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샘 Sep 30. 2022

글 나눔, 수업 나눔

함께 가는 벗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어린 시절, 꼬깃꼬깃 일기장에 글을 썼다. 초등학교 때는 숙제 때문에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기 싫어 글자 사이를 텅텅 비우다시피 하고, 문장의 맨 끝을 다음 줄로 넘긴 후 온점을 찍었다. 일기장이 차 보이게 하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그 당시 난 일기에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모범생처럼 보이고 싶었기에 내 감정을 회피했다. 좋은 모습으로 보이게끔 글을 썼다. 때로는 게으름이 일기의 진솔함을 방해했다. 솔직하고 자세히 쓰기엔 귀찮았다. 그저 사건을 나열한 후, 마지막 한 줄에 “참 재미있었다.”로 느낌을 억지스럽게 붙였다. 가끔 특별한 일이 있는 날에는 글이 조금 더 풍성해지곤 했지만, 그 사건에 충분히 머무르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다 내 일기가 좀 더 진솔해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때였다. 입시 시절보다 마음과 시간에 여유가 생겼고, 그 공백의 시간에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감성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보통 그 감정은 우울하고, 좌절스러웠다. 어쩔 땐, 가뭄에 콩 나듯이 설렘과 기대가 있기도 했다. 보통 나의 일기 패턴은 힘든 일을 잔뜩 쏟아놓고 불평을 한 후, 마지막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다 교사가 되었고, 그 당시 만난 교감선생님께서 교단 일기를 쓰라고 권유하셨다. 그러면서 『에스메이의 일기』책을 추천해주셨다. 신규 시절 나는 시행착오도 많고 소심해 잔뜩 기가 죽어 있는데, 글 속에 등장하는 에스메이 선생님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글을 보며 도전을 받기보다는 도리어 에스메이의 당찬 모습에 기가 죽었다. 하루하루 멋진 일이 가득한 에스메이의 일기와 달리, 내 일기는 자책과 슬픔으로 채워져 갔다. 그럼에도 글을 썼다. 무슨 고집이었을까? 아마 내 마음을 글은 좀 알아달라는 절규였을지도 모른다. 교사 2년 차 때, 학교폭력과 여러 사건이 있었고,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때 쓴 일기장을 읽다 보면 나의 온갖 감정의 쓰레기통을 마주하곤 한다. 변색된 종이에 번진 눈물 자국에, 일기를 읽고 있는 내 눈물이 뚝 뚝 떨어진다.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때의 눈물과 지금의 눈물은 결이 다르다. 그 당시에는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 듯한 고통과 절망의 눈물이었다면, 지금은 그 시간을 견딘 나를 향한 고마움과 연민의 눈물이다. 검정 인조가죽에 노르스름하게 변색된 종이로 이미 유물처럼 되어 버린 일기장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나의 초라했던, 슬펐던 기억들이 그 일기장에 박혀 있는데도 왜 그 쓸데없어 보이는 아픔 가득한 일기장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시간이 여전히 나이고,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소모임


 2년 동안 휴직을 했다. 아기를 기다린다는 이유였다. 코로나 19 시기와 휴직이 겹쳐, 집에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자가격리를 하며 지냈다. 무엇보다 수차례의 시험관 시술은 몸과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처음 할 땐, ‘내가 왜 이 시술을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런 생각은 사그라들고 제발 잘 되기만을 바라며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실패가 반복되면서 내 마음은 슬픔이 쌓여만 갔다. 그래서 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규 때나 지금이나 나는 글을 쓰지만, 작가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일기 기록자’ 정도의 정체성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작년 여름, 수업코칭연구소 부소장님이신 김태현 선생님께서 글쓰기 소모임을 인도해 보는 것을 제안해 주셨다. 선생님들의 관심사에 따라 ‘영상 만들기,’ ‘온라인 수업’ 등을 주제로 소모임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글쓰기 모임이었던 것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작가라고 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기에 함께하실 선생님들이 계실까 반신반의했다. 수코연 소모임 신청을 받는 엑셀 창에 ‘박선영_글쓰기 모임’을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신청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까? 내가 자격이 있을지에 대한 회의였을까? 그런데 몇몇 선생님들께서 글쓰기 모임을 신청해 주었다. 그렇게 글쓰기 소모임이 시작되었다.


  줌(zoom)으로 첫 모임을 했다. 난 선생님들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있었기에 어떻게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는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때, 한 선생님께서 글쓰기 모임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중요한 제안을 해 주셨다. 글쓰기 모임이 어떤 출판이나 보이는 성과를 향한 모임이 아니라, 각자의 글을 꾸준히 올리고 나누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참여한 선생님들께서 모두 동의하셨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각자의 글을 꾸준히 써서 글쓰기 모임에서 나누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여 글을 썼다. 때로는 목표처럼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글을 나누었다.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어 선생님들 앞에서 읽는 시간을 가졌다. 글을 읽다 보니, 글 속에 글을 쓴 선생님이 보였다. 그 삶이 보였다. 그 삶이 글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왔다. 글 속에 드러난 선생님의 아픔에 같이 울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용기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찾기도 했다.


  서로의 글을 읽고, 글을 격려하고 삶을 격려하다 보니 조금씩 서로가 성장하는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이들이 교사인지라 글 속에는 수업이 등장했고, 학생들이 등장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며 느끼는 연민, 사랑이 나타났다. 선생님의 수업을 향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을 글 속에서 느꼈다. 글을 읽으며 선생님의 색깔에 같이 물들어갔다.


  수업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글을 나누는 것이 수업을 나누는 것이고 삶을 나누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 수업도, 글도, 삶도 다 연결되어 있구나. 그런데 시간 속에서 스쳐 지나가버리는 단상을, 그때 느꼈던 감정을,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이 되살려내고 있었다. 시간과 경험을 되살릴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켰다. 놀라운 기적이었다.


  글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글 나눔을 할수록 글이 입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변하기 시작했다. 소모임의 한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교사들 간 유대감과 소통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수업을 공개하니 누구든 오시라고 초대의 글을 전체 메시지로 보내셨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께 수업을 나누셨다. 수업 나눔도 실천하셨다.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기록해 두셨는데 읽으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고, 내 마음속 용기도 한 움큼 자라고 있었다.



글 나눔, 수업 나눔


 글과 수업이 참 닮았다. 글이든, 수업이든 내 마음이 드러난다. 내 삶이 고스란히 물들어 있다. 때로는 냉철한 지성이, 어쩔 땐 일렁이는 감성이 글을 만들어내고 수업을 창조한다. 글에도, 수업에도 우리는 메시지를 담는다. 그 메시지가 내 글을 읽는 이에게,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사랑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크리스천에게는 그 메시지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 메시지를 전하며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수업을 하고 글을 쓴다.


  그런데 참으로 글을 쓰는 것도, 수업을 하는 것도 어렵다.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가운데 잠시 멈춰 글을 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설사 글을 쓰더라도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 나는 글솜씨가 없어. 글을 써서 뭐해?’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수업은 어떤가? 수업은 해도 해도 어렵다. 한 분야를 5년 동안 깊이 파면 전문가가 된다던데, 수업은 아무리 해도 어렵다. 정신없이 변해가는 시대 가운데 여러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다 보니 수업이 해마다 새롭다. 게다가 여러 바쁜 일상 가운데 매 차시 수업 준비가 쉽지 않다. 수업 준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수업을 하고 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왜 이렇게 수업은 어려운 것일까? 글쓰기가 어렵듯 수업도 참 어렵다.


  그래서 글도 나누는 것이고 수업도 나누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스스로 혼자서 서기엔 연약하기에, 고독하기에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서투른 문장을 글벗(文友)과 나누고, 내 평범한 수업, 때로는 부족한 점 투성이인 것 같은 수업도 수업 친구와 나눈다. 날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나와 공감해주며 동행해주는 글 친구, 수업 친구가 있기에 글도 쓸만하고 수업도 할 만한 것이 된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마음이 자라고, 수업이 자란다. 삶이 깊어지고 글도 풍성해진다. 결국 글도 수업도 우리의 삶일진대, 소중한 벗이 있기에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