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을 결정짓는 유전자를 찾는 과학, GWAS
난 왜 키 큰 아빠를 안 닮고 엄마를 닮아서 키가 작은거지? 라든가, 내가 머리가 나쁜 건 아빠를 닮아서 그런거야!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나요? 키나 지능을 포함한 많은 신체적 특징이 유전된다고 알려져 있으니 아주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요. 하지만 키 큰 부모에게서 키 큰 자식이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잘 먹어야 키가 큰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키라든가 지능처럼 흔히 유전된다고 알려진 형질의 얼마만큼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걸까요?
부모와 자식의 키를 재보면 아주 높은 상관관계가 나옵니다. 부모가 키가 크면 자식도 키가 큰 경향이 있는 것이지요. 한편, 지난 100년간 한국인 성인 평균키는 여자가 20 cm, 남자가 15 cm 커졌습니다. 적어도 지난 100년 동안에는 부모보다 자식이 키가 훨씬 컸다는 얘기인데, 이런 경향은 유전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유전자 변형이 누적되어 형질 차이가 드러나기에 100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니까요. 우리나라의 영양상태와 위생환경이 좋아지면서 평균키가 커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사람 몸이 갖는 어떤 형질이 얼만큼이나 유전적으로 결정되고 얼만큼은 환경적으로 결정되는지에 관한 논의는 아주 역사가 깊습니다. 유전자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중세에도 천성이냐 교육이냐(nature vs. nurture)는 논쟁은 있었습니다. 휴먼게놈프로젝트의 성공과 관련 기술의 발전 덕분에 유전정보를 직접 탐색할 수 있게 된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어떤 형질이 얼만큼 유전적으로 결정되고 얼만큼 환경적으로 결정되는지 직접 측정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게놈이란 어떤 종의 유전정보 전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유전정보는 DNA 형태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라는 분자가 수없이 여럿 길게 연결된 구조입니다. 뉴클레오타이드에는 A (adenine), C (cytosine) , G (guanine), T (thymine)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종류가 있어서 이들의 조합으로 유전자의 다양성이 생겨납니다. 뉴클레오타이드 세 개가 연결되어 있는 사슬은 4 x 4 x 4 = 64 가지, 여섯 개가 연결되어 있는 사슬은 4 x 4 x 4 x 4 x 4 x 4 = 4096 가지 서로 다른 종류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30억 개로 이루어져 있으니, 가능한 경우의 수가 어마어마하겠지요. 하지만 30억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중에서 개인차를 보이는 곳은 1%도 채 안 됩니다. 차이를 보이는 1%를 제외하면, 내 DNA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DNA나 뉴클레오타이드 배열이 똑같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일반의 유전자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 즉 30억 개 뉴클레오타이드의 배열 전체를 알아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바로 휴먼게놈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1990년만 해도 30억개나 되는 뉴클레오타이드 배열을 모두 알아내는 게 썩 가능할 법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프로젝트 초반에는 지지부진했다고 해요.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실험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원래 목표로 했던 1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대강이나마 유전자지도를 완성하는데 성공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가지 놀라운 점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여러 나라의 수많은 연구소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오랜시간 노력한 끝에 얻어진 인간 유전자 지도를 즉시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는 점입니다. 휴먼게놈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던 당시 이와 별개로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완성된 유전자 지도에 대해 특허를 따낼 심산이었지요. 다행히도 휴먼게놈프로젝트에서 발빠르게 결과를 공개해버린 탓에 수포로 돌아갔지만요. 이 사건을 계기로 유전정보는 모두의 것이며 따라서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대원칙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유전정보를 열람하기 위해 돈을 내야하거나 허가를 받아야하는 세상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휴먼게놈프로젝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99%의 유전정보를 알아내어 뼈대를 세우는 작업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개개인의 특성을 결정하는 1%의 유전정보를 알아내고자 하는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차가 있는 유전자야말로 우리가 관심을 두는 형질을 결정하는데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개인차를 보이는 수천만 개의 뉴클레오타이드를 하나 하나 훑으면서 특정 위치에 어떤 뉴클레오타이드를 갖는지에 따라서 사람의 몸이 갖는 형질이 달라지는지를 살펴보는 연구가 수없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의 키를 결정하는 유전자는 무엇일까? 몸무게는? 지능은? 알러지는? 이러한 연구를 GWAS (genome-wide association study) 라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연구성과를 망라한 GWAS catalog라는 데이터베이스에 가보면 어떤 형질과 상관있다고 알려진 뉴클레오타이드의 위치를 빼곡하게 표시해 둔 유전자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어찌나 빼곡한지 새 연구결과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지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유전자지도가 꽉 차도록 연구성과가 쌓이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형질에서 유전자의 영향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매우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만의 지표가 되는 체질량지수를 예로 들어볼까요? 수백개의 유전자가 체질량지수와 상관이 있다고 밝혀졌지만 다 합쳐도 개인간 체질량지수의 차이를 6%밖에 설명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30% 정도가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될 것으로 예측했던데 비해 현저히 낮은 값이었지요. 휴먼게놈프로젝트만 끝나면, 인간 유전자 지도만 완성되면 각종 질병에 관련된 유전자를 찾아내서 혁신적인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던 과학자들에게는 크게 실망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4%는 유전자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얘기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한가지는 GWAS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유전자가 있을 가능성입니다. 비만이라든가 키, 지능 등 복잡한 형질의 경우 하나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유전자가 영향을 미치는 대신 하나 하나의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합니다. 유전자의 차이에 따라 드러나는 형질의 차이가 매우 작은 경우, 아주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야만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이 분야에서는 점점 더 많은 숫자의 사람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숫자의 유전자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십년 전에 25만명을 대상으로 한 GWAS에서 찾아낸 유전자가 개인간 체질량지수의 차이를 3%정도 설명했던 것에 비하면 70만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최근의 GWAS에서 찾아낸 유전자는 개인간 체질량지수 차이를 6%정도까지 설명합니다.
또다른 문제는 GWAS가 연구할 수 있는 유전자 종류에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희귀한 유전자는 GWAS 연구에서 제외되기 쉽습니다. 만명 중 한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한 유전자라면 실제 연구에서 이러한 유전자를 발견했을 때 이 사람이 진짜 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측정의 오류인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귀한 유전자가 오히려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아쉬운 일이지요. 요즘에는 희귀한 유전자를 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질병과 상관있는 더 많은 유전자를 발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연구하려는 형질 자체의 문제도 있습니다. 천식을 예로 들어볼까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천식은 단일한 질병이 아닙니다. 어린이 천식과 성인 천식이 다르고, 알러지에 의한 천식과 알러지를 동반하지 않는 천식이 다릅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천식을 하나의 질병으로 생각해서 관련된 유전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어린이 천식을 대상으로 한 GWAS와 성인 천식을 대상으로 한 GWAS는 결과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만약 이런 구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천식 GWAS'를 시도했다면 어린이 천식 유전자나 성인 천식 유전자 양쪽 모두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앞으로 연구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여러가지 형질을 설명할 수 있는 유전자를 더 많이 찾아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보다는 유전"이라는 결론을 내릴 날이 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쩌면 유전자와 환경 모두가 중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싱거운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 있지요?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건 알코올이 분해되면서 생성되는 유해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 때문인데,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하는 유전자가 기능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술을 조금만 마셔도 금새 아세트알데히드가 축적됩니다. 이 유전자 자체만 놓고 위암과의 관련성을 분석해보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아세트알데히드 분해 기능이 떨어지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위암 발병률이 크게 증가합니다.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즉 환경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GWAS 분석만 해서는 이 유전자의 진짜 중요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지요. 어쩌면 질병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의 취약성이 유전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특히 키나 지능처럼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는 복잡한 형질은 그보다 더 많은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얼마나, 어떻게 받을지를 결정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전도 환경도 중요하다는 것이야말로 유전이냐 환경이냐 하는 오래된 질문의 시시한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