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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세 칼바도스 Jun 28. 2020

회피형 인간의 처세술

난 가끔 모든 관계로부터 도망치는 상상을 한다.




“그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손절하세요. 당신을 아프게 하는 그 사람을 단호하게 끊어내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저를 끊어낼 수 있으며 저 또한 당신을 언제든지 차단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 관계에서 쉽고 빠르게 차단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가장 만연하고 타당하며 인기 있는 처세술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관계에서 지쳐버렸길래 사람을 끊어내는 행위가 이토록 타당하게 된 것일까요.


저도 가끔 제가 이어온 모든 관계로부터 도망치는 상상을 합니다. 그것을 ‘도망칠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혼자일 때 충만하게 느껴지는 ‘고독감’이 참 좋았는데 어느 날 문득 저에게 찾아온 ‘고립감’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안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관계들을 가차 없이 차단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뒤 돌아봤을 때 주위의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져 더 이상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질 때 찾아온 깊은 고립감은 저를 더 아픈 고통의 늪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과연 관계를 차단하는 일만이 나를 지켜내는 가장 현명한 처세술일까요.


저는 회피형 인간입니다. 여지없이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혼자서 도망치는 상상을 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고 직장을 다니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이럴 때 보면 성향을 떠나서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구축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또 관계는 1차원적으로만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살아온 삶의 방식과 환경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쉽게 회피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뒤따라 갈등의 주인공들이 그 순간을 함께 해소해나가는 기쁨과 따라오는 관계의 깊어짐 또한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분명 기성세대만 해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비록 아픈 인연일지라도 모든 만남을 소중히 끌어안고 살아왔던 것 같은데 ‘자존감’과 ‘행복’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급진적으로 도래하면서 관계의 미학을 쉽게 등져버리는 상황을 우리는 자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굳이 아픈 인연을 억지로 이어나가라는 섣부른 조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당사자들의 성향도 천차만별이기에 그런 강요가 얼토당토 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차단’의 처세술은 더 큰 고립감을 만들어 낼 여지가 있으며 나 또한 언젠가 그 고립감에 무너질 여지가 있는 위험한 태도일 수 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 대신 저는 잠시 거리를 두는 편이 더 적당하고 성숙한 처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오직 ‘악(惡)’으로만 백 퍼센트 이루어진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성향에 맞게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나쁜 의도로 나를 해치기 위한 악역은 극히 소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는 ‘권태기’가 찾아오길 마련이고 거리를 잠시 뒀다가 그 시기가 지나가면 또 다른 형태의 기쁨이 관계에 찾아오곤 합니다.


단지 그 사람이 피곤하고 불편하다고 해서 관계를 계속해서 끊어내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할 수 있으며 사람을 차단함으로써 관계가 더 깊어질 여지를 포기하는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결정일지도 모릅니다. 대신 저는 관계에서 한 발치 떨어져 잠시 거리를 두면 분명 시간이 지나고 한 차원 더 높은 놀라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용기’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존재합니다.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관계에 거리를 두는 용기를 조금씩 낸다면 모두가 안전하게 고립되지 않은 차원에서 삶을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내 삶을 파괴하는 관계를 과감히 차단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필요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차단’보다 ‘거리두기’가 더 필요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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