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 되게 여리고 예민하구나.”
당신은 외향성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받은 상처는 오롯이 저의 잘못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신 말에 의하면 예민한 저의 성격이 그 문제를 초래한 것이지요. 미숙하고 어렸던 저는 당신의 지적에 꼼짝없이 압도당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렇게 당신이 지적한 저의
‘내향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란 듯이 당신의 '둔감함'을 '외향성'이라는 핑계를 대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을 때 저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꼭 풀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자신을 구박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문득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던진 문제는 애초부터 정답이 없었다는 걸.
저는 지금도 '외향성'에 늘 압도당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외향성'을 찬양하고 '내향성'은 가끔 병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을 사회 전반적으로 이미 기정 된 사실로 인정하는 눈치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늘 둘러싸인 ‘인싸(Insider)’를 미디어가 거침없이 찬양하고 화려하게 포장하는 모습을 보면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 개인의 성향에 인기를 부여하는 양상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외향성에 좀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하게 될 여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여전히 내성적이고 내향적 유형의 사람으로서 주체적이고 충만하게 살아가고 싶다면 꼭 알아야 할 외향성의 ‘가스라이팅’이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을 통상 자신을 겉으로 뽐내는 역동적인 문화가 우세적인 ‘외향적 국가’로 분류하고 ‘일본’과 ‘북유럽 국가’를 통상 절제하고 깊게 사려하는 문화가 우세적인
‘내향적 국가’로 분류한다면 외향적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당신은 이미 국가로부터 외향성을 강요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외향성이 우위적인 국가의 학교에서는 ‘내성적인 성향을 고쳐주세요.’ 라며 타고난 성격을 교정할 것을 당당히 요구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사회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주말 계획에 대해 당신에게 물었을 때 집에서 쉴 예정이라고 했을 뿐인데 당신 계획을 슬프다고 한다던지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한다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향성의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 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모습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모두가 똑같아지길 강요합니다. 어쩌면 ‘성격’과 ‘성별’에 대한 분류는 이미 몇 세기 동안 너무 당연시되고 깊게 뿌리 잡고 있어서 우리가 이러한 편견과 가스라이팅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그 순간에 늘 깨어있어서 자신의 성향을 존중해줄 것을 상대에게 당당하게 말한다면 변화는 언제나 시작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각자의 타고난 성향을 마땅히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 당신의 내향성을 부정하게 했다면 저는 언젠가 당신이 당당히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당신과 다르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