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브런치에서 좋아하는 작가님(@혜나무)의 글을 읽다 보니 중1 아들의 이성 친구에 대해 걱정하는 얘기가 있었다. 같은 처지에서 공감의 댓글을 단 분들도 여럿 있는 걸 보고 묵혀 두었던 글감이 생각났다.
평소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떠오르면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제목이라도 일단 저장을 해둔다. 그렇게 브런치 데뷔를 꿈꾸는 글감 후보들이 몇 있는데, '딸의 남자 친구'가 그중 하나이니, 오늘은 큰딸을 브런치에 소환해 보기로 한다.
10대의 이성교제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일러스트: 홍종현)
연애하면 1000일은 기본이지~
큰딸은 올해 꽃다운 24살. 오래 사귄 남자 친구(이후 '남친'으로 쓴다)가 있다. 대학 1학년 때부터이니 5년.. 1000일이 지나가고 다시 또 1000일이 다 되어가는 '아~주 오래된 연인'이다.
딸이 지금 남친과 1000일이 되던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엄마, 내 나이(당시 대학 3학년)에 1000일을, 그것도 두 번이나 기념한 사람 그렇게 흔하지 않아"
그렇다, 딸은 그 당시 1000일이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였다.
고등학교 때 이미 첫 남친과 1000일을 기념한 전력이 있었던 것. 딸은 대학을 진학하고, 남친은 재수를 하면서 만나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지금의 남친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인문학 서점에서 독서토론 모임을 같이 하던 친구다.(딸은 첫 남친과 헤어지고 가까워졌다고 하는데,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딸이 자신의 1000일을 대단한 경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하길래 뒤돌아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아이고~ 대~단하십니다. 입사원서 쓸 때 1000일 두 번도 주요 경력으로 적으세요~"
그런데 이제 2000일, 기록을 또 경신할 날을 앞두고 있다.
나는 딸이 연애를 최소한 10번 정도는 해보고 결혼하기를 바란다.(보수적인 시대를 살았던 나는, 한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랑을 끝까지 지켜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첫사랑과는 타이밍이 어긋났다. 대학 동기인 지금의 남편과 졸업 후 인연이 닿아 결혼했다. 남편에겐 내가 첫사랑이라 자신은 소개팅, 맞선 한 번 못 봤다며 억울하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얘기하지만, 피차일반이고 도토리 키재기 아닌가).
연애를 다양한 사람과 폭넓게 많이 해본 뒤에, 결혼은 원할 때 하는 선택사항. 아무튼 내 딸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연애를 했으면 했다.(반면, 남편은 여전히 보수적인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
10대의 이성교제 ; 고 3 때 임신을 했던 제자
나는 큰딸이 세 살 때부터 중학생이던 시기까지 14년을 줄곧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서 근무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는 남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즉, 남녀공학에서 10대들의 다양한 이성교제와 때때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까지 두루 경험을 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고 1, 2학년 2년 동안 담임을 했던 여학생 J의 일이 가장 안타까운 일로 남아 있다. 부모님이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아 그 스트레스로 발작 증상을 일으켜 학교에서 쓰러지기도 여러 번, 같이 사는 어머니까지 암투병 중이어서 쓰러진 아이를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상처가 많은 아이였지만, 착하고 글재주도 있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관심을 많이 쏟았었다. 그러나 J가 고3 이 되어서는 내가 남학생 반을 맡고 수업도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살피지를 못했다. 힘든 고3 시기에 같은 학년의 남학생과 사귀면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수능이 끝난 뒤여서 학교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졸업을 했으나 두 학생 모두 대학을 포기했다. 어린 연인은 양가 부모의 반대에도 기필코 아이를 낳기로 했고, 20살에 부모가 되었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후 결코 녹녹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했다.
졸업하고 5년 만에 5살 된 아들을 데리고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왔던 J는 나를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었다.
J를 지켜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J가 외롭고 힘겹던 그때,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남자 친구가 유일했다는 거였다. J 가까이에 자신을 이해해주고 어떤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남자 친구를 세상에서 단 하나의 구원자처럼 생각하며 집착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남자 친구를 놓칠까 두려워 아이를 낳겠다 결심했었다는 J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속 무언가가 끝도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최후의 보루'가 되자
J가 나를 찾아왔던 그 해, 내 큰딸이 중3이었다.
여중에 다니고, 학원도 다니지 않아 남학생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남녀공학인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 분명 남자 친구가 생길 터였다.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경험한 바로는 부모가 도끼눈을 뜨고 자녀를 감시한다고 해도 그들의 교제를 막을 수 없다. 억압할수록 반발해서 오히려 이성교제에 불을 붙이는 악수를 둘 수도 있고, 무조건 안된다고 하면 아이들은 음지로 숨어 들어가 막상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큰 문제였다.
J를 비롯하여 제자들의 이성교제를 십수 년간 지켜보면서
'내 딸이 커서 이성교제를 한다면 부모로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수없이 생각해보았고, 스스로 한 가지를 다짐했다.
'나는 딸에게 '마지막으로 몸을 숨길 언덕, 최후의 보루(堡壘)'가 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허용적인 엄마여야 하고, 아이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지지하고, '엄마만은 내편'이 되어주리란 신뢰를 심어줘야 했다.
'통제나 감시'보다는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역할' 이리라 생각했다.
딸이 고등학교 입학한 지 한 달만에... '그날'
딸은 남녀공학에 남녀 합반인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래서 입학할 당시부터 머지않아 '그날'이 오리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바로 '그날' 말이다.
'갑자기 '그날'이 닥치더라도, 나는 결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리라'
그런데 '그날'이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3월 마지막 토요일, 집에 있던 딸이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딸은 수능 치기 전까지 휴대폰을 가져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까지는 내가 만류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본인이 원치 않았다).
전화를 끊더니, 친구가 볼일이 있어서 아파트 1층으로 찾아왔는데 잠시 얘기만 하고 오겠다고 했다. '집에 들어오라 하지' 했더니 뭐라고 둘러대는 폼이 조금 수상쩍었다. '잠시'라고 했던 아이는 2시간이 넘어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으니 연락도 안되고 그냥 기다렸다.
'친구들과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어 다양한 경우의 수를 놓고 생각을 했지만, '남자 친구'란 경우의 수는 당시 내 머릿속에 없었다.
나간 지 3시간이 다 되어 돌아온 딸아이의 손에는 케이크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바로 '그날이 오늘이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황하면 안 돼'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이라 방어가 만만치 않았지만, 오랜 기간 학생들을 지도해온 교사로서의 경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럴 땐 섣부른 유도신문(誘導訊問)으로 괜히 아이가 거짓말을 하게 하면 안 돼. 딸이 방어막을 구축하기 전에 내가 먼저 훅 들어가야지'
"와~ 우리 딸 벌써 남친 생겼나 보네~"
딸은 같은 반 친구인데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리고 그날 딸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억압'보다는 '긍정적 경험'이 될 수 있게
이성교제에 대한 딸의 생각을 들은 후,
우선 딸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모가 미성년자인 자녀의 이성교제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들, 내가 학교 제자들의 이성교제를 지켜보며 느꼈던 것들에 대해 '진지하되, 가볍게' 이야기해 주었다.
'스킨십' 부분은 교사로 학교 아이들과 상담을 많이 해보았음에도, 딸에게는 참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 '성'에 대한 남녀의 인식 차이, '자기 결정권'등에 대한 얘기를 함께 나누었다.
이성교제를 하다 보면 다른 교우관계나 학업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는데, 스스로 감수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상관치 않겠다고 했다. 다만, 선택은 스스로 하되, 나중에 돌아봐서 큰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항상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좋겠다고, 이성교제를 하다가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절대 네탓하지않고 도울 테니 엄마한테만은 꼭 얘기해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10대의 이성교제도 교우관계의 연장선상,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 연습?
그렇게 딸의 본격적 이성교제는 시작되었고, 학교에서 이름 난(?) 커플로 3년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나는 카톡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휴대폰이 없던 딸은 집에 있을 때 내 폰으로 남친과 카톡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통화를 했다. 딸은 카톡 내용을 지울 때도 있었고, 그대로 둘 때도 있었다. 의도치 않게 눌러져 뜨는 바람에 한 번 보게 되었는데, 서로의 호칭이 '여봉봉'이어서 깜놀했다. 그 후론 딸에게 수고스럽더라도 카톡 흔적을 좀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가끔은 딸과 남자 친구를 같이 불러 밥 사주며 얘기하고, 작은 선물을 하기도 했다. 야간자습까지 하고 오는 딸을 위해 간식을 준비할 때는 같이 먹으라고 넉넉하게 싸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딸이 좋아하는 남자 친구이니 잘해주려 했지만, 그에게 잘해주고 마음의 빚을 지게 함으로 내 딸에게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잠재의식이 작동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편하게 얘기하지만, 당시 보수적인 남편이 알면 과도한 걱정을 할까 봐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딸이 자신의 연애사를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하진 않아도, 은근슬쩍 말을 던져보면 특별히 감추거나 하는 거 없이 얘기를 곧잘 하는 것이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딸이 다니던 학교는 당시 규율이 엄격해 교내 이성교제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선생님들도 암암리에 묵인해주는 그런 '모범(?) 커플'로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친구들의 축하 속에 만남 1000일을 기념했으며,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큰딸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은 남편의 해외 파견 근무로 딸만 서울에 남겨둔 채 베트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정착하느라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을 때쯤, 큰딸과 통화를 하며 요즘 남친은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이 이미 연애 1라운드를 끝내고, 새로운 사람과 제2라운드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딸은 고등학교 시절, 힘든 입시 현실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격려도 해준 고마운 친구'였다고 전 남친에 대해 쿨한 마무리 평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