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상단부에 책갈피로 썼던 JTBC 명함이 보인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도 팔 수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정규직으로.
초판 인쇄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들춰내면 저자 소개 바로 옆 파란 페이지에 손 선배의 싸인이 들어가 있다. 아, 내가 계속 그를 '선배'라고 호칭하는 것은 얼마 전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 때문이다.
“그간 하도 여러 호칭으로 불리길래 한번 세어봤더니 일고여덟 가지는 되더군요. 선배, 사장, 앵커, 교수… 거기다 MBC 국장 시절 함께 일했던 후배들은 아직도 국장이라고 부르고요. 다들 자기가 편한 대로 부르는 거고, 상대가 편한 게 저도 편해요. 하지만, 저로선 여러 가지를 아우르는 선배라는 호칭이 제일 편하긴 해요. 전직, 현직을 따질 필요도 없고요. 정서적으로 장벽을 허물 수도 있죠.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 저한테 ‘손 선배’라고 부르면, ‘아, 나는 정말 권위주의가 없는 사람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웃음)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만족이 되기도 하는 거죠.”
나무위키에 있는 그의 프로필 사진이다. 인터넷 상에서 현존하는 최고 화질의 손석희.
아주 오래전 저널리스트가 되려 했던 내게 그는 우상이자 멘토였고,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정확히는 추적할 거리도 거의 없었다. 검색을 해도 나오는 것은 그가 오래전 펴낸 첫 번째 저서 <풀종다리의 노래>와 다음 카페 플랫폼에 있는 그의 팬카페, 그리고 온라인 상을 떠도는 유튜브 영상 내지는 네티즌들이 작성한 글 뿐이었다.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던 2019년. 그해 4월에는 JTBC를 직접 방문했고 당시 앵커를 맡고 있던 현 JTBC 워싱턴 특파원 김필규 기자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손 선배에 관한 질문도 나왔다. 손 선배와 나름 가까웠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질문을 빼놓을 수는 없었기에.
사적인 질문과 그에 이어지는 답변이 오갔다. 그러다 '손석희 이후의 JTBC'라는 소재가 튀어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도 약간의 불안과 걱정을 내비쳤다. 나는 "JTBC가 다른 언론사에 비해 돋보이는 것은 국내에 '팩트체크'라는 화두를 던진 것도 있지만, '앵커브리핑'이 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지금이야 앵커브리핑처럼 뉴스 방송에서 신문의 오피니언 페이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채널이 늘었다. 대표적인 게 TV조선 신동욱 앵커의 '오늘의 시선'이다. 예전엔 달랐다. JTBC가 유일했다.) 김 앵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만 손석희 이후에도 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그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21년 12월 현재는 오대영 기자가 서복현 기자의 뒤를 이어 뉴스룸을 진행하며 '앵커코멘트'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과거 앵커브리핑이 보였던 명징함과 인문학적 확장성을 따라잡기는 요원해 보인다. (오히려 TV조선 앵커의 시선이 과거 앵커브리핑에 더 가깝다. 포맷이 유사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책은 꽤 술술 읽혔다. 손 선배의 글솜씨 탓도 있겠으나, 분명 '어젠다 키핑'이라는 큰 흐름 때문일 것이다. 어젠다 키핑(Agenda Keeping)이란 말 그대로 어젠다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대개 신문방송학, 언론정보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끝까지 신문방송학과를 고집하던 경북대와 부산대도 이제는 미디어커뮤니케이션으로 바꿨다.)이라 불리는 학과를 입학한 새내기들이 첫 전공필수 과목에서부터 배우는 의제 설정 이론(Agenda Setting)과 게이트키핑(Gate Keeping) 이론을 섞은 것이다. 한국언론정보학회를 비롯한 국내 학계에서 아직 학문적으로 부르는 네이밍은 없다. 해외도 마찬가지.
그가 볼 때 이제는 어젠다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레거시 미디어는 힘을 잃어가고 있고, 뉴미디어는 더 다양화되어 시장은 다각화되고 있다. 이는 정보의 파편화와 가짜 뉴스의 범람을 불러왔으며 한 번 설정된 어젠다의 교체 주기가 빨라졌다. 아울러 이해관계에 따라 그 관계의 당사자들은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며 새로운 어젠다를 설정하려 한다. 특히 그가 JTBC에서 앵커직을 수행했던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격동기(그의 표현대로, 아닌 적은 없었지만)에선 더욱이.
그런 그의 관점이 투영된 JTBC 뉴스룸은 어젠다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삼성 관련 보도가 그랬고, 세월호 보도가 그랬으며, 국정원 댓글 사건과 사대강 탐사 보도가 그랬다. 그 화룡점정은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였다. 최순실의 태블릿PC 관련 보도는 당일날 대통령의 '개헌론'을 통한 어젠다세팅으로부터 어젠다를 키핑 했고 불과 며칠 뒤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손 선배가 이끄는 JTBC가 한국 언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젠다 키핑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시청자들이 느끼는 피로감'이다. 2014년 9월 21일 DDP에서 열린 '중앙 50년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그는 어젠다 키핑을 이야기했다. 디지털만큼 이슈의 지속력이 짧은 미디어도 없으므로 이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끌고 나가다 보면 디지털의 강점인 '네트워킹'을 통해 그들이 지킨 어젠다가 사람들 속에서 생존하리라 보았다.
책의 1부가 어젠다 키핑 관련이었다면, 2부는 저널리즘에 관한 그의 생각이 갈무리되어 있다. 손 선배가 지향하는 보도원칙을 정리하면 사실, 공정, 균형, 품위 이 4가지이다.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술인 사실을, 이해관계 속에서의 공정을, 이데올로기에서의 균형을, 무엇을 어떻게 보도할 것이냐에 관한 품위.
이 가운데 독특하게 볼 만한 것은 '품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디어 관련 학과에서 초기에 배우는 그 수많은 저널리즘 이론 가운데 품위를 직접 언급한 사례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품위를 강조하는 것은 저널리즘이 선정성에 오염되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지상파 3사 말고도 2008년 미디어법 개정으로 보수 언론들이 종합편성채널에 자신들만의 채널을 만들었고, 이 후발주자들로서는 관심을 끌 수밖에는 없었다. 진행자들은 고함을 쳐댔고 시사프로그램은 추측과 사실이 뒤섞여 난잡했다. 그래서 '뉴스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하는 품위를 자연스레 떠올린 것 같다. 어찌 보면 유튜브를 비롯한 디지털 기반의 뉴미디어에서 가짜뉴스 또는 뉴스 큐레이션이 천박하게 이루어진다(예를 들면, 가X연이라든가 뻑X뉴스라던가)는 점으로 보아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이 4가지의 보도원칙을 말고도 손 선배는 JTBC의 방향성을 '합리적 진보'로 규정했다. 책에서만이 아니라 지난 수년 동안 방송이에서든 아니든 JTBC의 방향성을 '합리적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합리적 진보'라고 했다. 현실적인 언론 지형에서는 중도 진보 정도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그는 진보라는 단어 앞에 '합리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2019년을 강타한 '조국 사태'에서 가감 없이 드러났다.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뉴스선호도. 출처는 역시나 한국갤럽이다.
한국갤럽 통계에 따르면 10%에도 못 미치던 선호도가 2014년 2분기 세월호 보도를 거치며 15%를 상회했다. 통계 상으로는 2016년 10월 26일 태블릿 PC 보도 이후인 2016년 3분기에서 조국 사태가 있었던 2019년 3분기 전까지가 JTBC의 최전성기였다. 국정농단 정국에선 44%라는 수치를 기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후 조금씩 선호도가 하락하더니 조국 사태 보도 이후 팍 꺾였다.
반면 MBC 뉴스데스크의 선호도는 한 자릿수에서 두 자릿수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JTBC가 이슈를 주도했던 국정농단 사태 이후, 그러니까 조국 사태 보도를 기점으로 JTBC 뉴스 시청층 일부가 MBC로 옮겨 탔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소위 친문이라 불리는, 서초동 '조국 수호' 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강성 여당 지지층일 것이다. 그 현장에는 '돌아오라! 손석희'라는 팻말이 등장했고 당시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서 조국이 나오면 댓글에는 "손 사장 실망이다. 왜 이리 변했나" 따위의 댓글들이 달렸다. 물론 이 부분은 나의 추측일 뿐, 아직까지 논문이나 통계로 조작적 정의를 통해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원칙에 입각한 JTBC의 보도는 이해관계에 따라 외면받았다. 손 선배가 더욱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검찰 개혁'이라는 어젠다가 조국과 함께 묻히고 있었던 현실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어젠다를 지킬 필요가 있고, 조국과 검찰개혁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의 상황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는 "저널리즘을 위해 운동을 할 순 있어도 운동을 위해 저널리즘을 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이와 관련해서는 그가 2003년 12월 26일 문화일보에 게재한 칼럼 <'킹 메이커'는 오직 국민 뿐>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책에도 스크랩되어 있다.)
이밖에도 책에는 국정농단 보도 관련된 일화, 남북정상회담 당시 JTBC 평양 스튜디오가 거의 성사될 뻔했던 일, 홍석현 회장과의 일화도 녹아있다. 다만 대부분이 사적 시선으로 기술되어 있음에도 굉장히 절제된 느낌이다.
끝으로 매년 마지막 앵커브리핑에 사용돼왔고, 2019년 12월 31일 손 선배의 마지막 앵커브리핑에도 사용되었던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으로 이만 글을 줄인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사족을 붙이자면, 글에서 그의 스타일이 자주 드러났다. (글은 주인을 닮기 때문이리라) 이 글에서처럼 사족을 많이 붙였고 '천착'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앵커브리핑에 사족이 그렇게 많이 있던 것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 손석희 스타일이구나". 또 책을 읽는 내내 아담 맥케이 감독의 '빅 쇼트'나 '바이스'처럼 영화화하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쉬운 점도 없진 않았다. 미투 보도 관련이나 김웅 기자와의 구설수, N번방 조주빈의 협박 사건 등 말이다. 물론 미투 보도 관련을 제외하고서는 사적인 일이고 저널리즘 에세이를 지향하는 이 책에서 언급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지칭)의 눈물이 곧 증거'라는 유명 논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지금 젊은 층은 이 젠더 이슈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에.
다음은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인터뷰다.
▶‘손석희의 삶도’ 몰아보기
①손석희 “구치소 독방서 담장 너머 비행기 소리 들으며 결심한 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13018340005787
②손석희 “보도 전권 보장 약속에 JTBC 이적 고민 놔버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13018480003563
③손석희 “큰물서 해보라며 정치 권유, 웃기는 얘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13018540000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