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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이아저씨 Dec 26. 2024

(독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독서와 생각 2

다양한 서적을 읽어보는 게 올해 목표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들을 좋아했다. 중학교 즈음이었던 듯하다. 처음 메리크리스마 미스터로런스를 듣고, 충격에 빠져 Rain, Last emperor 등의 곡들을 찾아들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나서, 피아노 수업을 받게 되었다. 22년도 쯤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누구냐 물으면,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했으니 피아노 수업의 방향도 그 쪽으로 잡혔다.   


    아주 기초적인 부분도 안되어 있었지만(악보읽기 라든지..) 일단 energy flow 라는 곡을 다 쳐보는 걸로 결정했다. 한참을 배우고 연습하는 와중에 그의 부고가 들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의 곡을 30년 평생만에 드디어 칠 수 있게 되었는데,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니.  


    그후로 한번씩 늦은 밤 또는 새벽에, 회사 강당의 낡은 영창피아노로 이제는 전부 다 칠 수 있게 된 energy flow를 쳐보는데 직접적으로 아는사람이 아님에도 알 수 없는 쓸쓸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책은 진작에 나온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조금 피하고 싶었던건지, 보면 뭐하나 싶은 생각에 집어보지 않았다.   


    기회가 닿아서 읽게 됐다. 나는 그를 그의 곡으로 밖에 만난적이 없다. 글로 보는 그의 모습은 곡에서 느껴지는 그의 모습보다도 더 멋진 사람이었다. 진실된 고민이 느껴지는 사람.  


    요새는 서점을 돌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집으면 사실 껍데기만 화려한 경우가 많다. 내가 집중력이 흐려져, 텍스트를 잘 읽기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책이 알멩이가 없는 것이었다. 진실된 고민을 담은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자연히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만 남겨둔다.  


1.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라고들 합니다. 시간이라는 직선 위에 작품의 시작점 있고 종착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제게 시간은 오랫동안 중요한 테마였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던가, 플레이리스트에 시간이 흐르는 걸보고 있지만,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고 생각했지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을텐데, 절대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2. 시간은, 말하자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것이 지금의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생각 떄문이었을까.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어찌됐든 시간은 앞에서 뒤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 지나간다. 어쩔 수 없다.  


3. 잠시나마 완성되었다고 간주하면 작품이 고정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계속 움직이게 두고, 변화를 추적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데, 어느 순간 무엇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순간 완성된 시점의 것만 완성이고 나머지 시간의 것들은 모두 미완성이 되어버린다. 감가상각이 발생한다고 해야하나.. 그런 모먼트가 있다.   


4. 딱히 다른 사람들의 인지를 바꾸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을 마음도 없고, 담담하게 스스로 만들고 싶은 음악을 꾸준히 만들어가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후의 한 곡이 반드시 좋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사카모토 류이치=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런스'라는 프레임을 깨부수는 데 제 마지막 삶의 목표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남겨진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죠. 이런저런 생각의 변천을 거친 지금, 이것이 저의 거짓없는 심경입니다.   

    본인딴에는 하나의 곡으로 기억되는 게 싫어서, 한참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어떠한 모습으로 기억해주는 것, 그것이 심지어 위대하거나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것대로 복받는 것이 아닐까  


5. 저는 괴롭고 힘든 치료를 거부하고 최소한이 케어만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가치관을 조금 더 허용하는 세상이 되어도 괜찬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위스나 네덜란드의 합법적 안락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안락사 논의는 이제 얼마안가 우리나라에도 상륙할 것 같다. 점점 노년 부양비와 인구는 늘어날텐데, 이를 전적으로 부담하기에는 이 나라가 버텨내지 못할테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잔인해서, 경제적으로 이득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누구보다 전향적으로 안락사를 추진할 수 있다 생각한다.   


6. 언어란 것은 실제로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까지 틀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안개'라는 말을 들으면 안개라는 존재가 보이기 시작하고, '하늘'이란 말을 들어면 마치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구획된 영역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꽃을 그리는 것만 봐도 그렇죠. 아마 많은 아이가 꽃잎과 암술, 수술을 그릴 텐데, 이러한 선택 역시 다분히 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 세상을 보는 틀이 달라진다. 한국어로 얘기할 때는 쭈뼛쭈뼛 소심했던 사람이 영어로 얘기할 때는 자심감에 가득차기하도 한다. 일본어로 직접 봐야 느껴지는 소설의 감정, 한국소설이어도 한국어와 영어로 읽을 때 다르게 느껴지는 잔혹함 등. 나는 같은 내용을 다른 언어로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외국어를 계속 배우고 싶다.   


7. 계절의 변화란 당연하게도 인간의 삶을 상기시키는데, 그렇게 보면 가을이 곧 생의 마지막이 되죠


8. 오선지는 음악이 시간예술이라는 약속 아래 편의에 따라 구성된 것입니다. 제가 종종 설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역시 그런 규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과 깊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갤러리 안에서의 소리의 표현은 일반적인 음악처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이야기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보통 우리가 듣는 음악에는 틀이 있다. 전주-전개-절정-결말, 소설과 같다. 여기서 벗어나면 거슬린다. 그 형식 내에서 최선을 다해봤자 얼마나 다향한 무엇인가가 나오겠는가.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변주를 넣고 안넣고, 무한대의 변화가능성을 딱 제한시켜야만 기대 범위 내에서 예상 범위내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9. 후쿠시마 복숭아 달고 맛있어. 애들은 안 먹는 게 좋지만 이라고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내부 피폭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복숭아를 파는 그녀의 모습에서 기쁘면서도 슬픈,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나이든 사람들은 먹어도 괜찮아"라고 덧붙이더군요.  

    음.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본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미래가 없는 본인들은 상관없다고 얘기하지만, 미래 밖에 없는 아이들은 안된다니.   


10. 사실 재해민들과의 적정한 거리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시 들춰내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힘내라는 말을 건넬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통해 응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기를 소망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했던 2년간이었습니다.



11. 훗카이도는 일본 정부가 메이지 시대 이후 추진해온'개척'이라는 이름의 근대화의 상징과 같은 지역입니다. 원래는 아이누 민족이 살고 있던 땅을 일본인이 폭력적으로 개척해 삿포로 같은 커다란 도시를 만들어왔죠. 그런 배경을 토대로 이 예술제에서는 '도시와 자연'이라는 주제로 환경 파괴를 포함한 근대화의 행보를 예술을 통해 돌아보고 과거의 실패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21세기 포스트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최근에 훗카이도를 다녀왔다. 원시 대자연이 끝도 없이 펼쳐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풍부한 해양생물, 끝도 없이 깊은 숲, 원시림, 이렇게 넓은 땅이 있나 싶다가도, 하늘에서 바라본 무한한 경작지를 보면 왜 개발하려 했는지 알것 같기도 하고, 개발을 해서 아쉽기도 한 그러한 땅이었다


12. 향수의 감각이야말로, 예술에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3. 타국의 영화감독의 재능을 순수하게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저 헝그리 정신이야말로 일류의 증거구나, 하는 생각에 이야기를 듣는 동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일류는 하나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14. 분명 환갑을 넘기고, 큰 병을 앓고, 속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청빈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올라야 할 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겠죠. 말하자면, 큰 나선을 그리듯 빙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15. 정치로부터 자립한, 보편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지속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무언가가 필요했죠.   

    정치와 경제로부터 자유로운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 최근에 어떤 유튜브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현대의 모든 제도와 사상은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것이다(신, 사랑, 도덕 등).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것들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폄하한다. 근데 이 사회의 제도의 근간은 그러한 가치들이다보니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괴리감을 느낄수록, 돈에 집착한다. 현실적인 것에 집착한다'   

    뭐 이런 위주의 얘기였는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있으면 좋을까..?  


16. 일본에서는 아직도 예술가 등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한 세간의 거부감이 존재합니다만, 저는 그날 이후 '만약 내가 정말 유명해 팔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설령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해도, 그로 인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낭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환경에 관한 운동도, 지진 재해 후 활동도 이런 신념의 힘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번 연결되면 쉽게는 그만둘 수 없죠.  

    사회의 시선과 관계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것.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언제든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7. 가라타니 씨에 따르면 교환양식A가 증여와 답례의 호혜, B가 지배와 보호에 의한 약취와 재분배, C가 화폐와 상품에 의한 상품교환으로, D는 A가 고차원으로 회복된 것이라고 합니다.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최신 저서인 힘과 교환양식 에서는 D가 저 너머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신의 힘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저는 젊은 친구들과 가라타니 씨의 글을 읽으며 이 D의 어소시에이션(공동체)을 쉽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야 말로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쉽게 잘 읽혀서 좋았던 책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지막 글이라 하니, 씁쓸한 부분도, 슬픈 부분도 종종있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곡이 나올 수 없으니, 이전의 곡들을 하나씩 더 소중히 들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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