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25
24.10.31
오늘은 워쵸프의 [Deviation into Sense] 1장을 복습하고, 안영호 선생의 책 [정신과 의사의 사고방식]과 그의 팬텀 공간론을 다루는 논문 [자아 장애 설명: 야스나가의 "팬텀 공간론"을 통한 정신분열증 이해]를 읽고 정리하려는 마음으로 글을 작성한다. 다음 읽어야 할 책은 안영호 선생의 [정신의 기하학], [팬텀 공간론], [팬텀 공간론의 발전]이다. 섣불리 읽기에는 왜인지 부담이 느껴지므로, 그 전에 조금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숙제를 하기 전에 최대한 미루고 싶은 투정이랄까. 오늘 설명으로 다뤄볼 예정이지만(결국 미루겠지만), 대상 B=F로 나타난 숙제가 아님에도 이런 유보심이 일렁이는 건 참 엉뚱하기도 하다.
해당 내용이 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워쵸프의 패턴 이론과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론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언어로서의 역할은 충분할 것이다. 본래 나라는 인간의 성향도 그래왔지만, 이런 '추상'적인 내용들이 우리네 일상에, 삶에 도대체 왜 필요한가 하는 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할 암묵지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내용들은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며, 워쵸프가 자주 써먹는 비유처럼 시체에 다름 없을 것이다. 돌려 말하면, 해당 내용들이 '언어'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야 할 '의도'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의도는 분명하고도 확실하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자신으로서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문제 상황-현실들이 그 전제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노파심으로 먼저 덧붙여두지만 절대 유아론-독아론 따위는 아니다, 현대 이데올로기로는 '개인주의'도 아니다). 다만 작금의 현실을 의식하며 덧붙이자면,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삶인지에 대한 이미지나 표상, 관념을 갖질 못한다거나 마치 학생에게 교사가 해야 할 일을 부여하는 것처럼 요구되어서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의 넘어섬, 월담이 자기 자신을 압도하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무너진다. 나는 일찍이 아비의 죽음을 곁에서 보며 '왜 인간의 정신은 망가지는가?'라는 물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빚을 져서', '무언가에 실패해서', '좌절과 절망에 깊이 빠져서'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꽤 많은 정신의학자들이 말하듯 오늘날의 양대 정신병을 우울증-조현병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내가 존경하는 정신의학자들의 말마따나 우리네 정신의 어떤 '극'에 달했을 때의 모습들이라는 데 나 또한 동의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의 면모로부터 어떠한 '이해'도 하질 못하면, 결국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배우는' 따위의 오래된 격언의 지혜 또한 배우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의 유행과 더불어 오늘날 개인들은 자신의 정신을 설명하고자 하는 유혹을 쉽게 느끼곤 한다. '나는 왜 이럴까?'부터 시작해 '나는 무얼 하고 싶을까?'라는 온갖 '나' 중심의 물음들은 아마 영원 회귀의 구조를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맴돌 것이다. 내가 워쵸프를 통해서 배웠던 건 무엇보다 '언제가 이해의 순간이고 무엇이 설명인가'하는 의식의 조절이 크다. 이것은 확실히 기예라 불러야 할 정도로 끊임없이 조절해야 하는 지혜라는 이름의 정신 기술이다. 나 또한 이걸 여전히 다루는 과정에 있으며,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나마 신뢰할 수 있는 '자세'였던 것이 이제는 평생을 신뢰할 수 있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자세라는 것에 의혹이 사라졌다.
이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통로는 찾고자 한다면 세상에 두루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의도이자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되기'의 순간일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에게는 고유한 정신 패턴이 있다. 사람은 늘 자신의 패턴에 맞게 세상을 보고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 또한 알아보고 바꿀 수 있다. 바깥 현실, 21세기 사회가 '개인' 혹은 '나'를 어떤 태도로 포착하고 다루는지는 엄밀히 말해 2차적인 것, 파생된 것이다. 워쵸프의 유일한 공리는 내 생애 속에서도 '삶의 유일한 공리'와 같다. 워쵸프는 이를 겸손하게 요청한다.
다른 사람에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하나의 공리는 이것이다-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 즉 그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비논리적으로 이것을 인정한 후에는 논리가 우리를 이끌 것이다.
(The one postulate we must ask the other person to allow is this-htat he is alive, i.e. that he is a slef; and after he has non-logically granted this, logic will carry us on.)
-[Deviation into Sense], O.S.Wauchope, Faber&Faber, 1949, 26p
(번역은 미숙해서 양해를 구한다.)
1. 패턴 A/B
거두절미하고 워쵸프가 [Deviation into Sense]에서 해당 패턴을 도식화한 유일한 도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워쵸프는 이 도식을 두고 A는 에너지의 분출, B는 에너지가 소비되는 대상이라고 가리키며 오른쪽의 거대한 B로부터 왼쪽의 거대한 A까지 고통이 감소하다 쾌락이 증가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안영호 선생은 이를 좀 더 보완해 '패턴 도식'을 그리는데, 그 전에 먼저 워쵸프의 도식을 좀 더 살펴보고 넘어가는 게 좋다.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방지하고자 먼저 부연을 좀 하자면, 워쵸프는 3장 심리학에서 해당 도식을 '패턴 도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위의 도식은 '사건 구성'이라는 부제목 하에 소개되며, 생명체란 모름지기 살아있는 행동과 죽음 회피 행동으로 현실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활용하는 도식이다. 다만, 단순해 보이는 저 도식 하나로 우리가 어떤 행동들을 좀 더 구분하며 알아볼 수 있는지는 꽤 설득력 있다.
먼저 A를 보면, 왼쪽 끝에서는 가로 선을 초과한 상태로 우뚝 홀로 서 있고, 옆으로 아주 작은 B와 함께, A는 줄어들면서 B는 점점 커지며 A=B의 상태에 '중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오른쪽 끝으로 갈수록 A와 B는 같이 커지다가 끝에 다다랐을 때 A는 없고 초과된 B가 있다. 이렇게 A와 B의 한 쌍이 곧 '사건(AB)'이다. A가 없는 절대적 B는 죽음이며, 반대로 B가 없는 절대적 A는 '극락'이라고 불러야 할지... (복상사의 끝이 죽음이라면 결국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무방할진데..ㅋㅋ..) 여튼 각 A, B를 '극'으로 둔다.
도식을 가만 보면 워쵸프의 공리가 적용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A란 앞서 말했듯 에너지의 분출이며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의 에너지'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집중, 의식, 신경, 행동, 감각, 반응 등으로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소모되는 대상인 B로 향할 때 그에 상응하는 A가 같이 '강도 조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갖고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도로와 인도 사이에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같이 놓여 있다. 우리는 안전 수칙의 일환으로 (이미 유년 때부터 꾸준히 학습을 했으므로)신호를 보며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사건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한다. 빨간 불일 때는 멈추고 파란 불일 때는 건넌다. 이 단순한 질서가 만약 어긋났을 때 벌어질 사건을 우리는 예상하고, 또 그러한 예상들을 모두(행인, 운전자, 도시 속 비둘기, 각종 행위자 등)가 하고 있어야만 이 '약속'이 성사된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안전이다. 만약 이 약속이 어긋나거나 지켜지지 않을 때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건을 만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나타난 차량 충돌, 야생 동물과의 충돌, 보행자와의 충돌, 인공물과의 충돌 등 이런 충돌이 '현실'이 됐을 때 우리 인간은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만약 소모되어야 하는 대상B가 우리가 소모할 수 있는 에너지A를 초과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반대로 B가 매우 낮음에도 우리는 거기에 동일하지 않은, 초과된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놀이, 재미, 즐거움'이라 부른다. 워쵸프는 '취미로 테이블을 만드는 것'을 예시로 든다. 현대 사회에서는 B가 낮춰진 A(작은)B의 사건이 수도없이 많다. 게임(유저는 현실에서 충족하기 힘든 욕구-필요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다만 공짜는 아니라 간단한 노동 혹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영상(그것은 내가 직접 겪지 않으나 마치 직접 겪는 것처럼 추체험을 가능케 한다, 만약 그 내용이 '죽음'으로 향한다 하더라도 나는 안전하다), 소비(이 물건을 내가 직접 얻기 위한 노동과 수고가 '분업화-대량화'의 구조로 적정 가격만 지불하면 얻을 수 있다) 등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현대 사회가 왜 '안전을 보장하는 세계'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지능'이라고 부르는 이성 능력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도 알아볼 수 있다. 워쵸프는 '지능이란 죽음을 잘 피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민감성'인 것으로 말한다. 아마 데리다도 그렇지만 몇몇 철학자들이 이성=차이화라고 포착한 건 같은 맥락일 것이다.
돌아가 말해 '죽음 회피 행동'이란, 현실에서 우리로 하여금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대상으로 '나타나고', 거기에 맞춰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이다. 이 행동에 우리는 불필요한 자신의 에너지를 과투자하지 않으려 하므로 최대한 절약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이 균형은 잘 안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복되면 우리는 그것의 균형을 결국 찾아내며, (자신의 정신 패턴에 맞게)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쓸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탐구하는 맥락에서 보면 '대도시'란 바로 이런 죽음 피하기 현장의 엄청난 방대화다. 그렇다면 산업화 시절부터,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도 나타난 '도시 속 개인의 소외감' 따위의 어떤 죽음의 냄새가 풍겨왔던 걸 '이해 가능한' 것으로 알아볼 수 있다. 기형도의 시 속에서도 나타나지만, 어째서 도시는 사람을 쓸쓸하고도(톱밥처럼) 쉽게 꺼지는 담뱃불같이 휘발되는 모습으로 표현했는지를 봤을 때 도시는 애초부터 '죽음을 피하기 위한' 행동들만을 하도록 사람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즉, 지능화된 현실이다. 이것은 인지적 합리화라 부를 수 있는 '양적 인식'에 특화되어 있으며, 숫자를 세듯 모든 것을 세고 포착하고 붙들며 예상과 예측, 계산과 측량에 적합한 인식이다. 이것의 과도함은, 그러니까 이런 '지능'의 화신이 되고 말아버린 인공물들의 세계에선 당연히 그 외의 것들, A가 낮은 B와 결합된 즐거움, 재미, 놀이의 사건을 허용하지 않는다(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안전을 초과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이런 문제를 사회 현상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 끌고 올 때는 '논리-설명'의 영역이라 다듬어질 필요는 있지만, 이런 기본 전제를 왜곡시켜선 안 된다. 우리 도시인은 왜 자주 스크린에 빠져 중독되는가? 게임에 빠지고 영상에 빠지고 순간적인 자극-알람에 휘둘리고 노출되어 있는가? 이것은 A와 B의 관계만 보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당사자에게 있어 A와 B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느냐다. 만약 한 사람이 무엇이 죽음을 회피하는 행동이고 무엇이 살아있는 행동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당연히 적절한 균형을 찾을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는 행동은 최소한으로 조절하면서(죽음->건강->의식주->노동->돈)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한 뒤 행동하고자 에너지를 쓰게 될 것이다. 또 예상을 하며 무엇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지, 혹은 그러한 일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도 학습해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다(양치질, 술이나 담배 줄이기, 운동하기, 보험, 적금 따위의). 하지만 내가 느끼기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간과되고 있는 건 바로 이 B의 증식이다. 우리는 자주 순진무구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의 '즐거움'을 추억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즐거웠던, 몰입했던 순간을 그리워하곤 한다. 그런데 점차 성인이 되며 여러 현실-B를 알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맞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점차 A의 만끽을 잊어간다. '살아있는 행동'을 잊게 된다. 무엇보다, 이성-의식은 강화되고 또 발달되어야 하는 게 오늘날 사회의 미덕이므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인간 모습을 '열등하다'는 의미로 가치 박탈하는 게 21세기 사회(일단 한국을 말하지만)다.
나는 살면서 대가리가 발기된=의식 강화에 온 힘을 다 쓰는 인간을 자주 만난 적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시절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무엇인지 잘 안다. 단적으로 말해 '불안'이란 바로 '이성-의식'의 그늘이다. 죽음을 회피하는 행동이란 언제든지 죽음을 의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것을 의식해야만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 징후는 여전하다. 불안과 징후가 얼마나 같은 지평 위에 피는 꽃인지를 안다면, 이것에의 '이해'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히사오 선생이 말한 것처럼, 또 안영호 선생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분열 기질'을 가진 사람들, 미분회로 인지에 특화된 사람들, 분열 친화적 인지인 사람들의 정신 패턴은 바로 이 '죽음 회피 행동'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성 발달, 의식 강화'에 자신의 에너지를 더 소모하기 쉬우며, 민감성이 더욱 발달되기에 쉽다. 나도 이쪽 인간이다. 안타깝게도, 좀 강하다.
다만 이런 개인적인 정신 패턴에 한해서만 나타나는 게 아닌, 이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을 가능케 하는지, 유발시키는지, 결국 개인-개인(부모와 자식, 친구, 연인, 익명 대 익명 등)끼리 무엇을 요구하고 하게 만들 것인지를 보면 도시란 결국 '안전'이 강화된 문명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익명성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안전 위에 구축된 것이다.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 때 '익명'은 불가능하다. 도시의 '익명'이란, '편안한 고독'이란 바로 이 안전 위의 익명으로 구축된 일시적인 정체성(오제)이다. 우리가 이것을 특정 정서로, 감정으로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기보다 현실에 맞춰진 A의 적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서,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A의 살아 있는 행동을 해나갈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걸 어떻게 스스로의 미덕으로 현실에 부정되거나 무너지지 않게 이끌어갈 수 있을까?
패턴이란, 통일성 속의 차이이자 차이 속의 통일성을 '이해comprehension의 순간'으로 느끼는 것이다. 대입해 설명하면, AB들의 다채로운 사건-현실들은 그때그때 우리의 '자세'를 요구하는데, 때로는 죽음 회피 행동을, 때로는 살아있는 행동(이에 대한 도시의 예시는 사실 찾으면 많다, 연애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영상, 음악, 무언가를 즐기는 모든 행위들이 이에 속한다)을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하나'로서 이해한다면 이것을 패턴으로 보는 것이고, 이것이 곧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걸 의미한다고, 지금의 나는 이해한다.
여기에는 여러 멈춤이 있을 것이다. 죽음 회피 행동으로 알아볼 수 있는 행동들, 출근하기, 일하기 등 노동 전반이 그렇고 일상에 있어서 수반되는 여러 반복 행위들 등의 특징은 '억지로 하는' '지루함' 등의 자신의 반응으로 구분 가능하다. 당신이 만약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먼저 느낀다면 그건 죽음 회피 행동으로 대응할 공산이 크다. 특히 근래에 노동 현장에서 나타나는 창조성-생산성은 이런 A의 증대를 임금과 결부시켜서 노동자로 하여금 인지부조화를 느끼게 만드는데, 골짜기 깊은 느낌처럼 해소할 수 없는 질문으로 떠오르는 건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라는 문법이다. '내 회사도 아닌데' '내가 대표도 아닌데' '성과가 내 것도 아닌데' 등등으로 스스로 생각하며 에너지 소모를 조율하려는 균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개인'으로서 옳다. 또 앞서 말했듯 '단독성들의 사회'라는 기조 덕분에(때문에) '차라리 내 걸 하자'는 식으로 각자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방향성도, 어쨌든 '개인'으로서 옳다. 자본주의의 구조 때문에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둥, 모두가 '나'를 자처하면 그들의 소비자인 '비-나'는 누구냐는 둥 여러 비판들은 모두 2차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행동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죽음 회피 행동으로 왜곡하거나 덮어버려선 안 된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죽음 회피 행동의 일환인 생각들, 비판들, 고민들 또한 분간해야 한다. 이것들은 바로 '차이'다. 이것들이 왜 나타났는가? 하는 방향을, 워쵸프의 패턴은 바로 A로부터다. 이것 자체가 '전체'가 되지 않게 균형잡는 것이 바로 죽음 회피 행동의 한계이자 정체다. 그것의 여분이 바로 '불안'이기도 하다. 불안은, 과도한 B에 부족한 A로부터 상대적으로 나타난 여분에 행동으로 채울 수 없는 자신의 에너지다. 이것을 동력 삼는 것, 이것을 인식하는 것과 살아있는 건 별개이며, 무엇보다 이것을 '전체'로 생각해서는 결국 자신의 에너지 소모A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융의 정신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융은 남자에게 '로고스' 여자에게 '에로스'라는 어떤 일반적인 성향의 힘이 있다는 뉘앙스의 얘기를 하며,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이 둘이 순환되어야 균형인데 남자들은 로고스가 너무 과해지기 쉽고 여자들은 에로스가 너무 과해지기 쉬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워쵸프의 도식으로 빗대면, 로고스는 죽음 회피 행동이고 에로스는 살아있는 행동이다. 균형이란 결국 부족한 것에 더 힘을 쓰는 것으로, A가 부족하면 A를, B가 부족하면 B를 발달시키는 걸 융은 '자기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당대라고 말해도 무방할까 싶지만 워쵸프의 책 마지막 우화도 살아있는 행동의 화신 요정은 여자로, 죽음 회피 행동의 화신 요정은 남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작업은 매우 역동적이고도 개인적인 것으로 이런 이야기를 일반화시킨다고 모두가 적용되는 건 아니기에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워쵸프의 패턴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더욱 공리를 명심하는 게 필요하다. 워쵸프가 패턴을 설명할 때 이 부분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약 당신이 어디선가 이해understand 가능한 걸 봤다고 했을 때 그것에 자기 자신을 대입하려고 하는 건 기본적으로 옳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전체로서의 차이'가 이뤄지지 않으면 패턴이 아니다. 워쵸프는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일단 간단하게 알아보기 위해 이런 순서(근데 역시 맞는 느낌은 아니지만...)를 추출한다. 인식->이해understand->이해comprehension. 워쵸프는 '이해'라는 단어를 구분지어서 쓰는데, 패턴의 '이해의 순간'을 말할때만 comprehension을 쓴다. 그 외에 이해, 예를 들어 우리가 전체를 볼 때 그것이 '전체다'라는 이해, 혹은 부분을 보고 '부분이다'라는 이해를 할 때의 이해는 understand를 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표현한다는 공리를 기본으로 삼고 세상에 있는 여러 '이해 가능한' 언어들, 삶의 체험들, 행동-경험들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는 게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이다. 이것은 고유함의 본연의 의미이자, 자본화된 진정성과 낭만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의 흔적이다. 다만 패턴을 알아본다는 건, 패턴이란,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 수반될 수밖에 없기에 진정성-낭만성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패턴의 쉬운 예시를 찾는 게 나로서는 왜인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살면서 수도없이 겪었고, 또 체화시켜서 비의식으로 깔아둔 뒤 폴라니 말마따나 암묵지로 넣어버려서인가, 기억이 잘 안 난다.
안영호 선생의 예시 하나를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안영호 선생은 어릴 때 강박증이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앉을 때 팔꿈치를 책상 위에 대고 양 손을 위로 드는 동작으로 있었더니 교사가 '야스나가야 왜 그런 자세로 있니?'라고 물어왔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외과의가 수술 집도를 하기 전 모습과 같았다고. 안영호 선생 스스로 말하지만 이것은 '위생 강박'의 일환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해괴망측한 그림들, 해부나 끔찍한 그림들을 어린 시절에 봤던 것이 아마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더러움'으로 자리잡아 생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고, 어쨌든 그런 강박증을 갖고 살다가 중학생 때인가 어느 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 창 밖의 하늘을 보며 따스한 햇살과 은은한 바람, 구름 등을 보며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느낌과 함께 강박증은 사라졌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이해의 순간'이자 '패턴'이다. S=강박증, 내용으로는 더러움과 끔찍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행동으로 볼 수 있고, P=오후의 하늘, 내용으로는 잔잔하고도 따스한, 긴장이 풀리고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각 S와 P는 우리가 별개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S를 뭘로 채우든 상관없고 P를 뭘로 채우든 상관없다. 그러나 'S는 P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이 바로 패턴이며, 이것이 통일성 속의 차이, 차이 속의 통일성이다. 이것은 완전히 이질적인 서로의 S, P가 사실은 '하나'라는 느낌으로 '이해'되는 순간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을 '시적인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감동'으로 말하기도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워쵸프는 S를 정신, P를 물질로 예시를 들기도 하고, 생/사, 질/양, 자/타, 주관/객관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행동과 죽음 회피 행동도 마찬가지이며, 지금 이렇게 설명하면서 나에게 떠오른 순간은 조금 빛바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역시 통영에서의 추억이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철학 모임을 하고 있었고, 한 친구가 통영에 (살지 않는) 가족의 집이 있었기에 여름 합숙으로 우리는 통영에 갔다. 13년도 7월이었다. 21세기 서울에서 누가 철학 합숙을 가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는 가서 쇼펜하우어의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읽었고, 통영 앞바다의 한 카페에서 나와 친구 둘, 이렇게 셋이 앉아 어떤 문구를 두고서 나는 이것이 이해가 도저히 되질 않는다며 친구들에게 의문을 마구 쏘아댔다. 마침 노을이 질 때였고, 친구들의 얼굴을 비추던 빛이 점점 갈색으로 변해갔다. 침잠하는 분위기, 마치 내면으로 빛이 스며드는 그 순간, 나는 '인식론과 존재론'을 다루는 '언어'와 '정신'이 별개라는 걸 '이해'했다.
이런 정신적 일 말고도 '이해의 순간'은 다채롭고도 다양하다. 기르던 다육이의 꽃을 보며 잠겼던 시간, 새벽 4시에 뒷산 절에서 울리는 종 소리를 들었던 순간,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느꼈던 순간 등.
워쵸프는 패턴에 대한 설명에 힘을 쓰고, 한 개인이 '이해의 순간'을 느낄 수 있게 그것의 '설명'들을 열심히 다뤄줬다. 그의 말마따나 '철학'이란 결국 '설명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해의 순간은 각자의 몫으로, 그것의 "만끽하는 '살아있음'"은 모두의 고유함이고, 이것의 "서로 '다르다'"는 건 '차이'이자, 우리 모두가 그러한 순간을 누릴 수 있음이 '통일성-전체'다. 이 순환을, 느낄 수 있는 개인들이 모여 사회이자 일상이 되면 적어도 한쪽으로 치우쳐 과도해진 순간으로 인해 어떤 개인들이 죽음에 가까운 괴로움을 느끼는 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앞으로 다루고 정리할 내용은 충분히 많기에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안영호 선생은 앞선 도식을 보완해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패턴 이론'을 '팬텀 공간론'으로 보충한다.
앞선 워쵸프의 도식에서 절대적 A라 부른, 초과된 A는 위의 도식에서 e다. 이는 순수 자아고, 데카르트가 끈질기게 붙들고자 했으나 결국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의식에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 자아다. E는 자아 도식이라는 이름으로 보통 설명되는데, 내가 느끼기론 '자의식'이란 말이 제일 나은 거 같다. F는 대상 도식,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에서 관찰하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다. f는 칸트가 말한 '물 자체'로, 어쨌든 e-f는 우리의 의식 저 편에 있는 '극'이다. 우리는 E-F로 삶을 살아가며, 이 안에서 여러 강도와 행동, 그러니까 앞서 말한 워쵸프의 도식이 포개진다.
안영호 선생은 이것을 '체험 선-공간'으로 확장하며 강도와 '역전'이라는 방향 등을 보완해 '조현병'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는데, 내가 그의 '팬텀 공간론'에 강한 이끌림-징후를 느끼는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차차 정리하며 언어로 다듬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