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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ee Dec 20. 2023

ep.7 [멕시코] 잃어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멕시코의 산미겔 데 아옌데에서


ep7.

잃어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과나후아토에서 2일 차의 밤. 어둠이 동네를 누르기 직전, 돌아온 호스텔에는 어제보다 더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아싸!!!! 오늘 나 혼자닥!!!!!!!

얼마 만에 혼자 쓰는 방인가. 시원하게 혼잣말을 내지르며 나의 발끝까지 커튼으로 뒤 감쌌던 어제와 달리 커튼을 활짝 열고 노래를 흥얼거리 다리를 꼬운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과나후아토는 딱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것 같아

오랜만에 마주했던 소도시는 역시나 내 취향이었고 속 썩이는 멀미 대신 두 발로 편안하게 거리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두 다리만으로 이 작은 동네를 다 누린 만큼 이만할 때 떠난다면 더 있다고 싶다는 아쉬움도 괜히 하루를 더 머물렀나 싶은 지루함도 없음을 직감해 본다. 다음 동네는 어디로 가지? 과나후아토랑 비슷하지만 더 자그마한 동네, 산미겔?? 지금보다 더 크고 분위기가 다른 도시인, 과달라하라?? 아님 다시 멕시코시티??


오른쪽으로 가면 멕시티랑 가까워지고, 왼쪽으로 가면 멕시티와 멀어져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앞이 까마득해진 나는 큰 고민 없이 산미겔로 정하였다. 하늘 아래 같은 장소는 없다고, 산미겔도 과나후아토랑 다른 무언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졸린 눈을 꿈속의 세계로 뒤엎었다.

.

.

.



으 오늘은 더럽게 피곤한 아침이다. 멕시코 있는 내내 밤 10시면 잤던 내가 버스 티켓을 온라인으로 예매하겠다고 온갖 씨름을 하다가 12시 넘어 잠들었다.(온라인으로 예매하면 10% 할인이 되었다) 결제 단계에서 카드가 계속 튕겨 아무런 수익도 얻지 못한 채 카메라, 백팩, 힙색이 주렁주렁 달린 몸만 무거운 채로 버스터미널로 향하였다. 떠나는 길 역시 이곳을 찾아왔던 길처럼 뚱뚱하고 귀여운 갈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정류장 표지 그런 친절함 따윈 없었기에 이틀 전 내렸던 곳으로 다시 향한 후 현지사람들에게 물어 헤매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온갖 짐들로 인해 뚱뚱해진 몸으로 찾은 매표소에는 다행히 널널한 잔여석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산미겔까지는 딱 1시간만 가면 된다. 심지어 멕시코시티와 가까지니 멕시코시티로 돌아갈 때도 4시간 밖에 안 걸린다! 고작 1시간이지만 무려 1시간이나 짧은 거리에 마음이 편해진 나는 과나후아토로 향한 버스에서와 달리 어깨에 걸린 카메라 벗어재 끼고 무거운 백팩도 내 품에서 바닥으로 내던져 놓았다.


평소보다 잠을  잔 탓에 눈을 감자마자 뜨니 바로 산미겔에 도착하였다. 눈을 뜨면 도착하는 매직~ 피곤할 때 내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마술이다.


안냐하세요 재간둥이 후플푸푸 출신임다


와 여긴 진짜 시골이구나

익스미낄판, 과나후아토, 지금껏 3~5시간 떨어지는 지역들을 다니며 농사짓는 동네를 본 적은 있다만 이곳은 정말 시골냄새나는 농장의 풍경이 줄지어 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 마을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자그마한 마을산미겔 데 아옌데가 있었다. 눈 뜬 채로 10분을 더 달려 어제의 동네보다 더 작은 이 동네에 다다를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처음 보는 풍경에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사람들이 우수수 버스 밖으로 나가자 나 또한 사람들의 템포를 맞춰 급하게 가방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일은 무조건 멕시코시티로 돌아가야 하니 버스티켓을 미리 끊고 가야겠다. 어차피 온라인 티켓 예매도 안 되는 걸 흑흑. 어딘가 한결 가벼운 몸으로 15분간 줄을 기다려 내일의 티켓을 끊고 이번에는 과나후아토에서 달리 아주 차분한 자태로 보라색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어제보다 사이즈가 커진 버스

점점 좁아지는 골목과 점점 작아지는 건물들. 그리고 점점 위로 올라가는 언덕까지. 과나후아토랑 비슷할 줄 알고 기대를 안 했는데 직접 와봐야만이 느낄 수 있는 '다름'에 희열감을 느끼며 편안하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의 따가운 빛이 내 머리에 내리 꽂혔다.


무야 누가 내 머리는 치는 거야
뭐야. 왜케 몸이 가볍지? 어깨가 아까보다 많이 가벼워졌는데??


어쩌면 나는 여행에서 카메라와 어떠한 연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럽에서 한 번. 이곳에서 한 번. 그렇다. 지금 나의 몸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잠만 내 데이터
난 조용한 여행을 못 참지
어쩜 이리 정말 한 번을 사고를 안칠 수 있을까흐글긓ㄹㄱ...

하도 주렁주렁 온몸에 이것저것을 다 매고 다녀 솔직히 한 개 정도는 잃어버릴 거 예상했다. 그게 카메라 일 줄 몰랐지만;;(물병 정도일 줄 알았) 이전 여행들에서 화려한 전력으로 인해 캐리어에 핸드폰을 1개 더 가져왔었다. 더불어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노트북, 카메라, 핸드폰 데이터를 전부 백업해 놓았다. 매번 우당탕ㅌㅇ 흐물흐물한 여행을 한만큼. 그니까 이런 일이 매번 있었던 만큼 미리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여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은 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음의 안식과 함께 바로 다시 무언의 빛이 나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잃어버려도 그만인 골동품 카메라는 됐고, 잠만 나 과나후아토 사진 안 옮겼는데??????


과나후아토에서 정말 맘에 드는 사진들을 많이 건졌었는데, 어제 버스예매로 정신이 다 쏠려 데이터 정리를 하나도 안 했었다... 우하하하갛ㄱ 아니 잠만 멕시티 센트롤 사진도 안 옮겨놨잖아?????


웃는 거또..우는 거또... 아무거또... 아넵니,ㄷㅏ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요... 엎어진 물은 이미 엎어진 것이니... 머리를 쥐어뜯다 공허한 눈동자로 창밖을 아련히 쳐다보았다. 창문에 비친 멕시코시티 센트롤의 사진.. 이미 사라져 버린 사진들의 잔상을 바라보다가 내 품 안에 있는 어떠한 물건의 존재를 깨닫고 큰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나의 맥부기가 살아있다면 난 됐어!!!!!!

여행 오기 전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친구만큼은 필사적으로 살려내자라고 생각했는데 맥북이 내 품 안에 있지 않는가?? 아마 소매치기 같아 보이진 않고 아까 버스 안에서 부리나케 나오면서 놓고 온 것 같다. 혹시 모르니 내일 떠나기 전 버스터미널의 직원에게 물어보겠지만, 이곳에서라면 못 찾을 확률 99%를 확신한다. 떠나간 것은 이미 떠나간 것이다. 잃어버린 데이터는 본국에 가서도 다시 아른거리겠지만, 카메라는 잃어버려도 그만인 골동품이었으니,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만은 지켰으니, 후회와 자책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아니지 잠만, 무엇보다 이거 이거 완전 이야깃거리잖아?


브런치, 인스타그램, 뉴스레터... 여행 콘텐츠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여행 콘텐츠로 단 1푼도 못 버는 자칭 여행이야기 작가님께서 에피소드가 생겼다고 울상대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정도면 평소에 도파민이 부족했거나 아님 미친 게 분명하다.


암만생각해도 엉망진창 내 여행 짱재밌

통보 없이 하루 먼저 떠난 비행기를 놓치고 베니스에서 눈물콧물 맛있게 먹었던 이전에 나는 어디 갔고 버스에서 내림과 동시에 카메라의 존재를 아예 잊은 채 고개를 들어 이제야 마주하는 산미겔 아옌데 풍경에 집중해 보았다.


멕시티에 있을 때만 해도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다. 과나후아토에서 3일을 머물거나 과나후아토가 별로면 멕시티로 바로 가는 방안을 생각하였었다. 만족스러웠던 과나후아토를 지나오면서 소도시에는 더 머물고 싶은데 새로운 곳을 누비고 싶었던 욕구의 발현은 즉흥적으로 이곳을 데려다주었다. 올까 말까 고민했던 과거의 생각들이 전혀 쓸모없게 해 주었다.


뭐야.. 여기 쿠바 트리니다드 길 생각나잖아...

내 인생 여행지 그리고 내 최애 도시인 쿠바 트리니다드의 분위기가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그리운 그곳의 분위기를 멕시코만의 분위기로 엇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니.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이곳의 온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사진 대신 영상을 찍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핸드폰이 카메라보다 화질이 좋지 않다 보니 차선으로 영상 촬영에 손이 갔다. 어깨를 무겁게 했던 카메라 대신 가벼운 두 손으로 이전보다 더 생생한 현장을 자연스레 담으며 이전까지 몰랐던 새로운 재미를 얻어가게 되었다.


영상을 올리고 싶은데 브런치는 세로 영상이 안되네유...흑흑

*릴스(영상)은 @eye.know_ears.nose 여행 계정으로 봐주세요-!



오늘의 호스텔은 어제보다 더 저렴하고 그래서 더 환경은 좋지 않은 곳으로 향하였다. 아무렴 조식도 주고 위치도 좋으니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이다.


대박 친절한 호스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화려한 멕시코 장식들을 지나 방으로 향하였다. 장식 때문인 것인가 흘러나오는 노래 때문인 것일까 과나후아토에서 묵은 호스텔과 달리 활기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쉬지 않고 들러오며 서로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 숙소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든다.


이번에도 우연은 지속되었다. 같은 방에 동양인 여자가 있다니!! 암만 봐도 한국인 같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반갑다. 아이패드로 열중하며 보는 영화를 끊어낼 용기까진 없어 가벼운 인사만을 건네었다.


커튼 그런 건 당연히 엄서요 이불은 담요 뭐시기..

오늘의 점심은 타코 업그레이드 버전을 함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더불어 해산물 전문인 곳이니 나의 입맛을 만족시킬 거라 믿으며 짐을 내려놓고 바로 식당으로 향하였다.


오늘도 날이 좋아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앉자마자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밑반찬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생긴 건 무같은데.. 빨간 고춧가루.. 너 또 있니??


뭐야 너 왜 중독성 있어

한 두 개 먹다 보니 생무가 맞았고 이거 중독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게 뭔 조합일까 싶었는데 앞뒤로 사람들이 빨간 무 무침을 그릇 비우며 먹는 걸 보면 분명 묘한 매력이 있는 녀석임은 분명하다.


일반 타코집과 특이하게 이곳은 요리가 좀 오래 걸렸다. 내 왼쪽으로는 유럽인으로 보이는 모녀가 우아하게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였고, 내 오른쪽으로는 미국인으로 보이는 20대 남자무리들이 제로 콜라를 꼴깍꼴깍 비운다운 식탁에 엎어져 있거나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양옆의 이질적인 상황에 웃참하며 음식을 기다렸다.


그냥 있어도 분위기가 장난 없었던 곳

양옆의 재미난 구경거리와 맑은 날씨덕에 시간은 금방 흘렀다. 나의 픽은 문어타코와 생선타코, 그리고 타코 피는 나쵸였다. 처음 먹어보는 타코에 기대해서 한입 먹었는데...


비주얼이 좋다구여?? 아니 자세히 봐바요
오이 네이놈의 식히

오이가 눈치 없게 왜 있는 거죠..? 처음에는 셀러리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한 입 베어 먹자마자 코를 찌르는 오이공격에 그만 져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오이 없는 문어타코마저도 영 맛이 별로였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맛없었던 식사였다. 편식쟁이는 돈 앞에서 굴복하지 못하고 힘겹게 오이를 골라 어쩌저째 해치우긴 했다...


오이를 고르는 게임에 열중한 탓에 아주 느긋한 점심식사를 마치었다. 이젠 어딜 돌아봐야 하나 생각을 돌리기도 전에 빗방울이 하나 둘 세엣!!!!!!!!!


아까 식당에서 일어났을 때 먹구름이 슬금슬금 올라와 직원이 호다닥 테라스의 천막을 내리는 걸 보긴 했는데 이렇게나 빨리요..?


잠..잠시만요

지역의 날씨 특성까지 거스르지 못한 채 자칭 날씨요정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다. 굵은 빗줄기가 나의 등을 따갑게 내리친다. 골목 한가운데 있었던 나는 급하게 작은 지붕이 나와있는 좁은 건물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맞은편에 나와 같이 간신히 비를 피한 현지인과 마주쳤다. 그리고 몇 십분 기다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빗줄기도 뒤에 들려오는 소리도 전보다는 얇아진 것 같다. 멈춰 섰던 현지인이 빗줄기 속으로 달려들자마자 나도 뒤따라 그 속으로 합류하였다.


다행히 숙소가 근방이라 많이 젖지는 않았다. 이거 이거 오늘 이러다가 산미겔 구경도 못해보고 가는 건 아닐련지.. 뭔가 시작부터 꼬이는 게 많아 보인다만 나는 그 꼬임에 무심한 듯 머리에 묻힌 빗방울을 털어내고 한국에 보내야 할 업무를 하며 호스텔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로비 가는 길에 갑분 이름 남기기

로비에 켄드릭라마의 노래가 빵빵하게 나오다니.. 이 호스텔 완전 합격이다. 근데 비는 금방 그칠까? 건물을 울리는 음악 소리에 가려져 비의 그침을 알 수가 없어 노트북을 들어 올리기 직전, 내리는 빗줄기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대문으로 나섰다.


어?????????? 언니???!!!!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오늘 아침, 똘란똥고 여정과 과나후아토의 마지막 밤을 함께 해준 언니가 산미겔로 올 예정이라 하였다. 반복되었던 만남은 우연 같아 보였지만, 나도 언니도 그 누구도 일부로 의도한 여정길은 아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자들끼리 템포가 비슷해질 때가 잦다. (쿠바에서도 여행자들을 지속해서 우연히 만나다 보니 친해져 버렸었다.)


같은 숙소에서 지낼 거라고, 그리고 생각보다 이르게 볼 거라도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 반갑잖악!!!!!

심지어 직원이 안내해 준 방은 다름 아님 내가 묵고 있던 방이었다. 정말 예상치 못하게 같은 숙소, 같은 방을 묵게 되었다니.. 너무 좋쟈냐...흑흑


반가움의 인사를 마치고 언니는 비에 젖은 몸을 씻겨내러, 나는 마저 작업을 하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 노을이 지기 직전 비도 드디어 저물었다. 아득한 밤이 찾아오려 할 때 사라진 비소식과 함께 허기진 배도 배고픔을 알렸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가득 차니 밤거리로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기 직전, 명화 같았던 하늘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츄로스집이다. 츄로스 하면 스페인과 멕시코가 가장 유명하다.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먹는 츄러스가 멕시코 츄러스라고 보면 된다. 나름 유명한 간식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츄러스를 먹어보지 못하여 선택의 여지도 없이 이곳으로 향하였다.


이미 해가 졌으니 사람들 별로 없겠지??

먹는 거에 있어서 오늘도 오만한 나는 기다란 줄을 보고 식겁하였다. 줄 기다리는 거 못 참지만 오늘 츄러스를 못 먹는 게 더 못 참겠다.


츄러스 내놔

다행히 테이크아웃은 대기가 거의 없어 식당에서 먹는 걸 포기하고 바로 앞 광장의 벤치에 걸터앉아 뜨근하고 바삭한 츄러스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냠 츄러스는 5~6개 정도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공원 벤치에서 이야기를 하는 걸 참 좋아한다. 한정적인 공간에서 한정적인 시야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보다, 넓은 공간 속의 어느 모퉁이에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바뀌는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그쳐 흘러가는 소음에 불가한 벤치에서는 이전 공간과 다른 이야기가 오가게 된다.


오늘 비 왔지만 노을이 예쁘니 봐주겠다

츄러스를 비우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츄러스로 저녁을 끝낼 수 없었던 우리는 광장 앞에 있는 인기만점 노상타코집의 냄새에 못 이기고 타코를 하나씩 주문하였다. 줄을 서기도 전, 메뉴가 워낙 많길래 메뉴판을 찍어놓고 와이파이가 되는 츄로스가게 앞으로 가서 구글 번역기 돌리고 왔다 갔다 혼자 난리도 아니었다. 암만 봐도 데이터 없이 공짜 와이파이만으로 쥴라게 잘 사는 것 같다.


노력 끝에 얻어진 소세지타코

여기.. 맛집인 게 분명하다. 늘어진 줄은 물론이고 아주머니는 주문받고, 청년 2명 중 한 명은 타코피를 굽고, 한 명은 고기를 써는데 분업화가 장난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먹어치워버리고 싶었지만, 호스텔 루프탑에서 맥주와 타코를 먹으며 아쉬웠던 하루를 달래기 위해 지금은 아껴두기로 한다.


편의점을 들리고 여유롭게 호스텔로 돌아갈 때였다. 오늘따라 하늘은 심기가 많이 불편한 건지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밤하늘 속 흩어진 구름을 소집하여 먹구름을 만들어 내였다. 그릉그릉 밤이니까, 사람들이 하늘을 못 올려다볼 테니까, 너무 놀라지 않게 천둥과 번개를 먼저 쳐줘야겠다. 우르르쾅콰ㅇㅇ!!!!


어..?! 뭐야!!!!!!!!!

그래, 바로 지금이야!!!


오늘만 두 번째, 아까보다 더 두꺼운 비가 쏴악 내리친다. 언니와 나는 이 맛난 타코가 젖을까 봐 동시에 머리 대신 타코를 손으로 가렸다. '이것도 다 추억이야' 웃음을 흩날리고 타코 대신 온몸으로 비를 맞아가며 호스텔로 달려갔다.


너에게 난~ 해질녘 타코처럼~~

쳐벅쳐벅. 오후 때와 다른 말미잘 같은 몰골로 호스텔에 들어왔다.

뒤를 다시 돌아보니 이번에는 화가 난 듯 엄청난 빗줄기가 땅을 내려친다. 하늘에서 구멍이 뚫긴 게 분명하다.


물줄기가 진짜 골때림

배수구에서 골 때리게 쏟아지는 물줄기는 경사진 골목으로 내리치며 기다란 물줄기가 하염없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 호스텔의 건물 구조가 꽤나 특이하였는데, 방들이 있는 2층과 2층으로 가는 계단 사이가 외부 공간이어서 복도가 빗물로 흥건해지고 웅덩이가 져 있었다. 잠시 비가 달래지기 전까지 방에 들어가지도 씻을 수도 없었다. 지금의 선택은 1층 로비와 천장이 쳐진 루프탑뿐이다.


빗물 젖은 타코
루프탑에서 타코 먹다 보면 빗줄기도 수그러지겠지 뭐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번개와 우르릉쾅쾅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고 포효하는 천둥소리, 그리고 하염없이 내리치는 물줄기들을 바라보며 먹었던 물에 젖은 타코는 멕시코에서 먹었던 그 어떤 타코들보다 가장 맛있었다. 이 맛을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

.

.





epilogue.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행에서 삶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참 많다.

애정하는 물건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도, 쓸모없던 물건도, 있으나마나 했던 관계도.

있으나마나 하는 것들에는 잃어버려도 그만이지만, 사랑이 많이 담긴 대상의 잃어버림은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잃어버리는 일은 한순간이다.

잃어버림의 실수 또한, 한 순간이다.

때론 그 미련을 내가 놓으면 그만이지만, 때론 한 번의 잃어버림으로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고난을 맞이할 때도 있으니 쉽지만은 않은 문제다.


[루드비크]
그것은 오로지 내복수를 무(無)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던 모든 것을 안갯속에 흩어지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345p-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여기에서 멀리, 여기에서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멀리 떠나는 것, 이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는 것. (...) 나는 내 복수의 이 참담한 실패에 숨이 막혔고 적어도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476p-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483p, 밀란 쿤데라 <농담>-

소설 주인공, 루드비크는 엽서에 적은 농담 하나로 모든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꼬임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선택 매 순간 스스로를 조급하게 뒤흔들어 놓는 원인이 되어주었다. 그의 인생은 농담을 한 전과 후로 나뉠 정도 깔끔하게 나누어지며 이 뜻은 단조롭기 짝이 없는 인생이라는 걸, 모든 연결고리가 완벽하게 엉켜 풀어지지 않게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가장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조급하게 판단함의 문제.

우연한 만남으로 과거에 대한 들끓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복수의 불씨를 키운 문제.

계획한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아무에게도 의미 없었던 화력임에 좌절하며 이 모든 농담과 얽힌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칼날의 말로 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문제.


한없이 가벼운 인생. 단단히 쌓아놓은 시간이 한 번에 부서져 내 손에 가루조차 잡히지 않는 인생.

한 번의 실수로 눈덩이처럼 커지는 고난 확산력이 생기는 인생.

수없이 반복되는 그리고 새롭게 발현되는 잃어버림을 그저 허무하게만 바라보라는 뜻으로 이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니다.


[코스트카]
하마터면 우리는 서로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러다 서로를 알아보고 나서는 우리의 운명이 그렇게 일치한 데 대해 놀랐다.
-402p-

당신은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지요. (...)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깐요. 루드비크,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392p, 밀란쿤데라 <농담>-

원인은 달랐지만, 결과는 동일하게 이방인이 되어버린 루드비크와 그의 친구, 코스트카.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찾아온 사회주의와 계속되어 바뀌는 세대의 이데올로기에 그들은 속하고 있던 대학 당원에 쫓겨나게 되었다.(명백히 말하면, 루드비크는 쫓겨나고 코스트카는 제 발로 나갔지만) 대학 교수가 될 수 있던 자리에서 루드비크는 광부, 코스트카는 벽돌공 되었다. 아니,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명은 주어진 환경 속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달랐으며, 다른 시간대에 동일한 여자를 사랑하였지만 사랑의 방식과 그 결괏값조차 달랐다. 이방인이 되었지만 그의 넓은 마음을 인정받고 산 코스트카. 이방인이 되고 그 속에서 또 이방인이 된 루드비크. 자신이 진정 사랑한 여자가 먼저 마음을 열게 한 코스트카. 자신이 진정 사랑한 여자가 마음을 열었지만, 그 끝내 도망치게 만든 루드비크.


코스트카라고 그 끝의 결과가 '행복'은 아니었다. 그도 사랑을 버리고 도덕적 신념을 지킨 자신의 행동을 위선적이라 생각하며 끝내 후회하였다. 루드비크라고 그 끝의 결과 '불행' 또한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모든 삶으로 엮어진 [농담으로 일궈진 삶]을 드디어 내다 던지고, 이전 자유자재의 가락의 연주 대신 자유로운 입으로 욕 놀음을 하며 녹슬게 한 클라리넷을 다시 들고 민속음악 대원 합류하여 자신의 삶에서 두 번째로 모멸감의 순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루드비크]
나를 나 밖의 어디론가 데려가고 그래서 마음에 위안을 가져다주는 음악만을 머릿속에 들여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519p-

어떤 뜨거운 연대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고, 이 쓰라린 하루의 끝무렵에 나를 구해주러 온 이 감정을 감사하게 맞이했다.
-524p, 밀란쿤데라 <농담>-


나는 잃어버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2018년의 유럽 여행에서의 나는 루드비크였다.

잃어버림에 대한 자책과 분노.

그것에 대한 메여있음.

그것을 내려놓은 이후에 찾아온 평온함.


2023년의 멕시코 여행에서의 나는 코스트카였다.

잃어버림에 대한 빠른 받아들임.

잃어버림 삶 속에서 새로운 재미의 발견.

여행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느낀 잃어버린 데이터에 대한 아쉬움.


다시 강조하여, 루드비크도 코스트카도 후회가 없는 삶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받아들임'을 마음에 들여보낸 이후엔 '잃어버림'에 차가운 자책과 후회 대신 '받아들임'의 평온함과 눈에 보이지 않았던 뜨거운 연대만이 자리 잡혔다. 


잃어버리고 나서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의 소중함을 생각해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아니,


받아들이고 나서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의 소중함을 생각해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밀란쿤데라가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허무주의에서도 그 끝의 결과는 결국 '받아들임'이었다.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능력이 미숙했다면,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호들갑을 떨면서 즐겨야 할 것이 풍족한 것에서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즐겨야 할 것들을 다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멕시코 여정에만 2번의 잃어버림이 있었고, 지금도 나도 모르게 잃어버리고 있는 물건과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 그치만 20살 초반 때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자책과 실망감으로 '허무함'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잃어버림을 깨달았을 때 잠시동안 아픔에 적셔 일어나지도 못할 때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조금씩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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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6월부터 로컬 여행자의 여정기를 소개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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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성이 아닌 '이야기'를 중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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