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바람 Nov 10. 2020

삶의 표지가 된 지드의 문장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나는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 앙드레 지드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이 문장을 항상 떠올린다. <독서의 발견>이란 책에서 인용했던 문장인데 너무 좋아서 인스타 독서 계정에 박아놓고 있다. 책을 읽고 나면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건,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5권을 읽으면 끝까지 읽는 책이 1권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책을 읽다가 마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끝까지 읽은 귀한 책은(끝까지 나를 붙잡아 둔 책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변화를 일으킨다고 믿고 있다.


위 문장을 읽었을 때 왜인지 모르게 오스카 와일드가 떠올랐었는데 실제로 지드는 1891년 11월 파리에서 오스카 와일드를 처음 만난 이후 그가 1895년에 재판으로 몰락할 때까지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312p). 둘은 비범한 통찰과 간결하고 단호한 말투가 닮았다.


<지상의 양식>을 읽기 시작한 것도 위의 문장에 반해서, 그의 글을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대로 그의 책은 나를 멈칫하게 만드는 빛나는 문장들을 빼곡하게 품고 있었다. 집 앞 카페에서 처음 책을 펼치던 날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바쁘게 밑줄을 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상의 양식>은 어느 장르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낯선 작품이었다. 소설도, 시도, 에세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희곡의 독백 같기도 했다. 이 책은 20세기 초에 젊은이들에게 '복음서'처럼 읽히게 되지만, 그 독창성 때문에 출간 당시에는 한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한다(317p). 출간 후 11년 동안 팔린 책이 겨우 500부에 불과했다니, 지금 읽어도 그 형식이 낯선데, 당시에는 얼마나 생소했을지 짐작이 간다.


여러 메모를 이어 붙여놓은 듯한 글들은 개연성이 없어 흐름이 자주 끊겼고, 결국 5월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독하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렸다. 시간이 오래 걸린 데에는 같은 문장을 두세 번 읽은 탓도 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은 그 문장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세네 번은 다시 읽어야 했고, 너무 와 닿는 부분은 그 문장을 더 음미하고 싶어서 여러 번 읽었다.


책은 1897년에 발표된 <지상의 양식>과 1935년에 발표된 <새로운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로운 양식>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책을 한동안 손에서 놓기도 했다. <지상의 양식> 날것의 음식에 비유하자면 <새로운 양식>은 어쩐지 삭힌 홍어 같은 느낌이었다. 두 작품은 비슷한 형식을 고 있지만 전해지는 느낌은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지상의 양식>이 좀 더 흥미로웠지만, <새로운 양식>에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문장들이 많았다.   


책을 오랫동안 읽은 건 내용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음식을 먹다 체한 것처럼 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전을 읽으면 한편으론 무력감을 느낀다. 가슴을 묵직하게 쿵 치는 문장들을 곱씹으며 전율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만 같다.


내가 건진 보석 같은 문장들을 여기에 모두 쓰지는 못하지만 몇 줄이라도 나누고 싶다. 몇몇 문장들은 내 인생에 커다란 표지가 되어 줄 들이다. 안개에 가려있던 길이 좀 더 선명해졌고 그 길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굳이 같은 글에서 같은 감동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내가 느꼈던 감동을 조금이라도 같이 느낄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35p)


"잘됐군." 하고 말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할 수 없지." 하고 말하라. 거기에 행복의 커다란 약속이 있다. (46p)


많은 기쁨을 맛보아야 비로소 사색할 권리를 조금 얻을 수 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색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2p)


네 사고의 습관이 너를 방해하고 있다. 너는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고 있어서 아무것도 자연 발생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 미르틸이여,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순간들의 '현존'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인지를! (...)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89p)


풍경들의 무한한 변화는 우리가 아직도 행복의 모든 형식들을, 즉 그것들이 지닐 수 있는 명상이나 슬픔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알고 있다. 어렸을 적, 브르타뉴의 황야에서 가끔 슬픔에 잠기곤 하던 어떤 날이면 나는 갑자기 내 슬픔이 나에게서 빠져나갔음을, 그토록 슬픔은 제가 풍경 속에 포함되고 그 속에 흡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ㅡ그리하여 나는 내 눈앞에 슬픔을 감미롭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임을. (146p)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을 수 있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그날부터. (...)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의 행복을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216p)


저마다의 긍정은 자기희생 속에서 완결된다. 그대가 자신 속에서 포기하는 모든 것은 생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 희생이 없는 부활은 없다. 기꺼이 바치는 일 없이는 아무것도 꽃피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증여를 위하여 익고 기꺼이 줌으로써 완성된다. (223p)


개인은 자기를 망각할 때 비로소 자기를 긍정한다. 자기 생각에 빠진 자는 자신의 방해물이 된다. 미인이 자기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보다 더 내가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적은 없다. 가장 감동적인 선(線)은 가장 체념한 상태의 선이다. (224p)


이 땅 위에는 너무나 많은 가난과 비탄과 어려움과 끔찍한 일들이 가득해서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하여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 속에 행복해야 할 절박한 의무를 느낀다. (237p)


"너 자신을 알라." 위험한 동시에 추악한 격언이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자는 누구든 발전을 멈춘다. '자신을 잘 알려고' 애쓰는 애벌레는 절대로 나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269p)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