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밖에서 사람들이랑 술을 마신다던가 하는 날은 거의 없는데 집에서 참으로 성실하게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올해 들어 술을 안 마신 날이 정확히 딱 하루밖에 없을 정도로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 내내 술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막역한 사이였다. 술이 나를 부르고 내가 술을 부르는.... 밥반찬은 모두 술안주로 보였고 정신을 차려보면 그 안주에 어울리는 술이 이미 내 손에 들려있었다. 냉장고에 먹을 게 없어도 소주와 맥주는 떨어진 적이 없다.
그러다 금주를 결심한 게 8월 중순이었다. 오래간만에 직장 동료들이랑 술을 진탕 마신 다다음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주를 결심했다. 20살 때부터 20년을 함께 한, 인생의 반을 함께 한 술과의 이별을 마음먹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자신도 없으면서, 아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 금주 시작했어요"라고 브런치에 글까지 썼었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면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력한다더니, 그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술이 마시고 싶을 때마다 내가 한 말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미리 밝히자면 금주 100일째의 내 점수는 82점이다. 100일 중에 82일 술을 참았다. 18일을 술을 마셨다고 쓰고 싶지 않다. 무려 82일이나 참았으니까.
처음 술을 마신 건 금주를 시작한 지 40일째 되는 날이었다. 평일 낮에 남편이랑 둘이 이차돌에서 오랜만에 소주를 마셨는데 어찌나 맛있던지(역시 술은 낮술인가... 아니 이게 아니라) 그때의 행복감이 잊히지 않는다. '오늘은 술을 마셔야지' 하고 미리 계획을 했었고 그동안 참은 나를 위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금주를 못해서 아쉽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저녁까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낮에는 행복했지만 저녁에는 '그래 역시 술은 몸에 좋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술을 마신 날에는 자기 통제에 실패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화가 날수록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금주 기간 동안 8일 연속 술을 마신 날이 있었으니, 바로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다. 애초 계획은 '여행 중에 3일 정도 마셔볼까'였지만 여행 첫날 마신 술은 여행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다. 제주 여행 중에 금주라니, 애당초 말이 안 됐다. 흑돼지에 소주를 안 마실 수 없고, 바비큐를 하며 술을 안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우도에서는 땅콩 막걸리도 마셔야 하고, 고등어회를 먹으며 술이 빠지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제주에서 마신 술은 조금도 후회가 되지 않는다. 모든 날이 좋았다.
문제는 제주도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마셔볼까, 뭐 어때.'라는 생각이 꿈틀대더니 냉장고에 먹다 남은 술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계속 술이 있다는 건 술을 끊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내가 마시다 남은 술인데도 볼 때마다 영 찝찝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디오북을 들으며 길을 걷는데 마치 나한테 얘기하는 것 같은 한 문장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술도 끊지 못하면서 부자는 되고야 말겠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얼굴이 화끈거린 나는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있던 소주 한 병 반과 막걸리 반 통을 모두 싱크대에 버렸다. 저녁에 이 사실을 안 남편은 내 행동에 경악을 하며 "다시는 술을 사주지 않겠다"라고 엄포를 놓았고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다시 열심히 금주 중입니다, 는 아니고 그 후에도 남편이랑 주말에 맥주캔을 따기도 했다.
깔끔하게 한 번에 술을 끊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쓰고 보니 참 구질구질한 금주 기록이다. 하지만 이번에 금주를 하면서 얻은 큰 수확이 있다.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하나는 '술을 안 마신다고 죽지 않는다'이고, 또 하나는 '술을 안 마시는 날도 썩 나쁘지 않다'이다.
금주 100일이 지난 지금,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서 금주 100일을 한 번 더 하려고 한다. 20년을 함께 한 술을 끊는 게 참 쉽지 않다. 이번에도 80점 이상만 나왔으면 좋겠다. 그다음 일은 또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