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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Jul 09. 2020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습니다

꿈은 나의 두려움을 알고 있다!

열 살 소녀는 친구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우연히 따라갔다가 피아노를 배우게 됩니다. 1년 뒤 피아노 콩쿠르에 처음 참가하게 되었고요. 수없이 반복된 연습으로 눈을 감고도 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지요. 소녀의 차례가 되어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소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지 않자, 객석 쪽 웅성거림이 커져가고 무대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그냥 내려오라며 재촉을 합니다. 무대 조명 아래 소녀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르고, 두 손은 무릎 위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고도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요? 소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렸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나왔지만 소녀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을 리 없습니다. 무대를 급히 빠져나와 겨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으니까요...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다...   

  

수년 전, 팥 캐스트 방송에서 정신과 의사의 '꿈 해석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흥미가 생겨 관련 책을 찾아 읽고 한동안 꿈 일기도 써보았다. 유효기간이 짧은 꿈의 기억은 금세 증발되기 마련인데, 꿈 일기를 쓰다 보니 ‘내 마음이 이러해서 어젯밤 그런 꿈을 꿨나 보다’ 속마음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가위눌림이나 반복되는 꿈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 당시 ‘내가 가졌던 두려움’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 정도는 가위눌림을 경험한다고 한다.

나의 경우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던 때(대학 졸업 전 중등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할 당시와 그 이듬해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잦은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23살과 24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기, 맘껏 꿈을 펼칠 그 나이에 가위눌림으로 잠들기조차 무서울 때가 많았으니... 한마디로 아픈 청춘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반대했던 교원임용고시를 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내면의 갈등과 합격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압박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과 타협한 시험의 결과는 실패로 끝났고, 연이은 아버지의 사고사까지.. 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느낌이었고, 잠시 엎드려 잠이 들어도 검은 그림자가 내 가슴과 목을 자주 옥죄여왔다.     

어린 시절 꿈을 다시 꾸다

어린 시절의 내가 불 꺼진 캄캄한 무대 위, 덩그러니 놓인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 건반을 쳐다보고 있다. 사방은 온통 캄캄하데 피아노 건반만 뚜렷하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여러 번 꿈으로 찾아와 나를 괴롭혔던 그 장면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불현듯 또다시 꿈속에서 두렵고 슬프게 재생되었다.    

 

첫 콩쿠르에서 연주를 시작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이없지만, 그랜드 피아노에 ‘열쇠 구멍’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연습한 피아노는 일반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업라이트 타입의 피아노였는데, 피아노 정중앙에 뚜껑을 잠글 수 있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항상 그 열쇠 구멍을 기준으로 피아노에 앉았고 건반 자리를 익혔다.

그런데 처음 앉은 그랜드 피아노엔 열쇠 구멍이 없었고, 건반의 중앙 '도' 자리(C4)가 어딘지 당황하여 순간 ‘얼음’이 된 것이다. 주위에서 그냥 내려가라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동안 연습한 게 아까워 포기하고 내려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나 보다. 어쩜 몸이 말을 안 들었거나 부끄러워 일어설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벼랑 끝에서 어린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없는 열쇠 구멍 찾기를 포기하는 것,

눈을 감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다음 피아노를 어떻게 쳤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좌절과 두려움

그래서 어린 시절 몇 번 악몽으로 재현될 수 있다 하더라도, 10년이 더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왜 그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일까...      


내가 태어나 자란 1970년대는 아들 선호 사상이 뚜렷했다.(82년생 김지영 시절보다 10년도 더 전이니..) 그러나 우리 집은 사정이 달랐는데, 당시 넉넉지 않은 형편에 피아노를 배운 것도 특혜 중 하나다. 나는 오빠들보다 많은 특혜를 받고 자랐다. 막내이기도 했고, 나보다 두 살 많았던 언니가 여섯 살 이른 나이에 죽은 영향도 있었으리라.


어려서부터 직감적으로 내 역할을 알았던 걸까? 막내인 나는 온갖 재롱을 떨며 집안 분위기를 주도했다. 부모님의 계, 집안 모임에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며 낯가림 없이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말도 잘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부모님의 자랑이었고, 부모님의 기대에 기쁨으로 보답하는 딸이고 싶었다.     


문제의 열쇠 구멍 사건, 그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연주 시작을 못해 난리도 아닌 난리를 친 터라 상은 기대도 못했는데 번쩍이는 트로피와 상패가 얼떨떨했다. 아빠는 여러 날을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셔서 역시 우리 딸이 최고라며 수염 난 까칠한 턱을 내 볼에 비비셨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 집에는 근사한 검은색 피아노가 들어왔다. 피아노도 없이 학원에서만 연습하여 콩쿠르에 나가 상을 받은 딸이 대견하다고, 아빠는 피아노 선생님께 도움을 구해 피아노를 구입하신 것이다. 거금 75만 원을 들여서.

1981년 국립대학교 등록금이 12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75만 원이란 돈은 대학 1학년이던 우리 큰오빠 4년 치 학비를 낼 수 있는 엄청 큰 금액이었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신다. ‘아버지가 얼마나 좋으셨으면 어려운 형편에 그리 큰돈을 들여 피아노를 사주셨을까’하고.

     

그런데 그 이후 ‘콩쿠르 대회 상의 비밀’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우수, 최우수, 대상 이런 등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참가비를 내면 대부분 상을 받는 것 같았다. 학원 참가자 중에 상을 받지 못한 학생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한 건, 첫 콩쿠르에서 받은 ‘우수상’이 아빠의 생각만큼 그리 ‘우수한 성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확인해보지 않아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어린 내가 그리 느꼈다는 것이 중요했다. 피아노 선생님께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정말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그 사실을 확인하면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사준 아빠께 너무나 죄송할 것 같았다. 그래서 ‘콩쿠르 상의 비밀’은 그렇게 영원히 묻히기를 바랐다.


아빠는 평소 말씀이 없으시고 가족에 대한 애정 표현도 서툰,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셨다. 그러나 술 드신 날 만큼은 과자를 사 와 잠든 막내딸을 깨우고, 더 기분이 좋아지시면 노래도 한 곡조 뽑으셨는데 아빠의 18번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로 시작하는 <클레멘타인>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대신 항상 ‘나의 사랑 영이야’로 개사해 부르셨고,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아빠의 막무가내 요청으로 피아노 반주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시던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가장 행복한 얼굴이 아닐까 싶다.   


피아노 콩쿠르의 경험은 우수한 성적을 얻고 싶었던 어린 소녀에게는 분명 첫 좌절이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러나 두고두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꿈으로 재생되었던 까닭은 그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콩쿠르 상의 비밀, ‘우수하지 못한 우수상’을 받음으로 아빠가 거금의 피아노를 사주셨다는 사실, 이후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상'이었음을 알고도 진실을 고백하지 못한 죄송함...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아버지를 일부러 속여 피아노를 산 것도 아닌데... 설령 아버지가 콩쿠르 상의 비밀을 알았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연주를 끝까지 잘 마친 딸을 오히려 칭찬해주셨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어린 내가 진정 두려워한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언제나 부모님의 기쁨이고,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던 내가 부모님께 실망을 드리게 될까 봐 그걸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시 꾼 그 꿈 또한, ‘피아노’로 대표되는 아버지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한 죄책감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40년 동안 12번 집을 옮겨 다니면서도 피아노를 떼놓지 못했다. 우리 딸들이 그 피아노로 연습했고, 베트남까지도 함께 다녀왔다. 올해 둘째 아이가 작곡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도 40여 년 만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는데, 어릴 적 치던 연습곡을 내 손이 기억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왜 조금 더 일찍 용기 내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사주신 피아노로 다시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꿈의 스토리'도 달라지지 않을까?

부모님을 내 꿈속 연주회에 모시고 11살 소녀가 아닌, 지금의 내 모습으로 아버지의 18번 <클레멘타인>과 새롭게 연습한 쇼팽 에튀드 <혁명>을 멋지게 연주한 뒤, 두 분을 향해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행복한 꿈 말이다.


*사진 출처: photo by @pudaejaru(#인스타_일러스트) - 작은 오빠의 사진을 사용하였다.


https://youtu.be/c-QTUXBoE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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