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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Nov 20. 2024

살아 있음의 절박함

내면 작업 22


24.11.20




(앞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기르던 개 하미와 같이 애인과 만나고 있다. 애인의 집에는 애인의 여동생이 같이 있었다. 왠지 하미는 집으로 들어올 수 없어서 바깥에 있어야만 했다. 나는 하미가 계속 걱정되어 집에 잠시 머물다 다시 하미를 찾으러 가게 된다. (애인의 집에서 무슨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냈던 거 같다, 왜 방문했는지는 소실되었다) 길거리는 마치 혜화역 거리(성대 가는 방향의 번화가 거리)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회기역 인근 골목도 겹쳐져 있다). 나는 "하미!"를 연신 외치며 하미를 찾는다. 지나가는 행인, 한두 마리 개가 지나갔던 거 같다. 한참을 찾다 이윽고 거리 옆에서 하미를 발견한다. 동선은 직진을 하다 우회전 한 뒤 얼마 안 가였다. 하미는 어떤 핸드백을 목에 메고 있었다. 나는 하미를쓰다듬으며 이 가방이 도대체 뭔지 의심스러워 한다. 하미를 되찾았다는 기쁨과 더불어 왠지 이 가방은 분실된 가방이고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 가방의 내용물을 살펴볼까 하는 욕망이 순간 올라오기도 했다. 판단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이 가방을 되찾아줘야 하며, 결국 또 다시 하미와 헤어져야 한다는 걸 파악한 뒤 조금 망설였다. 왜 하미를 두고 가방 분실 신고를 해야 하는지는 정확하지 않고 그저 그래야만 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하미를 걱정하며 하미를 둔 채 가방을 되찾아주고 다시 오기로 결심한다. 시한부였다. 24시간 안에 이 가방을 되찾아줘야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나는 그 핸드백을 열어 주인이 젊은 여자라는 정보를 확인한다. 이후 애인의 집에 들린 뒤 (왜인지 모르겠으나) 애인과 애인의 여동생과 함께 어떤 역의 분실 센터에 들려 가방을 맡긴다. 경찰로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앞에 있었다. 나는 사정을 말하며 가방을 맡기고는 강아지를 두고 왔다는 사정을 간절히 말하며 당장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한다. 몹시 다급했다. 그리고는 일이 잘 처리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내달리기 시작했다. 환승역이었다. 7호선을 타고 가야 하는데 중간에 2호선? 4호선 환승역도 나왔다. 나는 무슨 파쿠르를 하듯 전철 위 철조 구조물을 뛰어다니며 내달렸다. 7호선을 타고 나오자마자 다시 내달리기 시작하며 중간에 어떤 철제 H빔으로 쌓인 틀 위로 점프를 해서 착지를 했는데 마치 탄성체처럼 움푹 빠졌다가 다시 부푸는 듯한 지점도 있었다. 중심을 잡고 계속 내달리며 (마치 어릴 적 정글짐을 빠져나오는 것처럼) 어떤 장애물들을 헤집고 나아가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 하나가 뒤따라오더니 나랑 경주를 하면 재밌겠다면서 나타났다. 나는 그 남자가 이런 파쿠르를 존나 즐기는 인간이라는 걸 파악했다. 나더러 승부를 하자고 요청했지만 나는 하미를 당장 되찾으러 가야 한다는 마음이 컸기에 그 남자에게 웃으며 지금 바쁜 일이 있다고 에둘러 거절했다. 다시 처음의 거리로 도착했다. "하미!"를 외치며 길거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의 개가 주인없이 방황하듯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다 두 마리 개가 나타났는데, 하나는 분명 하미였다. 그런데 털을 다 깎은, 이발한 하미였다. 나는 매우 기뻐하면서도 하미가 맞는지 이리저리 확인했다. 하미의 얼룩 무늬가 피부에 특징적으로 있는지, 배 쪽에 흉터가 있다는 걸 확인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왜 하미는 이발을 해 있지? 당황스러우면서도 하미의 오른쪽 눈 위에 얕은 자상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상처를 보고 이녀석 또 이발하다 지랄해서 상처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상처를 납득했다. 하미 뒤로 나타난 또 다른 개는 왠지 모르겠는데 날 향해 나타난 거 같았다. 하미를 안고 반겨주느라 제대로 보질 못했다. 내 머릿속에는 '왜 하미가 이발해 있지? 어떤 사람이 길거리 방황하는 개들을 데려다 이발시켜준 건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리고 은연 중에, '뒤따라온 개를 내가 책임져야 하나?'하는 느낌이 들다가 꿈에서 깬다.






 꿈 기록을 잘 안 하며 지내지만, 간혹 이렇게 강렬한 꿈을 꿀 때가 있다. 왠지 이번 꿈은 너무 생생해서 기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미는 내가 중학생 때 누나 친구네 개의 새끼로 데려와 평생 우리 가족과 같이 살다 18년 2월 14일에 집에서 죽었다. 나는 하미가 죽기 전 노견일 때 누나에게 계속 하미에게 스테이크라도 먹이자고 말했지만 누나는 결코 동의해주지 않았다. 곧 죽는다면 가기 전에 먹고 환장할 만한 걸 맘껏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4년도 여름이었던 8월. 느지막이 자고 있을 때 하미가 낑낑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오려고 해서 깼다. 하미는 평소에 나에게 애교를 부리기는 해도 서열이 나뉘어 있었기에, 잠결이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미 또 왜 그래 하면서 일어나 보니 집이 온통 물에 흥건해 있었다. 처음에 나는 하미가 오줌 싼 줄 알고(우리 하미는 소변을 평생 가리지 못했다, 지나가다 하미 오줌을 밟을 때의 그 빡침이란...) 순간 아 새끼... 오줌 쌌네... 하다가 보니 오줌이 아니라 부엌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당시에는 상도동에 살 때였고, 지대 자체가 경사 있는 산동네라 높은 편에 속하면서도 우리 집은 2층이었기에 순간 판단이 잘 안 갔다. 순간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지 충격을 먹고는 부엌 밖으로 나 있는 보일러 실을 열어 보니 거기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비가 존나 오는 날이었는데, 옥상의 우수관에서 물을 다 빼다 뭔가 막혀 역류한 게 우리 집으로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이미 부엌 거실 바닥은 물이 흥건했고 하미가 깨우지 않았으면 방까지 들어왔을 게 뻔했다. 물난리를 마주 한 나는 이런저런 수단으로 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는 점차 멈췄고, 몇 시간을 덜어내니 거진 다 뺄 수 있었다.


 다만 이때 무슨 이유로 인해 현관문을 잠깐 열어두고 물 빼던 도중 하미 녀석이 바깥으로 가출한 적이 있었다. 하미는 인간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할 뿐더러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면 눈치보다 순식간에 홀라당 나가 버리는 녀석이어서 순간 하미가 없어진 걸 알고는 아찔했다. 하미에게 주인이나 집에 대한 신뢰를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나가면 이 녀석은 온갖 구석들을 호기심으로 샅샅이 뒤지다 어느 순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떠돌아다닐 게 눈에 선명했다. 나는 서둘러 나가 하미를 부르며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발견하고는 안고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아마 이때의 사건이 이번 꿈에 나온 거 같다.


 아마 오른 쪽 눈 위 자상도, 예전에 하미 이발하다가 하도 발광해서 가위에 찔려 상처가 났던 적이 있는 게 나온 거 같다. 배 쪽 흉터는 실제로 없는데 노화가 진행될수록 수상한 종양이 하미 배에 묵직하게 나기 시작했던 게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미는 내게 사랑을 마음껏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학생 때는 마음껏 이뻐하고 놀아주며 지냈지만 점차 무관심해졌고, 나는 어느새 군기반장 역할이 되어 있었다. 가족 중에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나였다. 혼을 내는 역할도 주로 나였고, 보통 혼을 낼 때는 산책을 갔다 온 뒤 하미를 씻기려고 할 때 지랄발광하는 걸 최소화시킬 때였다. 엄마나 누나가 하미를 씻기려고 하면 손을 물려고 하거나 짖는 게 사나워지지만 내가 잡고 있으면 얌전했다.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 반겨주는 것도 차이가 있었다. 엄마와 누나, 아빠는 사정없이 반기고 배를 까고 오줌을 질질 싸지만 나는 그저 꼬리 좀 흔들고 쓰다듬는 거 몇 번으로 끝났다(하미는 인간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해서 잘 짖지도 않고 처음 보는 사람이 배를 만져주면 바로 오줌을 싸버렸다). 나는 집에 잘 있지도 않고 군대 갔다온 뒤로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에 하미랑 보낸 시간은 누나에 비하면 그렇게 많진 않다.


 그래도 하미를 아끼고 하는 마음에는 별 수상함이 없었기에 하미가 죽은 뒤로 간혹가다 꿈에 하미가 나왔다. 꿈에서 나오는 하미는 늘 소중한 생명체였다. 이번 꿈은 하미를 잃어버렸다 다시 되찾는 과정이 2번 있었다. 그때마다 하미를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싶은 나의 절박함은 너무 생생하고도 강렬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중에 파쿠르 하듯이 하미를 되찾으러 갈 때 나에게 승부를 걸었던 남자와의 구도가 의미심장했다. 


 그 순간은 내게 즐거움이나 순간의 재미보다 소중함이나 절박함이 더 우선이라는 어떤 시험 같았다. 보링거의 말을 빌리자면 공감 충동보다 추상 충동의 성향이 짙다는 걸 확인하는 거 같았다. 하미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은 무척 생생했다. 그러나 왜 하미가 나왔고, 여자의 핸드백을 목에 메고 있었으며, 그걸 또 나는 되찾아줘야 했고(일종의 딜레마 속에서 나는 결국 이걸 되찾아줘야 한다는 걸 선택했다), 다시 하미를 되찾았을 땐 왜 이발을 했는지, 상처와 흉터 얼룩으로 '하미'라는 정체성을 확인했는지, 뒤따라온 개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꿈 속의 나란 인간만 보면 무언가 알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르게 꿈에서 깨고 기록을 한 뒤(새벽 4시 경이었다) 뒤척거리다가 내가 사회 활동에 더 의미부여가 크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됐다. 꿈 속에서 파쿠르하듯 현실의 장애물을 장난감 갖고 놀듯 거침없이 헤집고 나아가던 나의 신체 감각도 몹시 생생했다. 이후 아침에 요리하며 시 생각을 하다 기후 위기 관련 영상을 보며 왠지 모르게 '나의 방향'이 조금 선명해졌다. 개인에 대한 이미지. 세계에 대한 이미지. 사회에 대한 이미지. 왜 어떤 사람은 공헌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이 중요한지. 즐기는 체험이 우선인 사람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체험이 우선인 사람은 어떤 미묘한 결을 그려내는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무언가 떠오르는 기분이다. '절제나 인내' 같은 정신 수양이 나에게 왜 의미있게 다가오는지, 그걸 하지 않으려 할 때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지. 내 안에 있는 강력한 A, 그것의 충동이 나라는 삶에 어떤 관계를 자아내는지. 이런저런 표상들이 둥둥 떠다니는 오전이다. 아마 나라는 인간은, 21세기 순간주의의 사회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 있음'의 반대 방향에서 균형을 잡아가는지 그 기술을 배워야만 한다는 걸... '젊음을 불태워 탑을 쌓는다'는 문구가 나에겐 섬뜩하면서도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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