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선약수 Sep 13. 2020

'유예' 된 것들..

한국생활 적응 끝에 얻은 '선물'

복직하여 출근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건강보험료 '폭탄'을 맞았다!


행정직원이 내 자리로 직접 가져다준 건강보험료 정산내역서.

4년 반 만에 학교에 복직하고 보니 이것저것 정신이 없던 터라 직원의 설명도 건성으로 듣고  "네~"하며 종이만 받아두었다. 퇴근할 때 책꽂이 위에 놓여있는 A4 용지 한 장이 눈에 띄어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헉" 소리가 나왔다. 점을 잘못 찍었나 했다.

다시 보아도 60만 원이 아닌 600만 원.

복직하자마다 지금 나에게 600만 원을 내라고??

휴직기간 동안 건보료는 면제된다고 남편한테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이게 웬 날벼락?


'지급유예로 신고' 되었습니다.

2016년 2월, 남편의 해외파견으로 직장에 동반휴직을 신청했다. 행정적인 절차는 내가 잘 알지 못하여 행정직원에게 물어가며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학교일을 마무리지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직장 의료보험 업무를 담당했던 행정직원은 해외로 나가는 동반휴직이 나의 경우가 처음이어서 그 직원 또한 절차를 잘 몰라 건강보험공단에 문의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안내를 잘못해주었다는 것. 그 바람에 나의 휴직처리가 '해외 출국이 아닌 기타 휴직'(국내에서 기타 사유로 휴직하는 경우)으로 잘못 신고가 되었음을 건보료 폭탄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해외근무로 인해 출국을 하게 되면 건강보험료가 출국 기간 동안 면제가 되지만, 국내에서 기타 사유로 휴직을 하게 되면 매월 보험료의 50%가 청구된단다. 다만 급여가 없는 휴직기간 동안 '지급이 유예'가 될 뿐, 다시 복직을 하여 소득이 생기면 그동안 '유예'된 보험료가 청구되는 것이었다.


즉, 신고 오류로 면제받을 수 있었던 건강보험료를 600만 원씩이나 내게 된 것. 

지급유예(모라토리엄) : 경제 전쟁, 지진, 경제 공황, 화폐 개혁 따위와 같이 한 나라 전체나 어느 특정 지역에 긴급 사태가 발생한 경우에 국가 권력의 발동에 의하여 일정 기간 금전 채무의 이행을 연장시키는 일

과정의 복잡함이 있어서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고, 결론만 얘기하자면 나는 억울해도 청구된 보험료를 내야 했고, 절차 상의 오류나 부당함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참고로 휴직 신고의 의무는 개인이 아닌 직장에 있는데 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며칠 동안 사방팔방 알아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의신청 접수를 하는 것뿐이었다. 이의신청 접수 상담을 해주던 건강보험공단의 한 직원은, 서류 접수를 하면 심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2달~3달이 걸리는데 보험금을 다시 환불받을 확률은 매우 낮아 보인다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접수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일단 접수는 했고 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은 '지급을 유예'해줄 테니 다녀와서 갚아


내가 서두에 건보료 폭탄 맞은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한국에 다시 적응하는 과정이 꼭 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 살면서 내게 부여되었던 다양한 역할과 책임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만큼은 면제되는 줄 알았나 보다.  

해외생활로 누리는 자유와 여유는 그동안 바쁘게 열심히 살아온 내 삶에 주어진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가 없이 주어진 보너스도,

용도대로 쓰다가 다시 원래대로 반납하면 되는 무이자 대출도 아니었다.

멋모르고 쓸 때는 좋았는데 나중에 상환하려고 보니 감당해야 하는 이자가 만만치 않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은 지급을 유예하지만 다녀와서 갚아야지~'라는 메시지는 건강보험공단에서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역할의 이름마다 유예된 의무와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4년 반을 휴직했다 복직한 고등학교 교사

교육과정을 비롯하여 많은 것들이 변한 학교에서 나는 더 이상 교직경력 20년이 넘는 노련한 교사가 아니었다. 신규발령받은 교사처럼 서툴게 느껴진다. 젊은 신규교사는 머리라도 팽팽 잘 돌아가지, 쉰이 넘으니 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속도도 느려진다. 학교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어설픈 모습 보이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이 너무 반갑고 예뻐 보이는 것. 그들 앞에 다시 교사로 설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욕만 앞서갔다.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딸, 며느리

한국을 떠나 있던 5년에 가까운 시간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의 기력과 건강을 많이 뺏어가 버렸다.

워킹맘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두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두 분 모두 팔순이 넘으시고 연로하셔서 가 보살펴드려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허리 수술을 받으시고 한 달을 입원하셨다가 얼마 전에 퇴원하셨고, 친정어머니도 당신 끼니를 겨우 챙겨 드실 정도신데 혼자 계시니 항상 불안 불안하다. 부모님 곁을 떠나 있던 동안 제대로 살펴드리지 못한 죄송함은 마음의 부채가 되어 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N포 세대 자녀를 둔 엄마

한국에서 5학년을 마치고 베트남에 가서 영국 국제학교에서 초6~ 중3 과정까지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둘째. 나갈 때는 둘째가 국제학교에서 교육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 큰 행운이라 여겼다.

한국에 돌아와 둘째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편입하게 되는데, 국제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한국 고등학교에 적응하는 데는 오히려 불리하다. 국제학교를 다니는 동안 배우지 않았던 국어, 국사, 윤리, 사회 등... 둘째 또한 '유예된 학업'으로 인한 부담감이 만만치 않으리라.


한국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둘째를 서울로 보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돌아와서 사정이 좀 달라졌다. 결국  본인이 서울에서 음악 공부하기를 원해 부랴부랴 둘째가 진학할 수 있는 학교, 학원, 레슨 등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서울, 부산을 오가야 했다.


올해 8월 영국으로 대학원 진학을 위해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첫째가 코로나 때문에 유학을 1년 '유예'해야 했던 불운이 둘째에겐 역으로 행운이 되었다.

서울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던 첫째에게 둘째를 맡기기로 한 것.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여 자기 앞날도 막막한, 3포를 넘어 이젠 N포 세대라는 첫째.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클 텐데 거기에 동생 보호자의 책임까지 맡긴 셈이니. 그러나 항상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는 언니인 터라, 동생이 음악가의 꿈을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며 동생과의 '동거'를 흔쾌히 받아 주었다.

*3포 세대: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말.
*N포 세대: 사회,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연애, 결혼, 주택 구입 등 많은 것을 포기한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포기한 게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학 입학을 앞둔 큰딸만 한국에 남겨둔 채 베트남으로 떠났는데, 다시 돌아오니 대학을 다 마쳤다. 서울이란 낯선 도시에서 딸 혼자 생활한 4년 동안 엄마로서 제대로 보살펴준 게 없다. 자취하는 딸에게 밑반찬 한 번 만들어 보내주지 못한 미안함이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에 둘째가 같이 살게 되어 첫째가 사는 집을 처음 방문하였는데 '그동안 혼자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하는 측은함과, 너무나 무심한 엄마였다는 때늦은 자책감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그동안 못했던 엄마 역할을 한꺼번에 만회라도 하려는 듯, 서울에 있던 5일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광이 나도록 청소하고,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짐들을 몽땅 꺼내어서 사용하기 편리하게 다시 정리해서 수납했다. 출근하며 동생 밥까지 해먹여야 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밑반찬도 넉넉히 만들어 냉장고에 채워 두었다.


이제 적응은 끝났다?

복직하여 3주 출근하고 맞은 단 2주일의 여름방학. 그중 1주일은 복직 연수(2년 이상 휴직한 교원이 복직 시 받는 30시간 연수), 우리 집 이삿짐 정리, 시댁 집 정리(시어머님의 입원으로 인해)를 했다.


그 후 서울에 올라가 아이들 집 청소 및 정리를 했고, 또 중요한 2학기 개학 준비를 해야 했다. 코로나의 재확산으로 다시 원격 수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나는 생전 처음 해보는 것으로  또한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 모든 것들을 끝냈던 지난 8월 30일, 오늘로부터 딱 2주 전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 브런치에 올렸다.

<한 번 다녀왔습니다?>란 제목의 글이었다.

https://brunch.co.kr/@jsy1008/15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거의 두 달만에 올린 글이었는데,

그 글의 말미에 나는 이렇게 적었더랬다.

'이제 적응은 끝났다!!'

두 달 동안의 한국생활 적응기를 힘겹게 끝내고, 이제는 규칙적이고 안정된 일상을 누릴 수 있으리란 나 자신의 야심 찬 선언이었다.  

그런데...


적응의 끝은 무엇인가요?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3일 후,

나는...

'대상포진' 진단을 받고 말았다!



'적응' 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생물이 주위 환경에 적합하도록 형태적, 생리학적으로 변화함. 또는 그런 과정'이라고 나와 있다.

환경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와, 스스로를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전의 글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적응은 끝나지 않았고,

다만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한 결과는...

'대! 상! 포! 진!'

건보료 폭탄에 이은 제2의 폭탄을 맞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나는 내 몸이 주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을 그만 괴롭히고 쫌 쉬라는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번 다녀왔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