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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Aug 30. 2020

한 번 다녀왔습니다?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더라...

'한 번 다녀왔습니다'

요즘 방영하고 있는 KBS TV 주말 드라마 제목이다. 드라마를 본 적이 없거나 어떤 정보가 없는 사람에겐 '어디'를 한 번 다녀왔다는 건지 모를 수도 있겠다. '한 번 다녀왔다'는 것은 결혼했다가 이혼을 했다는, 흔히 말하는 '돌싱(돌아온 싱글)'이 되었다는 뜻이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이혼이 마치 인생의 실패처럼 여겨져 쉬쉬하며 숨기던 때가 있었지만, 이젠 '한 번 다녀왔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우리 주변에서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그 말이 주던 무게감이 확 줄었다. 한 번뿐 아니라 두 번, 세 번, 여러 번도 다녀올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이 언제부터 KBS TV 주말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둘째가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주말이 되어야 아이들과 다 함께 식사도 하고 TV도 볼 수 있었다. 주말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 쉬면서 보기엔 8시 드라마가 딱이었다. 영화는 보통 조용히 집중해서 보지만, 드라마는 함께 보면서 그 내용을 가지고 가족끼리 이러니 저러니 수다를 떨며 보는 맛이 있다. KBS 주말 드라마가 보통 30%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 가족과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베트남 하노이에 살 때도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보다 2시간이 늦기 때문에 한국에서 저녁 8시에 하는 드라마를 현지 시간으로 저녁 6시에 시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항상 그 시간에 저녁을 먹으며 KBS TV 주말 드라마를 보곤 했다.


하노이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던 6월의 어느 주말이었나 보다.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드라마를 보다가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으며 TV를 켰고, 식사가 끝난 뒤엔 소파로 자리를 옮겨 본격 드라마 시청모드로 들어갔다.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족의 1남 3녀 자녀들은 어쩌다 보니 각각의 이유로 다들 '한 번 다녀온' 입장이 되었다. 이런저런 갈등 상황들이 전개되는 드라마를 보던 남편이 17살인 둘째 딸에게 슬쩍 한 마디를 했다.

"우리 딸은 나중에 커서 결혼하지 말고 그냥 아빠랑 계속 살자"

딸을 둔 아빠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말이다.

더군다나 '자녀들이 다 이혼하여 바람 잘 날 없는 한 가정의 파란만장 스토리를 다룬 드라마'를 보다 보니 아빠 입장에서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의 대답이 아주 빠르고 단호했다.

"아니, 나는 꼭 결혼할 건데?"

독립심이 강하고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첫째 딸과 달리, 어릴 때부터 현모양처를 꿈꾸던 둘째고, 여전히 연애나 결혼에 대한 로망 가득이니 충분히 예견된 대답이었다.

거기서 내가 한마디 보탠 것이 화근이었다.

"왜? 엄마가 만약 네 나이로 돌아간다면 엄마는 결혼 안 할 것 같은데... 그냥 자유롭게 사는 게 더 좋잖아"

남편은 그 말에 그만 기분이 크게 상해버렸다.

남편이 내 말을 잘못 이해하여 기분 나빠하는 줄 알고 다시 부연 설명을 했다.

"내가 여보랑 결혼하기 싫다는 게 아니고, 결혼 제도 그 자체가 싫다는 거지. 그냥 가볍게 한 말인데 왜 심각하게 다큐로 받아들여?"


난 그저 가볍게 나의 의견을 말한 것뿐인데 그걸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기분 나빠할 일인가 싶었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방에 들어가 버리는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 부부는 가끔 말다툼을 하더라도 그 날을 넘기지 않고 화해하는 편인데, 그때는 둘 사이에 형성된 한랭전선이 하루가 넘도록 정체되어 있었다.



우리의 만남과 결혼

대학 1학년, 동아리 동기로 만난 우리는 대학 시절 내내 그냥 친구였다. 남편에겐 내가 첫사랑이었지만, 대학시절 짝사랑으로 끝났다. 졸업 이후 직장인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오랜 기간 나를 좋아한 남편의 진실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짝사랑에는 어떤 형태로든 후유증이 남는 걸까..

결혼 이후 나로 인해 서운한 감정을 느낄 때면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암튼 남편은 그런 마음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지금껏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드라마를 보다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 말을 남편은 결코 가벼운 농담처럼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섭섭해하는 남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운 다음날, 출근했다가 퇴근해 들어오는 남편을 향해

"내가 우리 여보랑 결혼하길 정말 잘했지?" 하며 남편을 안아주었다.

그 한마디에 아이처럼 수줍어하며 좋아하던 남편!

그런 남편을 보며 다음 말은 속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그래도 결혼은 싫어. 여보는 좋은 남편이지만...'

(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재판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한 것처럼...)


그러나 남편 듣기 좋으라고 일부러 맘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남편은 아내인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성실하며 가정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만 놓고 본다면, 남편이랑 결혼하길 잘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다.


결혼의 현실, 달라도 너~~ 무 달라!

그런데 결혼이 어디 남편 한 사람만 보고 사는 것이더냐.

27살 결혼 당시에는 그걸 잘 몰랐다. 결혼은 적당한 나이가 되면 의례 하는 건 줄 알았고, 철부지 막내로 저 하고 싶은 대로 살던 내가 보수적인 시댁에 맞춰 살기 힘들 거라며 걱정하시던 엄마에게,

'나는 주체적으로 잘 쳐나갈 수 있어'라며 큰소리 뻥뻥 쳤더랬다. 남편이 내 편이면 문제없다고.


나는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 해라' '~하지 마라'등의 잔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자랐다. 공부하라는 말은 물론이고, 7살 때부터 대학 1학년 때까지 학교생활보다 교회활동을 더 열심히 했지만 불교신자인 어머니는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씀 한 번 안 하셨다. 연애 문제로 간섭하는 일도 없으셨고,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면 되었다.  부모님께 걱정 끼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두 분은 항상 딸을 묵묵히 지지하고 믿어주셨다.


그런 허용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유롭게 자랐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대학시절에도 그 흔한 MT 한 번 못 가고, 통금시간까지 정해져 있을 정도로 엄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991년~92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남녀 주인공 상황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결혼을 하고 시댁살이를 하면서 벌어지는 두 가족의 좌충우돌 이야기였다. 가족드라마가 항상 그렇듯이 여러 갈등 상황을 잘 극복하고 결국에는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 스토리.

나의 결혼 생활도 적당히(?) 노력하면 서로 이해하고 원만하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 하희라가 아니었고 결혼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


결혼생활의 가이드라인, '너 하나만 참으면 돼'

복잡한 인관관계가 얽히는 결혼이란 제도 속에서 내가 24년 동안 극복해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니...

'가이드라인'

결혼을 하면서, 내 생활을 강하게 규제하는 가이드라인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며느리에 대한 시댁이나 시부모님의 기준, 기대치는 높았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을 계속 의식해야 했다. 누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데도 결혼 생활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게 되고, 자기 검열을 거치며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시댁 가족들은 아주 화목하여 대가족이 자주 모이는데, 그 속에서 나는 외로웠다.  '나' 하나 마음을 꾹 누르면 다른 가족들은 모두 웃을 수 있고 행복한 것 같았다. 가족 간의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나 자신을 어떤 틀 속에 맞추는 것이었으므로 마음은 더 답답해져 갔다.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해외에)

남편은 착한 아들, 하나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항상 부모님 가까이에 머물러 왔다.  부모님 걱정에 서울 발령도 마다하던 남편에게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해외 발령이었다. 남편은 45년 만에야 부모님 곁을 떠날 용기를 낸 셈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고 멀리 떠나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걱정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으리라.


솔직히 말하면 남편의 해외파견은 내게 호재였다.

가뭄 속 단비요, 하늘이 내려준 행운의 선물처럼 여겨졌다. 교직이 천직이라 여기며 열심히 다닌 학교에서도 나는 지쳐가고 있었고.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휴직 한 번 못한 채 바쁜 워킹맘으로 살았던 20년 세월도 숨가쁘게 여겨졌다. 간절히 쉬고 싶었다. 시댁, 친정, 직장, 친구 여러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힘들어하던 내게 해외생활은 얼마나 통쾌한 탈출인가. 혹여라도 새로운 도전을 향한 남편 마음속 불씨가 꺼질세라, 그 옆에서 열심히 부채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심정으로!

"나는 인도, 아프리카도 좋아. 여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갈게. 가서 최선을 다해 내조할게~~"


그리하여 해외에 '한 번 다녀오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타지 생활의 경험이 전무했다. 태어난 곳에서 대학까지 졸업, 취직하여 줄곧 45년을 살다가 해외로 나가 4년 반을 살았으니, 그 한 번의 경험은 우리에게 엄청난 삶의 변화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온 생활의 기반을 뒤로 한채, 복잡한 인간관계의 틀을 훌훌 털어버리고 오롯이 '한 가족'만으로 독립하는 것! 그렇게 단출하게, 단순하게,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

충분히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다시 돌아와 그 자리에, 그러나...

이제 나는 이전의 생활터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원래 살던 집으로 이사했고, 직장에 복직했으며 시월드에 재입성했다.

입국해서 2주간의 격리생활 이후로도 한 달이 더 지났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내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다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간절한 소망 하나가 있었으니, 차분히 앉아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

그러나 그 시간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브런치에 접속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으니 말이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저승길을 한 번 다녀온 사람

한 때 죄를 지어 교도소를 한 번 다녀온 사람

드라마 제목처럼 결혼했다 한 번 다녀온 사람 등등...


어쨌든 기존 생활의 틀을 크게 바꿔 '한 번 다녀와 본' 사람은 그 이전과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내게는 결혼했다 한 번 다녀온 것만큼이나 파격적 탈출이었던 해외생활을 한 번 다녀왔으니...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두 달, 이제 적응은 끝났다!!


P.S  그런데... 두 번은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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