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26
24.11.07
안영호(야스나가 히로시)의 [팬텀 공간론]을 읽는 중이다. [정신의 기하학]을 읽다가 3부에서 막혀(이해가 도저히 되질 않아), 1960년에 발표한 논문이 수록된 [팬텀 공간론]의 서론을 읽었다. 안영호 선생.. 대단하다. 일전에 책을 읽을 수 없어 하염없이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일본 분 '고로'씨의 블로그에서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론'을 다루는 연재 글을 본 적이 있다. 고로 씨는 워쵸프를 '환상의 포켓몬'이라고 재밌게 비유했는데, 지금 다시 봐도 웃긴 표현이다. 여하간 고로 씨는 안영호 선생의 이론을 '이해'하며 글을 연재하다 아쉽게도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개인적인 연락을 통해 알게 된 건 개인적 이유로 그만 두었지만, 언젠가 다시 하게 된다면 소식을 드리겠다, 였다.
정리와 반성을 하지 않으면 결코 진도를 나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회상을 한다. 고로 씨의 블로그를 통해 얼핏 엿볼 수 있었던 팬텀 공간론을, 안영호 선생의 글을 따라가니 좀 더 분명히 이해되고는 있지만 아직 내 것은 아니라는 기분이다. 히사오 선생도 이에 대해 미진함을 내보이기도 했고, 꽤 많은 일본 학자들이 '안영호의 팬텀 공간론'이 세상에 두루 알려져야 한다는 의지를 내보이곤 한다. 다만 현실은 어떤가. 고로 씨는 일본 분이고, 일본의 분위기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내비추신 것이겠지만... 오늘날 '정신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확실히 '병리적 이해'보다는 약물 치료나 상담 요법에 치우쳐져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안영호 선생에게 도달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팬텀 공간론'은 고로 씨 말마따나 '뿌리 깊은 팬'들이 자발적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보인다. 이는 꽤 좋은 상태같다. 이해되어 알려지는 경로가 아니면, 세간의 유행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본질이 흐려지고 막무가내로 다뤄지는 유통 경로로 노출되는 것보다는. 물론 그것도 나름의 '친숙함'이기에 마냥 비판할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히사오 선생의 글을 보며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안영호 선생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히사오 선생이 타계하기 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 'いじめのある世界に生きる君たちへ'(번역하면 따돌림이 있는 세계에 사는 그대에게, 정도..)을 읽고 울컥했다. 번역은 원문의 뉘앙스나 세세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어휘의 의미망까지 빗겨갈 수는 없으므로 나의 눈은 그것을 꿰뚫어 작은 흔적이라도 감각하며 소위 '문체'를 느끼곤 하는데, 히사오 선생의 글은 장엄한 폭포 아래 흐르는 개울가, 그 옆에 핀 들꽃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내가 만난 여러 일본 저자들 중 히사오 선생을 언급하면서 그의 '위대함'을 존경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고백을 자주 마주치다 보니, 또 히사오 선생의 글을 읽다 보니 그가 얼마나 '산' 같은 사람인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고 그 저자에게 '살아있는 존경심'을 갖는 건 참 값진 경험이다. 워쵸프도 그렇지만, 히사오 선생과 안영호 선생은 확실히 그런 존경심을 자아낸다.
여하간,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론'에는 아직 입장도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읽은 그의 책은 '정신과 의사의 사고 방식', '정신의 기하학(2부까지)', '팬텀 공간론(1장)'이다. '정신의 기하학'을 읽다가 3부가 비로소 해당 이론의 본론인데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중도 하차하고 이해를 따라갈 목적으로 안영호 선생이 연도 순서로 발표한 경로로 같이 따라가기로 우회했다. '정신의 기하학' 1부는 워쵸프의 [Deviation into Sense] 해제, 2부는 언어에 대한 (패턴)고찰이다. 2부를 보면 안영호 선생이 얼마나 탁월한 정신인지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본론보다는 살짝 가볍게 다뤄진 내용이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팬텀 공간론의 발전' 뒤에 수록되어 있다.
안영호 선생의 워쵸프 해설을 보면 그 맛이 또 좋다. 내가 처음 워쵸프를 읽을 때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과 정확히 동일하게 안영호 선생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것은 원문으로 other than each other인데, 일본 역자이신 후카세 선생의 번역을 따라 읽었던 안영호 선생은 해당 내용이 다뤄지는 부분에서 번역어 '부분'에 그 감각이 이해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국어로 '부분'은 일본어의 '부분'과 다소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 부분이 'other than each other'에서 걸렸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한국어'란 언어는 확실히 워쵸프의 '패턴'에 충실한 언어다. 이로써 나는 시를 쓸 때 마주했던 여러 언어 한계에 대한 감각을 다소 다룰 수 있게 됐다. 세종'대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만났다면 분명 존경심이 샘솟는 사람이었을 거 같다.
안영호 선생은 '조현병'의 여러 증상 속에서 (잠시 역행한 용어를 쓰자면) 분열병을 분열병으로 만드는 그러한 본질적 구조를, '패턴이 역전된 것'으로 포착했다. 이는 대단한 눈썰미가 아닐 수 없는데, 어지러운 복잡도에서 총체로 나타나는 현상(인간의 모습) 속에서 그 구조를 포착하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그런 정신은 그에 상응하는 복잡도가 유지되어야 하며, 또 그런 유지 속에서 자신의 이해와 발견이 전체->부분->전체로 통합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학자들은 이를 부분적으로만 성취해도 탁월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의 '부분'이 이러한 정신 작업에 수반될 여러 노고를 손쉽게(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에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이런 세상의 네트워크 속에서 안영호 선생의 이론은 무척 강력하며, 실제로 정신병리의 현장에 있지 않은 일개 시민의 눈으로도 이것은 '선구적인 이론'으로 느껴진다.
이런 배경을 늘어놓는 이유는, 내가 왜 '팬텀 공간론'을 이해하기 위해 삶을 쓰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일찍이 히사오 선생의 '분열친화적 미분회로 인지'를 통해 이쪽 세계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기저에는 A의 질적 의미가 낚싯바늘에 걸리듯 걸렸기 때문이다. 즉, '나'로서 어떤 '공감'을 느꼈기 때문에, 정상적인 패턴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출발된 여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해는 곧 '왜 나는 조현병 환자들의 '말'에서 모종의 '생생함'을 느끼는가?'로 나아가고,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론'은 바로 그 도구로 발견한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나의 정신은 여러 고초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안영호 선생의 모든 글을 읽으면, 이에 대해 충분히 '설명 가능한' 이해에 도달할 것이라는 직관이 강하게 느껴진다.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론은 오늘날 사회에서 소위 '정신 보건-건강'을 위한 교과서(라는 게 있다면)에 수록될 만큼 교훈적이고도 실용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만나게 되는 자신의 '이상 상태', 현실 속에서 느끼는 자기 의식, 여러 다채로운 순간 순간 속 의식 감각들을 어쩌면 다룰 수 있겠단 희망을 느끼게 된다. 안영호 선생은 자신의 이론이 '정신병리의 현장'에서만 다뤄지는 것보다 여러 분야, '다른' 현실에서도 충분히 활용될 여지가 있음을 기대하며 기꺼이 배려심 있는 글로 집필했다. 나는 이것이 문학에서 충분히 꽃 피울 수 있다는 예감을 갖고 있다.
'조현병 환자들의 언어'는 내게 왜 '생생함'을 자아낼까? 그것은 일반적으로, 안영호 선생도 말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언어인데 말이다. 나의 정신은 왜 그 안에서 어떤 '실감'을 느낄까? 내가 분열친화적 인지라서? 아니면...
아리에티에 의해 소개된 조현병 환자들의 '사고 장애' 일환 중 유명한 예시가 있다. 폰 도마루스의 원칙으로도 알려진 거 같은데, 유명한 삼단 논법이 바로 그것이다. X는 Z다. Y는 Z다. 따라서 X는 Y다. 이것은 논리학 기초를 교양으로 배울 때 만나볼 수 있는 형식 논리 유형 중 하나다. 실례를 보면,
1. 태양은 하나다.
나는 외동이다.
따라서 나는 태양이다.
2. 잡초는 죽는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따라서 나는 잡초다.
3. 쌍둥이는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수녀는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수녀는 쌍둥이다.
등등이다. 1번과 2번은 조현병 환자의 이야기고, 3번은 아리에티가 '유아적 논리'라고 소개한 내용이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은 1-2/3번의 차이를 섬세하게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 조현병 환자가 '내 옆 침대에 누워 있는 X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가 X씨가 된 것 같고, X씨가 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라거나, 누군가 깔개를 두드리는 걸 보고 '왜 나를 두드리는가?'라거나, '개가 한쪽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는 분명 하늘의 계시임에 틀림없다...'라는 말을 하면 아마 일반인들은 무슨 의미의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마지막 개와 하늘의 계시는 너무 재밌는 말이다. 나는 보자마자 미소를 머금었다)
현재 내가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론'에 제대로 입장하지 못하고 있음은 곧 '나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과 결을 같이 한다. 나에게는 앞선 조현병 환자들의 말들이 모두 '실감'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거짓일까? 아니면 싸게 말해 오바일까. 예전에 베이트슨의 이중 구속을 정리하며 당시의 나는 이런 이해를 꺼냈던 적이 있다. 2번의 경우에서, 만약 '나'가 절대절명의 순간에 처해 있다면, '잡초'와 자신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회피할 수 있다고. 이런 식의 '이해'로 논리적 오류인 '말'을 '이해했다=생생하다'고 말하는 건 안영호 선생도 말하듯 과도함 중 하나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상적인 패턴'의 발현일 뿐, 실제로 조현병 정신의 역전된 패턴이 아닌 것이다. 정상적인 패턴은 A로부터의 출발, 자기 자신의 체험에 기반한 '이해'로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은 결코 부정되지 않고 긍정을 전제로 출발된다. 따라서 나의 이해도, 그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그것의 역전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실감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패턴으로 보면 A로부터 너무 멀어진 B면의 '설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패턴으로서도 충분히 나타나야 한다. 나는 안영호 선생의 글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읽고 있다. 만약 이러한 '역전된 패턴'이 가정될 수 있다면, 그 '역전 구도'는 단순히 A와 B의 위치만 바뀌는 것으로, '형식적인' 양상으로 이해될 리 만무하다. 안영호 선생은 분명 '올바른' 패턴 사용자다. 그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만약 '질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양적인 것'이 정상이라 했을 때, 그것의 역전으로 인해 나타나는 정신 양상이라면 그 체험은 무엇일까... 안영호 선생은 단연코 '조현병 환자의 체험을 우리는 절대 할 수 없다... 다만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안영호 선생의 정신을 존중하면서, 또 그의 말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면서 분명 나의 실감이 어디서 나타나는지를 타진할 수 있다고 느낀다. 또 우리의 사회가 몇몇 일본 정신의학자들의 말마따나 '분열친화적 사회'로 나타난 것이라면, 표현이 조금 과할지라도 '분열증적 시대'로 포착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것의 오류나 오해 또한 어떤 패턴 위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나의 시 세계는 이미 가 있지만, 나는 이것이 범람하고 만 B적 대상들의 세계가 우리의 패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그 힌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정상적인 패턴의 발현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수동성과 역전된 패턴의 발현으로 나타나는 수동성이 교차되는 바로 그 '지점'이 분명 있고, 그러한 지점은 쉽게 말해 조현병 정신과 정상인 정신 둘 다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무언가 '공통 감각'이 야기될 수 있다는 직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느끼기로 인공물-비인간의 세계는 엄격히 역전된 패턴의 세계다. 사르트르도 이를 '무'로서 잘 포착했지만, 또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여러 학자들의 이런 '역전된 패턴 세계'를 향한 언어 구축의 경향도 분명 '징후'로 나타나는 거시적 세계 흐름일 것이다. '인간이 자기 시대를 닮는다'는 건 분명 이런 패턴의 또 다른 표현이다. 융이 포착한 싱크로니시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이는 보다 '큰' A와 B의 관계이기에 우리네 유한한 의식으로는 '양적으로-논리적으로' 그나마 건드려 보는 게 한계일 것이다. 다만 원칙을 위배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이해 불가능으로 내던져지지는 않는다. 복잡계 이론과 패턴 이론이 만날 수 있는 건 분명 가능한 가설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상인'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것으로, 결정론적인 것으로 가정한다면 모든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자기 생성 조직의 지향성이 바로 이러한 '패턴화'에 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역동이 현실과 만나 (아직은 설명할 수 없는) 가소성에 의해 '역전'으로 진행되어 '조현병'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유전적으로 그러한 '결함'을 갖고 있다는 식의 '낙인'이 생물적 결정론이라면, '인간학적 이해'는 어떤 정신의 패턴이 이러한 사회-환경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역동을 자아내는가에 대한 데에 있다. 중요한 건 결정되었다가 아니라 그러한 구조의 다양성을 알아보는 일이며, 그런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의 체험-너머-이해로 나아갈 수 있느냐다. 또한 이로 인해 피드백으로, 현실 사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조절도 체험 기반으로 가능해진다. 올바른 인식-이해란 곧 행동화로 나아갈 수 있고, 이것이 가정되는 '정상적인 패턴'이다. 앞서 가정했듯이 이러한 패턴이 역전되었다는 건 곧 이러한 역동이 가능하다는 방증이며, '완전 다른 종' 같은 것이 아닌 분명 희미하게라도 연쇄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설정할 수 있게 된다.
그 부분을 국소적으로 제한한 뒤 확대한 게 나에겐 도시 체험이다. 좀 더 고민해야 할 일이겠지만, 서툴게 말해 인공물-비인간은 A가 소실된 B<-->B'의 패턴일 것이다. 우리가 인공물을 만나는 관계에서 B'인지 B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채 괄호쳐진다. 다만 그것의 '사용'이란, 곧 우리의 정상적인 패턴 A->B를 쓰는 것이고, 결국 '동일시'를 안 할 수가 없다. 자연물에게는 어떤 A가 있기에, 우리 인간이 '객관적 상관물'로서 다루는 데 친숙한가? 하는 질문은 내게 무척 중요한 질문이었다. 우리는 분명 우연성으로 인해 대상 B로의 이입을 결정적인 것으로 느끼지도, 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양적으로 '무엇이든 가능한' 것은 아닌, 은폐된 교묘한 균형이 자리해 있다. 나는 이 균형 안을 열어볼 수 있다면, 위에 말한 '그 지점'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을 갖고 있다. 내가 조현병 환자들의 언어에서 '실감'을 느끼는 지점과 동일하다. 이것은 정상적인 패턴으로는 꽤 여러 단계를 거친, 생략된 패턴이 중첩된 복잡한 '인지'의 동시 발현이지만, 분명 무언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서 인식이 가능해지는 요인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쉽게 말해, '우연적 유발'이다.
오늘은 수육해 먹기로 해서 이만 글을 멈춘다. 차차 '팬텀 공간'으로 들어가보려 한다. 일단 패턴의 일상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조금 버거울 수 있기에 너무 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미루면 결국 정신은 상태 변환을 겪기에...) 않는 속도로, 안영호 선생의 말마따나 '팬텀 공간으로의 질주'.. 그의 거대한 산맥에 등산하려는 나의 현 위치는 한참 온 거 같은데 아직 입구도 도착하지 못한, 그런 어이없음과 설렘과 유보심의 미묘한 균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