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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May 12. 2020

24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딸에게

아빠의 딸이 나의 딸에게


여기는 베트남 하노이.
주재원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 지도 만 4년.


베트남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 남편과 딸 둘, 나 이렇게 우리 가족은 둥글게 둘러앉아 손을 꼭 맞잡았다.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근무를 떠나는 남편,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하게 된 큰딸, 낯선 나라의 국제학교 중등과정에 입학할 둘째, 교사로 20년 넘게 다닌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전업주부가 되는 나.


남편은 ‘새로운 도전 앞에 모두 힘들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독립운동 떠나는 투사처럼 비장했고,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가족은 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올여름,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임할 예정. 남편은 어느 지역으로 발령받을지 모르고, 둘째는 작곡 공부를 위해 예고 1학년 편입 계획이다. 나는 긴 휴식기를 깨고 학교로 복직, 다시 워킹맘이 된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큰딸은 중간에 한 학기 휴학을 한 터라 이번 여름 졸업을 한다. 딸은 영국의 대학원 석사과정 진학을 오래 준비해오다 작년 연말, 입학 허가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 예정대로라면 올 9월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할 터였다.

그런데 ‘코로나 19 바이러스’라는 복병을 만났다. 대학 마지막 학기는 서울 자취방에서 온라인 강의로 채우고 있고, 유학도 미지수다.


며칠 전, 그런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국 대학원 측에 메일로 여러 가지를 문의해본 결과,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며 갑자기 불투명해진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울먹이듯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내 딸이 올해 24살.

딸의 전화를 끊고 나니, 24살의 나를 위로해주시던 아빠 생각이 났다.


당시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교원임용시험을 쳤다. 결과 발표를 보고 집에 알리기 위해 공중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를 든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빠의 따뜻한 음성을 잊을 수 없다.

“영아, 날씨가 차다. 빨리 들어와라”.


대학 졸업 이후 교사 임용을 보장받고 입학한 국립 사범대학이었지만 중간에 시험제도로 바뀌었다. 제도에 저항도, 시험도 실패, 결국은 대졸 실업자. 인생의 첫 좌절감과 비통함을 느꼈다. 아파하는 나를 더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시던 아빠.


그런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인생의 좌표를 잃고 1년을 방황하던 끝에 무작정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게 된다. 혼자 가는 여행도, 해외여행도 처음이었다. 한 달간의 여행은 힘들었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마지막 여정이 파리였다.

여행 마지막 날이 아빠의 첫 기일이었는데, 항공편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날짜를 맞추지 못했다. 첫제사도 못 지킨 나는 한국에서 제사를 지낼 시간에 맞춰 세느강변에서 혼자 나름의 의식을 가졌다.

아빠께 하고픈 말을 편지로 쓴 뒤 태워 센 강에 흘려보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빠가 내 편지를 받아보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염없는 눈물로 쓴 긴 편지를 강물에 흘려보내고 나니,

'슬퍼하지 마라, 아빠는 너의 가슴에 항상 살아있단다.’라고 아빠가 대답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러자 더 이상 슬퍼만 할 게 아니고, 아빠가 못다 한 삶을 자식인 내가 대신 이어가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빠와 약속했다. 아빠가 언제나 나와 함께하실 테니 용기를 내어 아빠 몫까지 열심히 잘 살겠다고.

나는 여행을 마치며 1년의 방황하던 시간과 그렇게 작별하고 새로운 출발이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대전환점이었다.




내 나이 쉰이 되던 작년 새해,

내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파리를 25년 만에 남편과 여행하는 행운이 있었다.

'여행은 자신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라고 했던가.


25년 만에 다시 찾아간 파리 곳곳에서 25살의 풋풋한 내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이후 내가 살아온 25년이란 시간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빠에게 울며 편지를 썼던 센 강을 바라보며 쉰 살의 내가 다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나, 그때 아빠랑 편지로 약속한 이후로 25년 동안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아빠가 보시기엔 어때요?

나 아빠랑 약속 지킨 거 맞죠?” 


내 마음속 아빠는 그 옛날처럼,

그래, 내 딸이 최고다 그리고 한 마디 더,

애 많이 썼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어느덧 내 딸이 자라, 아빠를 여의었을 때의 내 나이가 되었다. 내 딸을 보니 ‘내가 저리 어릴 때 아빠가 돌아가셨던가’,

딸의 모습에 다시 24살의 어린 내가 겹쳐져 마음이 아파왔다.


훗날 딸은 2020년 자신의 24살을 어떻게 기억할까?

자신이 준비하고 바라 왔던 새 출발을 못할 수도 있고, 그런 만큼 힘들고 아픈 시간을 견뎌내야 하겠지만,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이제 나는 안다. 아빠도 그때 그랬겠구나...


대신 걸어줄 수 없는 딸의 새 출발을 나도 아빠처럼 응원할 뿐이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예측하지 못하는 새로운 출발, 도전의 순간이 올 것이다. 두려움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성숙할 수 있으리란 설렘과 희망이 앞서는 것은, 내 마음에 언제나 함께하는 아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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