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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Nov 02. 2020

베트남에서 생긴 일 2. 오토바이 천국과 지옥

사고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세 사람이 왕복 8차선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편도 4차선에서 두 세 걸음만 더 가면 중앙 분리대에 다가설 때쯤이었다. 속도를 늦추며 멈춰 서던 차들 사이로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곡예하듯이 미끄러져 들어와 앞 서 건너던 두 사람을 한꺼번에 들이 박은 후 넘어졌다. 서로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의지하며 맞잡았던 두 손은 오토바이에 의해 맥없이 풀어져버리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진 공처럼 허공을 날아가 시멘트 바닥으로 고꾸러졌는데,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 들고 있던 양산만이 주인이 받은 충격량을 말해주듯 홀로 어디까지나 굴러가고 있었다. 정작 쓰러진 두 사람은 미동도 없고 뒤따라 건너던 친구의 비명소리가 8차선 도로를 뒤덮고 있었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오토바이가 많음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서 보니 가히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베트남은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오토바이가 많은 나라다. 호찌민이나 하노이 같은 대도시엔 인구보다 오토바이 수가 더 많다고 할 정도, 집 밖만 나가면 도로뿐 아니라 인도까지 온통 오토바이로 뒤덮고 있으니 '오토바이 천지', 아니 '오토바이 천국' 베트남이라 할만하다.


베트남에 살게 되었을 때, 2주 먼저 베트남에 가있던 남편으로부터 들은 주의사항 첫 번째가 '오토바이 조심'이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도무지 길을 건널 수가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하노이에는 신호등이 많이 없었을뿐더러, 있다 해도 차나 오토바이는 신호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차가 오는 한쪽 편만 보고 건너도 안되었다. 역주행하여 달리는 차나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오토바이가 많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는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도로가 막히면 인도가 그들 차지가 되므로 보행자는 항상 주의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베트남에 오래 살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차나 오토바이의 움직임을 예상하여 몸을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무질서 속에서도 어떤 규칙성을 체득했다고나 할까..


지영 씨도 베트남에 오래 살았으니 오토바이 문화에 익숙하지만, 3년 만의 베트남 방문이다 보니 차와 오토바이가 뒤엉킨 도로를 건너는 게 새삼스러운 듯했다. 그래서 내가 지영 씨의 손을 잡고 약간 앞서 이끌 듯하며 길을 건너게 된 것이다. 지영 씨 손을 잡고 중앙 분리대 화단이 있는 지점에 거의 다다를 무렵,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자동차를 보면서 빨리 건너기 위해 지영 씨의 손을 내쪽으로 잡아당겼던 것 같다. 그 순간 뭔지 모를 엄청난 충격에 눈 앞이 캄캄해지더니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내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지연 씨의 애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의식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 상황 파악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지연 씨가 나와 지영 씨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고, 뭔가 내 몸을 강하게 누르고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무엇보다 지영 씨 걱정이 앞섰다. 분명 내가 손을 잡아당겼던 것 같은데...

'지영 씨는 어떻게 된 거지..?'


우리 뒤에서 따라오던 지연 씨가 없었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전혀 몰랐을 뻔했다. 우리의 사고를 목격한 지연 씨가 있어서 그나마 사고의 전, 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물론 자신의 눈 앞에서 두 언니가 한꺼번에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던 지연 씨에겐 끔찍한 일이다)


사고를 낸 오토바이 운전자는 K-마트(베트남의 대표 한인 마트로, 베트남 내에 많은 가맹점을 두고 있다) 직원 유니폼을 입었다고 하니, 아마도 배달 갔다 돌아가던 직원이었던 것 같다. 그가 탔던 오토바이는 우리를 친 뒤 무게 중심을 잃고 넘어졌는데 하필이면 바닥에 쓰러진 내 다리 위를 덮쳤다. 지영 씨와 내가 8차선 도로에 쓰러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지연 씨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 베트남어로 도와달라, 구급차를 불러달라 외쳤지만, 우리나라처럼 사고가 나면 바로 달려와 주는 '119 구급차'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 아주머니 한 분이 지연 씨 혼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 사고를 낸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책임을 물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테니, 부상당한 사람부터 병원으로 빨리 옮기는 게 좋겠다며 택시를 불러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지영 씨와 나는 택시에 겨우 태워져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심한 통증 속에서 겨우 말할 정신이 돌아왔을 때, 지영 씨와 나는 서로를 걱정하기에 바빴다.


"지영 씨, 괜찮아? 미안해. 내가 지영 씨 손을 잡아당겨 지영 씨까지 다친 것 같아..."

"아니에요. 언니, 언니가 많이 다친 것 같아요. 내가 괜히 (베트남에) 와서 언니까지 다치게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서로 자기 때문이라며 미안해했다.

"나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양준일 이야기로 언니들 혼을 빼놓아서 언니들이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언니들 미안해요..."

다친 두 언니를 보며 어쩔 줄 몰라 울먹이고 있던 지연 씨가 한마디를 더 보태었다.

어떻게 거기서 사고 원인의 불똥이 '양준일 이야기'로 튀는지...

숨 쉬기도 힘든 통증으로 눈물과 핏물이 뒤범벅된 그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지연 씨의 말에 웃음이 났다.(웃는 순간의 진동이 통증으로 변해 바로 비명을 내질렀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살아 있었고, 함께 서로를 걱정하며 웃을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


병원에서 X-ray를 찍었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진통제 처방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설명이었다.


그럼 우리 두 사람은 정말 괜찮았던 걸까? 전혀 아니다.


지영 씨는 며칠 뒤 한국에서 남편이 데리러 왔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CT까지 찍은 결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고 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러 기흉까지 생긴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지영 씨는 그런 상황에서도 내 걱정만 했다. 자신은 한국 병원에 입원했으니 이제 치료만 받으면 되는데, 나는 베트남에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어쩌냐는 걱정이었다.


지영 씨 말대로 나는 베트남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후유증까지 겹쳐 한밤중에 응급실에 실려가는 등 또 한 번 힘든 고비를 넘겨야 했다. 설 연휴가 되어서야 한국에 와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나의 솔직한 심정은 한국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제 살았구나'였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에 잘 대처하면서 우수한 의료 시스템이 새롭게 조명받고 세계의 방역 모범국으로 인정받았지만, 나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일찌감치 몸소 체험한 셈이다.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없는 형편이라 2주 정도 입원 치료 후 다리 깁스를 한채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두 달 정도는 깁스와 보조기에 의지해 생활해야 했고, 재활 운동하며 제대로 걷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영 씨는 갈비뼈 골절이라서 깁스도 하지 못한 채 서, 너 달을 고생했다.


사고 이후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제일 먼저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크게 다쳤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한 오토바이에 같이 치는 사고를 당했다. 해외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3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그때 함께 사고를 당하다니... 분명 흔히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다. 같이 다친 데다, 부상 정도도 누가 더하고 덜 할 것 없이 회복 기간도 비슷하게 걸렸다. 사고 직후 지영 씨와 나는 사고의 원인이 각자 자신에게 있다며 서로 자기 탓하기 바빴다. 진심이었다. 만약 지영 씨만 크게 다쳤더라면 지영 씨 손을 이끌었던 나 때문이란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테고, 반대의 경우라면 지영 씨가 자신의 하노이 방문을 가슴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나만 다치고 지영 씨는 가벼운 부상 정도였다면, 지영 씨라도 괜찮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 마음은 그랬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 혼자 고통의 순간순간을 감당해야 했다면 누군가를 원망하고픈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지 않았을까? 아닐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그럼 우리 둘이 같이 비슷한 정도로 다친 것이 다행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건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같은 처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만이 주는 위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이해해 줄 수 있으므로...


타인의 어려운 상황이나 불행, 아픔을 직면하게 되면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고, 때론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린다. 그러나 내면의 한 구석에서 '나는 그렇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는 '상대적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안위를 걱정할 때면 나의 진실된 마음은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할 때 자기 검열을 먼저 하게 되고, 무척 조심스럽기도 하다.


사고 이후 남편은 끊임없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로 나를 위로했다. 사고가 나서 병원으로 가는 중에 지연 씨가 남편에게 전화로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는데, 하이퐁에서 하노이까지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남편은 별의별 끔찍한 생각이 다 떠올랐다고 한다.

'길 건널 때 조심했어야지', '내가 그렇게 오토바이를 조심하라 했는데...' 등 나의 '부주의'를 탓하는 말을 한 번쯤 했을 법도 한데, 남편은 그러지 않았다. 과속으로 달리는 오토바이에 바로 부딪혔는데, 이 정도로 다친 건 정말 하늘이 도운 거라며 '천운'을 강조하는 남편이 참 고마웠다.


지난 글에서 사고가 나기까지 계속 일이 꼬이기만 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머피의 법칙'을 거론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만 반복되는 듯했던 그 날의 사건 속에도 분명 '행운'의 순간이 있었다(-사고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지연 씨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사실이다). 왼쪽 다리의 골반 아래쪽을 부딪히며 튕겨나가 바닥에 떨어질 때 머리가 도로의 시멘트 바닥에 바로 부딪혔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그날 나는 왼손으론 지영 씨 손을 잡고, 오른손은 양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오토바이에 부딪히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양산은 날아가버렸지만, 넘어질 때 들고 있던 오른팔을 그대로 뻗으며 그 위로 얼굴이 겹쳐져 부딪혔다. 내 팔은 타박상을 심하게 입었을지언정, 팔이 완충작용을 해준 덕분에 얼굴이 멍들고 붓는 정도에 그쳤을 뿐 머리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내가 떨어진 지점은 시멘트 화단에 거의 맞닿아 있었는데, 부딪힌 각도나 강도가 조금만 달랐더라면 나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고는 한동안 '트라우마'를 남겼다. 눈만 감으면 강한 것에 부딪혀 몸이 곤두박질쳐지는 느낌으로 몸서리를 쳤다. 자다가도 놀라서 여러 번 잠을 깨곤 했다. 지영 씨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지영 씨와 내가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기까지 넉 달 넘게 고생은 했지만,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가장 감사한 일이다.


법륜 스님이 쓰신 책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따로 있지 않다'라고 하신 말씀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다. 사람에 따라 '어떤 일'을 '좋게 받아들이느냐, 나쁜 일로 받아들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좋은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며, 그 경험을 거울삼아 더 큰 화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전화위복'이니,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일 터이다.


베트남의 오토바이를 생각한다

대중교통이 취약한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는 단순한 '이동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필수품으로, 그 용도 또한 너무나 다양하다.  


개인, 커플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타는 이동수단이고, '오토바이 택시(세 옴, Xe ôm)'나 '간이 가게'로 변신하여 중요한 생계 수단의 역할을 한다. 오토바이 한 대에 장롱이나 침대를 비롯 이삿짐을 잔뜩 싣고 가는 묘기 열전은 베트남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음식이나 택배를 가장 빠르게 배달하는 요긴한 교통수단이며, 손님을 기다릴 때 잠시 낮잠을 청하는 침대나 휴게실이 되기도 한다. 등, 하교 시간에는 학교 운동장과 주변이 아이들을 태우러 온 오토바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베트남 국가 대표 선수단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오토바이 퍼레이드로 축제를 벌인다.

첫 사진은 달리는 차에서 급히 찍어 많이 흔들렸지만, 한 오토바이에 무려 7명이 타고 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베트남 오토바이


물론 베트남의 오토바이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개혁 과제이기도 하다. 수많은 오토바이로 인한 상습 도로 정체,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연으로 인한 대기오염 및 미숙한 도로 문화로 인한 빈번한 교통사고는 심각한 문제로 꼽힌다.


베트남 생활 초기엔 오토바이로 뒤덮인 도로가 복잡하고 무질서하게만 보였지만, 언젠가부터 오토바이 행렬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활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 출근시간이면 거실 창밖으로 개미 떼가 줄지어 가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 행렬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른 아침부터 삶의 현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그들을 바라보면 나의 하루도 의미 있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비록 '오토바이 천국' 베트남에서 불의(不意)의 사고로 '오토바이 지옥'을 경험하며 한때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했지만, 오토바이는 순박한 베트남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표상이자, 나의 베트남 생활에 대한 향수다. 

이른 아침, 뿌연 안개를 헤치고 달려가던 오토바이의 행렬을 생각하면 여전히 나의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그들을 향해 손 흔들며 인사하고 싶어 진다.


신 짜오 비엣남~( Xin chào Việt Nam ; 안녕 베트남 )



<표지 사진 출처: 구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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