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가 소란하다. 이른 아침 5월 햇살이 땅에 밀도를 높이기 전에 서둘러 백일홍 밭에 핀 명아주를 뽑고 있었다. 햇살이 내 손놀림과 대결하듯 땅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낮에 땅이 더 단단한 건 태양의 땅살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태양은 땅과 한몸살이를 하면서 생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고루 자신을 나눠준다. 그래서 태양이 강한 오후의 땅은 뿌리로 대동단결한 들풀의 하나 된 마음처럼 단단함을 넘어 거북이 등보다 더 딱딱하다.
그땐 풀을 뽑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뽑는 힘보다 지키는 힘이 강하기에 풀은 끊어지고 만다. 그런 풀의 뿌리는 더 애틋하게 땅과 한 몸이 되어 더 튼실한 줄기를 올린다.
그래서 태양이 땅에 몸을 풀기 전에 풀을 뽑아야 한다. 그러면 태양의 빈자리를 아는 풀들도 뿌리에 힘을 빼고 순순히 땅과의 작별을 고한다.
그런데 이 또한 인간의 이기적 선택에 의한 살인이다. 명아주를 비롯한 풀들이 먼저 그곳에 자리를 하고 있었고, 백일홍이 그 자리를 침범한 것이 사실이다. 땅의 질서를 무너뜨린 것은 인간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쓰임이 있을진대 그 쓰임의 기준을 인간에 맞춘 것 또한 인간이다.
대상을 대해는 인간의 태도는 이분법이다. 그것은 환영과 멸시다. 환영을 받으면 살 것이요, 멸시를 받으면 제거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닌 인간의 이치다.
자연이 질서를 잃어 가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이치에 의해 심하게 간섭을 받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면 백일홍 씨를 뿌린 것부터 잘못이었다. 꽃밭을 만들겠다는 마음은 욕심이었다. 그 욕심은 이기적 책임감을 만들었고, 매일 아침 명아주를 비롯한 백일홍 아닌 생명들의 어린싹들이 숙청되었다. 그중에는 아직 도토리에 싸인 참나무 새싹도 있었다.
<도토리에서 줄기를 낸 참나무>
이마에 땀이 길을 낼 정도로 풀과의 전쟁에 한창이다가 소란한 소리를 따라 올려다본 대나무 밭에서 나는 그만 나를 놓아버렸다. 그곳에는 붉은 눈을 한 무언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자세히 보니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손은 시치미를 떼듯 들고 있던 호미를 빠르게 놓았다. 순간 땅에서는 안도의 숨소리가 들렸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그 붉은빛 쪽으로 갔다. 그 빛에 가까이 갈수록 고개는 땅과 수평을 이루었다. 더 이상 고개가 넘어갈 각도를 잃었을 때 그것이 장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다. 장미였다. 키를 키울 대로 키운 대나무의 높이는 엄청 높았다. 그 꼭대기에 장미가 피어 있었다.
장미는 마치 대나무 잎들에 쌓인 꽃다발 같았다. 놀라웠다. 대나무 밭에 장미 나무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은 장미가 키워 올린 경이로운 자연의 생명력은 그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대나무의 배려와 장미의 양심은 인간이 결고 만들어 낼 수 없는 고귀한 자연만의 가치임을 확실히 느꼈다.
대나무는 장미가 키를 키울 수 있도록 서로를 엮어 함께 하늘로 가는 길을 내어주었다. 장미는 절대 대나무를 앞지르지 않았다. 장미는 향기로 가시에서 날카로움을 지웠다. 대나무와 장미는 진정한 상생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었다.
대나무에 핀 장미 이야기를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장미가 하늘로 이사를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기에! 물론 땅 가까이에 핀 장미도 많지만, 편하고 쉬운 것을 포기하고 하늘 높은 대나무 끝에서 꽃을 피울 수밖에 만든 그 상황을 너무 잘 알기에!
본질을 벗어난 것들이 덕지덕지 붙은 이 나라 학교의 교육을 보면서 정원을 생각한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자연을 잃은 학교라는 더 큰 모순에 그래도 자연을 담기 위해 정원을 생각한다. 그 생각에 대나무와 장미의 생각을 더 한다. 그 생각의 배경에는 소박함과 단순함이 있음을 6월을 건너는 바람이 말해주었다.
말뿐인 학교 공간 혁신이 아닌 정말 학생과 교육을 살리는 진정한 학교 공간 혁신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 방법으로 학교 정원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