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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썬 May 19. 2020

나는 이제 유럽여행을 가지 않기로 했다.

열등감으로 얼룩진 서른 살 나의 스페인

2018년 4월 23일 ~ 4월 28일


우리는 그라나다를 떠나기 전 작은 자동차 한 대를 렌트했다. 이 렌트카를 타고 네르하-말라가-미하스-론다-사하라를 거쳐 세비야로 갈 계획이었다. 남자 둘은 면허가 없었고 도은이와 내가 국제 운전면허증이 있었지만 25살의 어린 도은이에게 운전을 맡기기에는 내 스스로가 불안했기에 독박 운전을 도맡았다. 나는 7년간을 자차로 출퇴근하기도 했고 운전을 즐겨하는 터라 별 부담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고마워해 주는 동생들이 기특했다.


사실 이 렌트 여행은 내가 미리 일정과 동선을 짜 놓고 렌트카 예약을 진행하면서 인터넷 카페로 동행을 구한 것이었다. 수동에 비해 월등히 비싼 오토 자동차의 렌트비를 아끼기 위해 2박 3일 동안 스페인 남부를 빠르게 치고 세비야에서 바로 반납하는 자칭 '차썬표 실속여행(?)' 코스였다.


네르하(Nerja)의 해변, 그리고 온통 하얬던 아기자기한 골목


네르하는 딱 내가 상상한 대로였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귀엽게 모여있는 언덕 마을.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게도 열광하는 '감성' 돋는 곳이었다. 전망대에서 해변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서로 1미터의 간격을 유지한 채 쭈뼛쭈뼛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녀 한쌍. 누가 봐도 SNS로 만난 동행임이 틀림없었다. 보기만 해도 내가 다 어색했던 그 둘은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다 사라졌다.


"맞아, 유럽은 이런 곳이지. 어색한 만남과 아쉬운 이별이 공존하는 곳"


뜨거웠던 말라게타 해변, 단체사진 찍는 학생들


그렇게 우리의 차는 사고 없이 말라가에 도착했고 또 와인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은 해변가에 누워 각자 낮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동행 철학'에 동생들은 잘 따라 주었다. 아니 다들 성향이 그러했다.


숙소 발코니에서 바라본 론다(Ronda) 누에보 다리


막내와는 먼저 작별을 하고 나머지 셋이서 론다로 이동했다. 론다에서 볼 것은 딱 하나, 바로 누에보 다리. 이 누에보 다리가 보이는 숙소는 인기가 굉장한지라 내가 이미 한국에서 동행을 구하기도 전에 예약해뒀었다. 그런데 누에보 다리고 나발이고 론다의 골목길은 얼마나 좁고 어지러운지, 또 이놈의 일방통행은 길을 한번 잘못 들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주차를 하는 데까지 1시간은 족히 걸렸고 하룻밤 2만원이 넘는 비싼 주차료를 지불해야 했다.


내가 스페인에서 가장 사랑하는 세비야(Sevilla)


그리고 우리 셋은 세비야로 넘어가 3일간의 휴식을 가졌다. 이쯤에서 제목으로 내세운 '내가 유럽여행을 다시 가지 않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 적어볼까 한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놈의 찌질한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그렇게 넉넉하진 않은 집이었다. 어릴 때 시골집을 나와 자수성가한 우리 아버지는 용접공이셨고, 엄마는 평범한 가정주부셨다. 남이 입던 옷을 물려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메이커 운동화나 백화점 옷이 갖고 싶다는 투정 같은 건 입 밖에도 꺼낼 수 없는 그 정도.


내 기억에 아버지는 매일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하셨고, 엄마는 한 푼이라도 더 아껴가며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되어 가셨다. 우리 집 욕실에는 항상 '알뜨랑 비누'와 초록색 '챠밍샴푸'가 있었고, 제대로 된 가족여행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요즘애들은 챠밍샴푸 모르겠지...)


세비야의 평화로운 풍경들, 그 속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는데, 바로 '돈'이었다. 성공이라기 보단 그저 돈을 많이 벌기 위함이었다.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나는 멍청하게도 그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비싼 옷이나 명품백 같은 걸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 수 있는 능력'이 갖고 싶었었다. 그리고 나는 7년 동안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돈'이 부질없음을 느끼고 어느 정도 욕심을 내려놓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릴 적 욕심들이 유럽여행에서 '열등감'으로 불쑥 튀어나온 거다.


요즘 어린 친구들에게 '유럽여행'은 더 이상 로망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스스로 돈을 벌어 서른이 되어서야 떠난 이 여행은 '그냥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내가 동행했던 동생들도 그러했고 유럽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게 인서울, 아니 SKY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은 금수저까진 아니더라도 부모님 카드를 긁어대며 '경비 아끼는 법' 따위엔 관심 없이 여행하고 있었다. (물론 힘들게 알바비를 모아 여행하는 친구들도 많다.) 구질구질한 배낭을 메고 있는 나와는 달리 택시에 캐리어를 싣는 그들의 옆구리에는 명품 가방이, 콧대에는 명품 선글라스가 있었다. 그리고 단체 투어로 온 가족들은 5성급 호텔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추억을 만들며 여행을 하고 있었다.


세비야에서 자전거를 타다 들렀던 펍에서 마신 만원짜리 샹그리아


나는 절대 "그들의 여행보다 내 배낭여행이 더 갚지다!"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만 눈에 넣으면서 찌질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는 거다.


나는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결코 그들처럼 되진 못했고 우리 부모님 또한 그들처럼 만들어 줄 수가 없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그 '마음'에 열등감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같이 국내여행을 갈 때면 "비싼데 뭐하러 호텔을 가~ 찜질방에서 자자"라고 말씀하시니까 말이다.


나는 그들과 미슐랭 레스토랑을 가고 제일 싼 와인 대신 적어도 중간은 가는 와인을 사 마셨다. 교통비가 아까워 걸어 다니곤 하는 내가 택시를 타고 다녔다. 소위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었음에도 "내 예산으로는 부담스러워"라는 내색조차 하지 못했고 그저 한심하게 혼자서 마음만 불편했다.


정말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자존감인지 자존심인지가 쎈 나는 앞으로도 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할, 아니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유럽여행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스페인 여행은 다시 한번 하고 싶지만)


지인들은 세계여행을 하는 나를 보고 '멋있다' '용감하다' '부럽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오히려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나는 그저 이렇게 열등감으로 얼룩진 삼십대 백수일뿐이라.


이 여행이 끝날 때쯤엔 내가 조금은 변해 있을까. 이 놈의 삼십춘기는 언제쯤 끝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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