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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아니어도 괜찮아.

스물여덟 번째 편지: 쓸모없는 나이는 없다.

by 보통의 다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모이면 꼭 하는 질문이 있었어. "타임머신이 있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가고 싶어? 이유는?" 뭐 그리 대단한 질문도 아니고,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데도 이상하니만치 이 질문에는 다들 엄청 진지해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


20대 초에는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라고 답했고, 20대 중반이 되었을 땐 고등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공대를 선택했어야 했다고 푸념하고, 20대 후반이 되었을 땐 새내기 시절로 돌아가 좀 더 기똥차게 놀았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지. 이 흐름에 맞춰 30대가 되면 20대 중반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한 거야.


대학생 친구들을 보면 뽀얗고 탱글탱글한 피부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기도 하고, 새벽까지 술을 먹고 다음 날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미치도록 부러울 때도 있어. 그럼에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이제는 쓸모없는 경험은 없고, 건너뛰어도 될 나이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랄까.


10대 때의 나는 조금 무모했던 것 같아. '인간은 자고로 나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귀에 땀 차도록 얘기하시는 담임 선생님과 전교 30등 밖의 성적을 받아오면 '꼴통'이라 부르는 아빠의 장난에 그냥 엄청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조차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면서. 그냥 공부 잘하는 친구 옆에 앉아서 그 친구가 듣는 인강을 듣고, 노트를 베끼고 그랬지. 그 결과 모의고사에서 수학 28점을 받고 교무실에 불려 갔던 기억이 나. 다음 학기엔 기숙사에서도 쫓겨났는데 얼마나 창피하던지!


20대 때는 대체로 긴장하며 살았던 것 같아. 내가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게 싫어서, 남들보다 부족한 게 티 날까 봐 학교에서도, 그리고 회사에서도 미어캣처럼 남들 눈치를 봤어. 그 덕에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종종 마음이 아팠고, 불면증에 시달렸고, 뇌와 심장은 매번 시끄럽게 뛰었어. 학업이나 일뿐 아니라 관계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 미움받을 것이 두려워서 끌려다닌 적도 많았고, 거절에도 익숙하지 않았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30대로 접어든 지금. 사실 내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 여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두렵고, 뒤쳐질까 봐 또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질까 봐 걱정하기도 해. 누구나 인정하는 회사에는 발을 걸쳐본 적도 없고, 여전히 월세집에 살고 있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훨씬 더 여유롭다고 느껴. 더 이상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맞추려고 낑낑거리지 않고, 꾸역꾸역 원하지도 않는 관계를 이어나가기보다, 10명이 안 되는 소중한 친구들에게 더 많은 노력과 사랑을 주려고 노력해. 많은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데 쓰고, 가족들과 새로운 추억을 많이 만들려고 해.


그리고 이제는 나만의 고집도 생겼어. 잃고 싶은 나만의 고집. 거창한 걸 하지 않아도 일상이 재밌게 느껴지는 그런 작은 고집들 말이야. 예를 들면, 비 오는 날에는 꼭 자극적인 로맨스 영화를 보며 달콤한 동동주를 마신다던가, 계절이 바뀌면 제철 음식으로 요리를 해 먹어야 한다던가, 샤워를 하면 우디향이 진하게 나는 크림을 바른다던가. 아! 기분이 꿀꿀할 때면 예쁜 잠옷을 사는 것도 있다.


만 30살이 되기 딱 2주가 남았네. 예전에는 1월 1일, 나이가 바뀌는 게 참 싫었는데 이제는 조금 기대가 된달까. 그렇다고 내가 10대와 20대를 후회한다고 오해하진 않았음 해. 밤새 이불킥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웃지 못할 흑역사도 있고, 답답했던 그 시절의 일기장을 보면 온몸에 닭살이 돋긴 해도 그 시절만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목표 없이 방황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또 남들 눈치 보면서 무작정 열심히만 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믿어. 처음부터 모든 걸 알았다면, 현재의 나를, 이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아껴줄 수 없었을 거야. 그러니, 혹시나 시간이 지나 친구들이 '넌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 줘. '고민은 다음에 하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후회해도 어차피 다 겪을 일이고, 인생에 정답은 없거든. 그냥 각자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걸 해도 괜찮아.


10년이 지나 40대의 나는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30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때의 경험으로 지금 이대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올해 3월, 용기를 내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서, 브런치를 잠시 잊고 지냈었어요. 혹시나, 정말 혹시나, 제 글을 기다려주신 분이 있다면 정말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19살의 나에게는 다음 주를 끝으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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