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가 없다고요?
당분간 지낼 아파트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동네에 있었다.
긴 비행에 지쳤는지 어서 빨리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 왔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내며 캐리어와 박스를 이고 지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문제는 이때 생겼다.
어라? 현관문에 호수가 없네???!! 부동산에서 건네 준 서류에는 호수가 적혀있었지만 그러면 뭐하나 정작 아파트에서는 호수를 쓰지 않는걸…
나무로 되어있는 현관문들 옆 한편에는 아주 작게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름이 쓰여있었다. 하지만 이 아파트를 렌트해준 부동산 에이전트는 내가 살 곳에 내 이름을 붙여놓는다거나 적어도 전에 살던 사람들 이름을 알려준다거나 하는 센스는 없었고 내가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연락도 되지 않았다.
붕괴되고 있는 멘탈을 간신히 붙잡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 하나를 두드리자 친절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고개를 빼꼼 내미셨다.
"Bonjour madame, 갑자기 문 두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저는 오늘 이 아파트에 이사 오기로 한 사람인데 집을 못 찾고 있어요. 혹시 ‘땡땡’ 호가 어느 문인지 아시나요?”
“Bonjour, 이 아파트는 호수가 없어요. 문 옆에 쓰여 있는 이름을 보고 찾아야 한답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
그냥 오늘은 호텔에서 지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에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지금 보니 대부분의 현관문들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있었고 몇몇 집 앞에는 우산이며 신발도 놓여있었다.
역시 인생에 필요한 거는 적절한 잔머리와 센스다.
다른 집들과는 달리 휑한 현관문 앞에 가서 조심스레 열쇠를 넣어보았다. 혹시 이 집 안에서 누가 나온다면 뭐라고 설명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and voilà! 삽십여분만에 나는 드디어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