 왜 중요한가? 했을 때, 조금 억지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나의 문제 의식은 이렇다. 21세기에서 살아가는 '나'는, 바로 이것이 위협되고 있다는 데에 막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으며, 이것을 수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나의 삶은 바로 이것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한 것들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오고, 또 이끌리고, 그것을 (마치 퍼즐 맞추기처럼)제대로 '맞춰내기(연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집하고 또 발견한다. 왜 시를 쓰는가? 왜 그렇게 시를 쓰고 싶어 하는가? 라는 질문을 살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데, 나는 마땅히 이렇다 할 대답을 해본 적이 없다. 나 스스로도 생각하기에 그냥 너무 막연하게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정신의학자들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에 대한 대답이 가능해진다. 바로 그것은, '살아있는 시간(민코프스키)'을 위해서다.


 20대의 나는 이것을 낭만성-진정성 코드로 먼저 감수했고, 또 부지런히 확장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대한 빙산을 만나고 말았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중심주의'다. 이것을 마주한 이상, 나는 바로 지금 바깥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말로만 '인간중심주의'를 운운하며 기만과 위선을 부리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어떠한 학자도 나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지 못했다. 특히 비인간을 둘러싼 사회학적 저술들은, 인류학적 저술들은 나에게 너무나 큰 실망을 느끼게 했다. 아마 17년도였을까, [숲은 생각한다]를 봤을 때의 그 충격은 지금도 남아 있다. 어떻게 이렇게 기만을 부릴 수 있을까, 싶은. 다른 대상, 이종에 대한 감수가 어찌 이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을까 싶은. 어쨌든 과도해진 이런 '가치 박탈'을 해소하기 위해선 결국 또 다른 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 속에서 만난 '융'은 꽤나 든든하고도 쓸모 있는 지팡이였지만, 나의 지향성은 늘 '현실'이기에 마치 의수처럼 장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냈느냐, 해소시켰느냐에 대해선 너무나 많은 언어가 요구된다. 굳이 여기에다 그 과정을 세세하게 담아내지는 않겠으나,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예감'이 강렬하다는 것이다.


 돌아가 히사오 선생의 '비례 세계'는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세계다. 이것이 '감수'로 포착하는 방금 나의 이야기를 비유 삼아 '나'-'세계'라는 바로 이 연결고리에 '감수 세계'가 포착될 때가, 바로 히사오 선생이 가리키는 '비례 세계'로 보인다. 그리고 '일상 세계'란 히사오 선생이 말한 '메타 세계'와 비례 세계가 중첩되어 있는 세계, 기무라 선생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공통 감각common sense'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세계다. 그렇기에 좀 더 촘촘하게 보면, 비례 세계는 일상 세계와 고리를 맺고 있으며, 일상 세계는 다시 메타 세계와 고리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환 구조인 '피드백'이기에, 내가 느끼기로 히사오 선생이 앞서 저렇게 말했다고 해석된다.



3.

메타 세계란 무엇인가. 이것을 나는 16년도에 기시다 슈를 통해 '의사擬似 세계'로 먼저 접했다. 아마 히사오 선생은 안영호 선생의 '팬텀공간'에 무척이나 강렬한 매혹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바, 이 공간의 '팽창'이 자신을 이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히사오 선생이 그 모델에서 무엇을 확인했는지가 바로 '메타 세계'란 단어로 표출되었다 할 수 있다.


 그 세계는 우리가 마찬가지 일상 세계와 메타 세계를 되먹임 구조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구분지을 수는 없는 세계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을 통해 '적분회로적 메타 세계'를 열어젖히는 장면을 기술할 수 있었던 것, 이런 문학의 '언어'를 통해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예시로 들 수 있을 뿐이다. 확실히 문학은 이전부터 '광기'라는 이름 하에 어떤 모종의 암합을 맺고 있다는 수상한 징후를 계속해서 풍겨왔는데, 그것은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건 아닌 듯하다. 때로는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평 용어를 만들어 지시하고 다루기는 하지만, (아마 이것이 독학자의 특권일 것이다) 정신 이해를 위한 독서를 하다 보면 그런 '현상'들이 어째서 가능한가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마크 피셔의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대체로 기무라 선생이 말한 Ante-Festum, 히사오 선생이 말한 '미분회로 인지'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위의 도해에 빗댄다면) 메타 나1에게서 나타나기 쉬운 감각들이다. 문학이란, 이러한 감각들을 얼마나 '살아있는 시간'으로 다룰 수 있느냐의 기예라고 말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Intra적 세계를, 많은 사람이 살면서 자주 접하지만 그것을 생생한 언어로 붙들 수 있는 건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나'의 특권이다. 돌려 말해, '창조'란 메타 세계와 얼마나 가깝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냐'에 대한 기예라 할 수 있다.


 즉 메타 세계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감각(감수 세계)의 출처이자 반영이다. 나의 문제 의식은, '도시'라는 바로 이 사회에서 어떤 메타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지에 있었다. 히사오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이 징후적 세계를 따라가기 위한 여정을 도시에서 펼쳐 보인 다나카 준의 [도시의 시학]은 그런 배경 하에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로부터 강력한 결속이 있어 '맛이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 메타 세계를 펼쳐보이고 싶은 나의 욕심은, 이 세계가 바로 우리의 일상 그 자체이고 또 꽤 많은 학자들이 결론으로 내거는 '스스로의 혁명'을 가능케 하는 지평이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가 좀 더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내보이고 싶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이 메타 세계를 그러면 어떻게 내보일 수 있는가, 에 대해선 정말이지 난도가 너무 높다고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22년이었나 21년이었나. 정말 벼랑 끝 안간힘으로 다시금 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시도로 산책을 할 때가 생각난다. 아, 그때의 감정이란. 그곳은 확실히 '나'가 없는 세계, 그렇기에 '나'로서 무리하게 들어가려 하면 반드시 '나'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세계, 베케트적으로 말하면 '끝장'이다. 곁다리로 말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바로 이 마지노선을 넘을 수 없는, 그러나 그 마지노선까지 내맡겨진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메타 세계를 내보일 수 있을까. 도시의 메타 세계를. 인공물을 통해서? 사람들의 정서를 통해서? 불가피하지만 결국 '생생함'을 포기한 채 '이성 언어'로서? 그 무엇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명백히 Ante-Festum적 인간이다. 미분회로적 인간이다. 분명 나는 그 '조각'을, 아주 핵심적인 '조각'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그 느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에 도달했던 것이다. 기무라 선생, 안영호 선생, 히사오 선생. 당신들이 나에게 어떤 희망을 보여줄 거라는 바로 그 미지에의 동경으로.


 다행히, 나는 무언가 조금씩 발견하고 있다. 나에게 부족했던 것, 내가 그렇게나 간절히 찾고 싶었던 '조각'은 엄밀히 말해 '미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선상이었을까, 바로 그러한 수수께끼, 비밀을 풀고자 삶을 살아간 '숨소리'. 나는 바로 그런 '생생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서 '살아 있는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메타 세계다. 이것은 융적인 '정신'으로도 무엇하나 이상하지 않다. 지금 여기에 당도하기 위해 소위 어떠한 사회적 효용도 매겨지지 않는 '일상'을 보낸 대가와 보상을, 이제야 하나둘 받아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징후'다. 다만 모드는 확실히 변했다. 사냥꾼의 태도다. 히사오 선생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 징후적 태도는 사냥꾼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 이 장면은 몇 년 전 꿈에서 봤던 바로 그 데자뷔). 히사오 선생이 도해한 내용에서 부족해 보였던 건 바로 메타 나1-메타 나2인데, 이 영역은 일찍이 독일 미학자 빌헬름 보링거가 '추상 충동-공감 충동'으로 포착했던 바로 그 지평으로 보완할 수 있다. 이것이 감수 세계와 어떤 '어긋남'을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메타 세계'는 닫히고 만다.



4.

앞서 올려 놓은 번역된 도해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글을 완성해 보고는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진다. 이미 스케치의 범위를 상회하고 말았다. 워쵸프와 안영호를 읽고 나면 언제 시간을 내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고 싶다. 나의 언어로 재생산하고 싶은 욕구가 자극된다. 히사오 선생은 후각에 매우 예민한, Ante적 세계에 좀 더 강화되어 있는, 패턴으로는 f에 좀 더 가닿아 있는 분이었던 거 같다. 그의 정신은 내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징후에 예민한 사람들이 내게 늘 '살아 있는 숨 소리'를 들려주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그동안 접했던 수많은 책들의 여정, 그 궤적은 대체로 '옳았기' 때문에 이런 정신들을 환대할 준비가 된 거 같다. 히사오 선생도 인용하는 긴즈부르크의 '징후적 지식'도 21년도에 접해놨기 때문에 다소 수월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21세기, 디지털. 기계 장치. 어째서 기술 철학, 기계 기술 등등이 정신병리와 만날 수 있는가? 나의 방대하고도 무모한 여정이 이제서야 매우 작고 하찮은 '접점'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모래 시계의 허리처럼, 위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자극들을 나는 어떻게 '한 점'으로 내보내야 할지 혼란스러운 삶을 살았다. 허리를 꽉 조이기 위해, 무수한 노드들을 하나의 허브로 만들기 위해, 9년이 걸렸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Ante적 사람이다. 이건 '지금'이 아니라 조금 더 앞에 있는 도래다. 그래서 위태롭고, 또 나는 이제 배운 걸 써먹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기무라 선생이 [시간과 자기]에서 다룬, 시간 의식-자의식 간 태도는 히사오 선생의 도해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직선적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 기무라 선생이 시간을 어떻게 염두에 뒀을까 유추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어렴풋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역시 그는 시간을 '재귀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나는 이에 적극 동의한다) 예전에 읽었던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물리학자의 책은 꽤 중요한 조각이었다. 기무라 선생도 말하지만, 우리에게 '시간 의식'이 왜 중요한가?는 곧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는 워쵸프의 패턴과도 매우 찰떡같이 적용된다. 즉, 21세기에 사는 가치박탈자인 나에게는 '인간중심주의'를 둘러싼 온갖 감정을 이제야 다룰 수 있게 됐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비례 세계-메타 세계로서의 나는 오늘날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정체성과 진정성에 휘둘리는 '나'들, 소비와 '관심'으로 인해 휘둘리는 '나'들, 도시에서의 '기업가적 자아' 역할로 인해 혼란을 겪는 '나'들, 인류세에 사로잡힌 '나'들, 과도한 이성 강화로 팽팽해진 흥분된 '나'들, 이것들을 이완시키고자 온갖 영성 산업의 수요를 자아내는 '나'들. 이런 문제 의식들을 다루기 위해 '같지만 다른 언어'가 요청되는 건 내게 있어 너무나 시급하고도 당연한 '자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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