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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학용 Oct 27. 2020

#3 행복의 조건은 축구공 하나

라다크 하늘 도시의 학교에서 어린 여행자들

 “잠이 안 와 책을 보는데 할머니가 오셨다. I like her!! 할머니는 인상이 참 좋으시다. 왜 자지 않느냐며 책과 나에 대해 물어보셨다. 도란도란… 그 느낌이 참 좋다. 갑자기 전기불이 꺼져 할머니께서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내일은 할머니가 일하시는 학교에 간다. 라다크어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대된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아라)    


레에서의 3일째 아침.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라다크 하늘 도시 레의 시내 한 공립학교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아이들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인 ‘왕모’의 가정집과 부엌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그 덕분이었다. 왕모가 자신이 교사로 있는 학교에 방문해보겠느냐고 제안해준 것이다. 


도보로 20분 거리라면 결코 먼 길이 아니지만, 고산 세계로 날아온 이방인들은 느릿느릿 발을 옮기면서도 숨이 찼다. 그래서였겠지. 골목길이 느릿느릿 이어지다 넉넉하게 꺾어지곤 했는데 바람도 느릿느릿 길 가에 앉은 사람들도 느릿느릿 차를 마시며 그림처럼 소박한 미소를 느릿느릿 나그네에게 보내주는 것 같았다. 


도심에 위치한 학교는 작고 예뻤다. 초, 중, 고등학교가 같이 들어와 있는 학교다. 교문도 담도 없는 학교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우리들을 맞이한 것은 펌프질을 해서 물을 긷는 우물이었다. 그동안 힘쓸 일 없어 심심했던 차에 ‘피 끓는 고딩’ 정호와 문중과 철민이가 학교 선생님을 위해 신나게 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나의 시선은 작은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천상의 학교, 소풍 가는 아이들

키 작은 교실 건물이 ‘ㄱ’ 자로 서있고 그 뒤로 새파란 라다크 하늘이 떠있다. 그 높고 투명한 라다크의 하늘 품에 학교가 폭 안겨있는 듯하다. 마침 그 풍경들을 배경 삼아 초등학생 저학년들이 교사 꽁무니를 따라 종종거리며 걷고 있다. 언젠가 네팔의 초등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천상(天上)의 학교’ 풍경이 저러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도시락 가방을 둘러매고 막 소풍을 떠나는 길이다. 도시락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김밥은 아니겠고, 혹 삶은 달걀 하나쯤 들었을 지도. 

“삼촌, 저것 봐요! 태양계예요~!”


아이들 외침 덕분에 덩달아 소풍을 따라나서려는 내 영혼이 회귀한다. 교실 외벽에는 태양계 행성들이 차례대로 그려져 있다. 한국의 학교 과학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림. 태양계 행성들을 이 높은 곳에서 만난다는 것이 뜻밖이었을까. 아이들은 그 흔한 벽화에 신기해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익숙한 장면들이 때로는 낯설게 다가서기도 하니까. 


우리들은 태양계 행성들을 지나 작고 어두운 교실로 들어갔다. 무슨 사연인지 소풍을 가지 못하고 남은 라다크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있다. 어떤 수업을 하고 있었을까. 선생님은 이방인들을 소개해 주신다. 작고 까만 아이들은 부끄러워 눈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다. 우리 아이들이 먼저 다가간다.

하늘 학교에서 만나는 태양계

“내 이름은 민아, 넌 이름이 뭐야?”

“………………”     

  

“언닌 한국에서 왔어~! 반가워~!”

“히히………”


라다크 아이들이 가랑이 사이에서 하나둘 고개를 빼든다. 살짝살짝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선생님의 독려로 마침내 용기 내어 동요를 부른다. 우리 아이들도 한국 동요로 답가하고, 그러다 이름을 물어보고 배시시 웃다가 어느새 서로 머리를 땋아준다. 이제 아이들은 여기저기 교실을 옮겨 다니며 논다. 발음이 신기해서일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지 중학생 또래까지 합세하여 사진 찍고 이름 부르고 사진 찍고 웃고, 다시 사진 찍고 웃고 이름 부르다, 또 사진 찍다 손을 잡고 깔깔거린다.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들의 ‘사진 찍고 이름 부르기’ 놀이가 언제까지나 끝날 것 같지 않아 부럽기까지 하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에 비하자니 형편없이 낡고 어설픈 학교 시설에 놀라고, 꾀죄죄한 아이들의 행색에도 어색해했던 여행학교 아이들이 어느새 웃는 얼굴로 발갛게 상기되었다. 남자아이들은 정민이가 가져온 새 축구공에 바람을 넣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공을 차고 있다. 궁금하다. 오늘의 이 추억. 이국땅에서의 이 시간들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눈동자에 맑은 세상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러니까 나의 ‘첫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친구와 함께 어느 날 문득 시외버스터미널에 갔었다. 대합실 벽에 그려진 지도를 보며 어디로 갈까, 둘이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렇게 눈으로 짚어보았을 거다. 청학동.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서당에서 머리를 길게 땋은 도령들이 훈장님 앞에 무릎 꿇고 공부하고, 삼베 저고리 입은 아주머니들이 개울가에서 빨래하며 현대 문명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지리산 자락의 마을. 


“하동! 학생 둘이요~.”


친구는 내가 주머니 안의 돈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먼저 그렇게 말했었다. 오늘 안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인지도 미처 따져보기 전에. 그리곤 울산에서 하동까지 그리고 다시 청학동까지 버스를 타고 달렸었다. 그 길이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여행이다. 떠났다는 느낌. 17년 동안 살아왔던 나의 영역 밖으로 나섰다는 느낌. 생각해보면 부모님을 따라 부산 외갓집을 오가던 길과는 분명 달랐었다. 


그날 난 내 삶을 둥그렇게 경계 짓던 투명한 막을 들추어 ‘세상 밖의 세상’을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사실 반나절이 넘게 걸려 도착한 청학동에서 내가 처음 보았던 것은 서당에 달린 현대식 벽시계였고, 그것이 단절의 공간에서 만난 단절되지 않은 현대문명의 상징으로 다가왔지만, 나의 첫 여행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떠났으니까. 내게 익숙하던 하나의 세계를 떠나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있었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하동 길바닥에 앉아 우린 더 이상 차비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즐거웠다. ‘울산시’라고 적힌 크고 하얀 번호판을 단 자동차를 보고 무작정 태워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생애 처음 시도해본 히치하이킹이었던 셈이다. 그날 크고 하얀 번호판은 임시번호판이라는 사실과 그곳에 ‘울산시’라고 적혔다 해서 꼭 울산 소재의 자동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린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마저 또 다른 세계에서 통용되는 어떤 암호 같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세상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게 모든 것이 익숙한 세계와 모든 것이 처음인 세계. 세상 안의 세계와 세상 밖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를 연결하는 오래된 비밀의 문이 여행이라는 사실도. 그러니까, 난 지금 궁금한 거다. 이번 여행이 여행학교 아이들에게 어떤 얼굴의 ‘첫 여행’으로 기억될까, 하는.      


“삼촌, 애기들이 너~무 귀여워요!”

“행복해 보여요!”


라다크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은 귀여운 모양이다. 그들 눈에도 이곳 아이들이 순박해 보이나 보다. 무엇이든 부족해만 보이는 이곳 아이들이 그들 마음에도 행복하게 비치나 보다. 


여행을 하다 보면 행복의 조건이란 것이 그리 크거나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어떤 능력이 없더라도, 어떤 사람이 되어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깨우치곤 한다. 훗날 여행학교 아이들도 일상이 힘겹다고 느낄 때마다 라다크의 어느 학교에서 파랗고 투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만났던 어린 친구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리하여 행복의 조건에 대해 다시 헤아려볼 수 있기를.  

행복의 조건은 단지 축구공 하나

우리들은 한국에서 작은 선물을 5개씩 준비해왔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친구와 헤어질 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정민이는 축구공 5개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에 우리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우정의 선물로 남겨두기로 했다. 축구 지도자가 꿈인 정민에게는 축구공을 나눠주는 것이 꿈을 나누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여행자의 길로 들어선 여행학교 아이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친구로 다가서는 법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6살, 7살 아이들 반에 갔다. 처음에는 우리를 신기해하고 피했는데 나중에는 노래도 불러주고 율동도 했다. 아이들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다 귀여운 것 같다. 그리고 11살 반에 가서 같이 사진도 찍고 놀았다. 내 이름이 쉬워서 아이들이 내 이름을 계속 불러줬다. 한 아이가 “Mina~ Beautiful!!”했는데 표정관리가 안 됐다. ㅋㅋㅋㅋ.”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민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들도 많았고 예쁜 학교였다.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고 우리들의 이름이 써져있는 축구공을 선물하였다. 아이들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정호)    

 

“아이들 눈이 진짜 예뻤다. 이 아이들은 우리들을 어떤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었을까? 내가 낯설어서 먼저 다가가지 못할 때도 이름을 먼저 물어봐주고 인사를 먼저 해주는 것이 감사하다. (헤어질 때) 우릴 향해 끝까지 인사하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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