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50분 거리의 여고로 진학한 첫 주는 꽤 피곤하고 힘들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인 시각에 나와 버스를 타고 군에서 시로 통학해야 하는 게 왠지 서러웠다. 지금도 한 시간 이상의 거리를 가야 한다면 전 날부터 마음이 무거운 걸로 보아 이동력이 좋은 사람은 아닌가 보다. 장거리 통학이 한 달쯤 되었는데도 적응을 못하고 있을 때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는 2학년 언니들이 쉬는 시간마다 교실로 찾아왔다. 언니들은 아직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1학년의 휴게시간을 순식간에 차지하고 자신들이 가꿔나가고 있는 동아리를 소개했다.
우주단은 우주비행이 생각나고 비행청소년이 연상되니까 탈락. 문학동아리는 언니들이 죄다 안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력 저하를 가져올 것 같으니 탈락. 신문방송동아리는 관심이 있었으나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에 자신 있는 친구들을 모집한다고 했으니 자체 심사에서 이미 탈락. 어쩌면 처음부터 영화클럽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으니 영화가 가장 무난했고 같은 이유로 중학교 특별활동시간에도 나는 영화 감상반이었다.
인기 있는 동아리는 부원들도 덩달아 자신감 있어 보였고 목소리도 높은 톤이었다. 며칠간의 경험이 쌓여 언니들의 목청만으로도 인기 있는 동아리인지 존폐위기에 빠진 동아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언니들은 점심시간이 막 끝나갈 무렵 우리 반 교실로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10분 남았을 땐 분주할 수밖에 없다. 이제야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가는 친구들이 태반이었고 여고 생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등나무 벤치에서 수다 겸 비타민 디를 흡수 하다가 종이 울리기 직전에 들어오기도 했다. 심지어 그날은 점심시간 다음이 체육시간이었기 때문에 체육복으로 갈아입거나 빌리러 옆 반에 가는 등 소란도 그런 소란이 없는 와중에 언니들이 왔다. 언니들은 줄여 입지 않은 교복차림에서 모범생 같은 느낌이 들었고 목소리는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체육복 갈아입는 소리에 묻힐 만큼 작았다. 영화클럽으로 이미 마음을 정했기에 언니들이 민망해하지 않을 정도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은근슬쩍 운동장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언니들은 ILT라고 했다. 이름부터가 귀에 박히지 않는다. 아이 러브 티의 약자라고 한다. 하... 대단히 촌스럽다. 21세기에 아이 러브 목적어의 구조라니. 티는 또 무어라 말인가. 아이 러브 뉴욕처럼 특정 도시에 대한 애정을 담은 티셔츠를 만든다는 건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3분 정도의 스피치에 마침표를 찍을 때였다.
"우리 홍차 동아리에 들어온다면 맛있는 홍차를 많이 마실 수 있어!"
아이 러브 티의 목적어는 티셔츠가 아니라 홍차였다. 블랙티!
오 신이시여. 운명이란 것이 이런 건가요. 홍차 왕자의 여주인공 처렁 홍차부의 일원이 되는 것이 저의 운명이란 말씀이신가요. 저의 인생이 이렇게 영화 같아도 되는 것인가요. 신의 부름을 받들겠사옵니다.
준비 체조를 하고 있는 건지 홍차 왕자를 복기하고 있는 건지 모른 채 체육시간이 지나갔고 다음 날 바로 동아리 홍보를 하고 있는 언니들을 찾아가 ILT에 접수했다. 면접이 남긴 했는데 이건 사실 걱정되지 않았다. 10명을 모집했지만 10명이 안될 것이라는 걸 나도 느끼고 아마 언니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감일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건 학생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자세이긴 하지만 어쩐지 괜히 가련한 마음이 들어 같은 버스를 타고 장거리 통학을 하는 친구들을 꾀어서 데리고 갔다. 면접 상황은 생각보다 꽤 진지했다. 차 애호가가 될 자질을 테스트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면접을 본 전원 다 합격한 것으로 보아 역시 열 명이 되지 않았다.) 홍차를 마셔 본 적도 없거니와 차라고 하는 것은 병원에서 대기할 때 마셔본 동서 현미녹차가 전부였지만 홍차 왕자로 쌓은 배경 지식 덕분에 수월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차를 물어봤지, 즐겨 마시는 차를 물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마셔 본 적은 없지만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삼 왕자를 생각하며 맛이 깊고 수색이 짙은 아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ILT활동을 통해 더 많은 차를 접하며 감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자 회장 언니는 상당히 감격한 눈치였다. 홍차 동아리의 부원으로서 홍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ILT덕분에 먼 통학거리를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홍차 동아리를 위해 이 학교에 온 것이니까. 학교는 교육청이 나를 선택한 줄 알겠지만 이것은 나를 홍차 세계에 데뷔시키기 위한 정해진 캐스팅이었던 것이다. 감독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동아리 특별활동 시간에 언니들은 이론과 시음으로 이어지는 질 좋은 수업을 1학년 부원들에게 해주었다. 살면서 카테고리화 하는 능력이 최대치인 시기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때 일 것이다. 언니들은 차의 역사와 문화, 세계 3대 홍차와 대표 산지, 가공방법, 찻잎의 등급, 싱글 오리진과 블렌디드 티에 이어 플레이버드 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인쇄물을 나눠주고 그에 맞는 시음용 차도 준비해 왔다.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언니들이 공부한 방대한 양과 그에 들어간 시간은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졌다. 열정 넘치는 선배의 모습에 감심하지 않을 후배는 없다. 언니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삼색펜으로 최대한 예쁘게 필기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음은 특별하지 않았다. 저렴한 티백을 사용했고 종이컵에 우려 마셨기 때문에 최고의 맛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다르질링과 아삼,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실제로 마주한다는 것은 겨우 종이컵이지만 런던의 애프터눈 티 카페에서 마시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었다.
마트에서 그 홍차 브랜드를 만나면 나를 잘 알고 있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다. 회사에서 유독 실수가 잦아 힘들었던 날 만난 그 친구는 그래도 괜찮다며, 여전히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해주었고 즐거웠던 그 시절의 웃음소리까지 들려주었다.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홍차 상자는 윗 진열장의 신상품보다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친구를 소개해준 ILT와 나를 홍차 세계에 데뷔시켜준 정체모를 감독님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나에게 멋진 밥상을 차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여전히 맛있게 먹고 있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