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세 철학이 곧 가톨릭 신학의 이성적 해석이라는 점,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1원인론을 통해 신앙과 이성을 결합하려고 했던 노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중세 철학은 ‘신’이라는 절대적 기준점 아래에서 이루어진 탐구였지만, 동시에 서양 지성사의 맥락에서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유 전통을 이어가려 한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이번에는 중세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논쟁이었던 보편자(universals) 논쟁과 이를 더욱 간결하게 정리해낸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을 통해 중세 철학이 어떠한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중세 신학자·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기독교 교리와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이때 큰 쟁점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보편적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이름에 불과한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성’, ‘빨간색’, ‘선함’과 같은 추상적 보편 개념이 실제로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지, 우리 정신이 붙여놓은 이름이나 개념적 틀에 지나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보편자 논쟁은 단순히 사소한 말싸움이 아니라 ‘존재’와 ‘언어’, ‘인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신이 창조한 세계가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신학적 전제 아래, 그 질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개별 사물과 이를 묶는 추상 개념)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작동 하는지를 두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깊이 있는 토론을 벌였습니다.
보편 실재론 플라톤적인 전통을 잇는 입장입니다. ‘보편자’가 개별 사물에 앞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인간성’이라는 보편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고, 개별 인간은 그 보편적 ‘인간성’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구체적 사례라고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보편자’를 어느 정도 실체화함으로써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려고 했습니다.
보편 유명론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 정신이 붙여놓은 이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실재하는 것은 개별적 존재들뿐이며, 보편 개념은 인식 편의를 위한 언어적 도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입장은 ‘보편자’를 굳이 초월적 실체로 설정하지 않아도, 각 개별자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중세 말기 철학에서 점점 힘을 얻어 갔습니다.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 1287~1347)은 중세 후기 보편 유명론을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그는 기존 스콜라 철학이 때때로 불필요한 개념들을 지나치게 많이 도입한다고 비판했고, "불필요하게 실체(존재자)를 늘리지 말라”는 원칙, ‘오컴의 면도날’을 제시했습니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영어 표현으로는 “Entities should not be multiplied beyond necessity.” 어떠한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만을 가정하고, 불필요한 개념적·존재론적 가정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지침입니다. 이는 신학·철학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 이론 구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컴은 이런 방식으로 신학에서도 “꼭 필요한 전제만으로 신의 존재나 신앙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지지했습니다. 이는 이전 스콜라 철학자들이 다소 복잡하게 설정해놓은 초월적 개념들을 단순화하고, 그 자리에 인간 이성과 언어의 역할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보편자 논쟁에서 발생한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무엇이며,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이후 근대 철학까지 이어졌습니다. 보편자 논쟁은 단지 스콜라 철학의 내부 싸움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언어철학의 시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화와 간결성을 지향하는 강력한 방법론입니다. 불필요한 가설을 최소화하는 정신은 이후 과학혁명 시기(갈릴레이, 뉴턴 등)에 주류 과학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에도 검증 가능한 이론을 세울 때 활용됩니다.
중세 철학은 종교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철학과 신학을 분리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보편자 논쟁은 중세를 거치며 신을 설명하기 보다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또한 '오캄의 면도날'은 중세 철학의 끝을 불러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세 철학은 끝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근대 철학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철학부터는 어렵습니다. 이론을 깊게 설명하기보다는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한 철학자가 어떻게 흐름을 바꾸어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야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흐름 속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