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약자의 목소리는 더 시끄럽게 느껴지는가
많은 사람들이 'Black Lives Matter'를 외치기 위해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선다. 몇 달 간 인류 전체의 목숨을 위협해온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바이러스만큼이나 누군가의 숨통을 조여온 인종 차별에 대항하기 위함이다. 길다고 해야 대략 반 년 간 인류를 죽여온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만큼이나 누군가에게는 위협적이었던, 길고 긴 역사적인 차별과 폭력을 끝내기 위함이다.
유색 인종의 인권 향상과 인종 차별 타파를 위해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 시절부터 인류의 역사에 인종 차별이 뿌리깊게 박혀버린만큼 그간 유색 인종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일례로, 인종 차별과 식민지화를 기초로 세워진 나라 중 하나인 호주에서는 여러 방면에 걸친 원주민 탄압이 오랜 시간동안 존재해왔다. 호주 원주민 어머니에게서 아이들을 빼앗고, 원주민 여성들을 강간하고, 원주민들의 땅에서 그들의 주거권을 빼앗았으며 settler colonialism (권력을 가진 집단이 식민지화 할 땅으로 이주/정착해 피식민지배인들과 그들의 땅을 동시에 식민지배 하는 방법)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호주 원주민을 주류 사회로부터 고립시켰다. 이에 맞서는 목소리는 항상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낸 대항은 많지 않다. 목소리가 받아들여지는 볼륨은 목소리를 낸 자의 권력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호주 원주민 Chelsea Bond는 그녀의 칼럼 The Audacity of Anger에서 이렇게 말한다.
"The angry black woman is a trope which insists that our emotional responses are irrational and unregulated."
그들이 인종 차별에 대항해 내는 분노의 목소리는 단순히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통제되지 못하는 감정의 분출로만 취급된다는 말이다. 이는 약자 혐오의 대표적인 방법인 가스라이팅 중 하나인데, 기득권층의 이러한 사회적 전략은 인종차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낙인 찍기'는 모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소외시키고 차별을 합리화하며 불평등한 기득권을 공고히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약자가 일생동안 겪는, 어쩌면 그들의 권리 혹은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차별에 반해 표출하는 분노 조차도 지나치게 '시끄럽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불합리하고', '참을성없는' 민폐 행위로 치부해버리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이런 방식의 가스라이팅은 약자에게서 표출된 합당한 분노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음으로써 이후에도 약자들이 불평등에 대항해 목소리 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의 약자 찍어내리기가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스라이팅이 담긴 시선이 비교적 다수의 것으로 여겨지기에 약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어렵다. 용기를 가지고 대항한다 하더라도, 약자의 목소리는 유독 큰 데시벨로 시끄럽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본인이 겪어보지 않은 차별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할 수 없다. 약자의 차별에 대한 합당한 불만과 분노를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로 멋대로 낙인찍으며 본인은 이성적이고 이타적인 척 논리를 펼치지만 결국 그 본질은 차별이고 폭력일 뿐이다. 약자의 분노를 유독 거슬리는 소음으로 여기지 않는 것부터가 덜 폭력적인 사회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