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웰레스의 삶을 조명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보고 난 후 처형장면에서 그가 보인 의연함이 인상적이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의 촉발점이 된 그의 저항과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영화 속의 일부 내용은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지만, 그의 처형 장면은 나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장면이었다. 극악무도한 죽음(교수척장분지형)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피하지 않는 이유를 그는 처형 전에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물러서면 더 이상 사는 게 아닙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통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서 그의 결기가 느껴졌다. 죽음조차 아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고통조차 받아들이는 그 힘, 동기는 무엇일까? 그가 죽으면서 외친 ‘자유’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자유를 위해, 구속됨을 불사한다.
구속되지 않고 풀려나면(겉으로의 자유) 실제로 종이 되지만,
구속됨으로(겉으로의 구속) 실제로 자유인이 된다.
흔히, 자유를 말하며 마구잡이식의 삶을 사는 경우가 있고, 특정 종교에서는 용서를 운운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좋은 한 예가 영화 <밀양>의 살인범의 태도이다.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부모에게, 자신의 행위( 유아 유괴 및 살해)가 속죄되었다고 스스로 편안해하는 태도말이다. 이것은 방종의 예이다.
새장 안의 새는 갇혀있다. 그러나 주인이 때가 되면 모이와 물을 준다. 험난한 세상에서 모이와 물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주인의 말을 잘 듣고, 묘기를 보이고, 예쁘게 지저귀면 사랑받으며 맛난 모이를 먹을 수 있고, 꽤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창공을 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거짓 자유이다.
반면, 영화의 장면에 따른다면, 윌리엄 웰레스는 비록 죽었지만, 그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의 집단의 자유를 추구함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자신이 중시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즈음에서 방종, 거짓 자유 아닌 진짜 자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해 본다.
새장을 벗어나는 고통은 쉽지 않다. 영화 속에서 윌리엄도 처형 전에 두려워 떤다. 그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도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히틀러를 살인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갇힌 본회퍼도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고백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옥중에서 많은 글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예수 역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새장에 갇히는 거짓자유가 아닌 진짜 자유를 위해 험난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진정한 자유를 열망함으로 죽음 같은 고통과 함께 그 자유 안에 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서 자유는 멀다. 가까우면서도 멀다. 거짓 자유에 오래 속아왔기 때문에, 진짜 자유를 잘 식별하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표현으로 인간의 노예근성을 폭로한다. 히틀러를 신봉했던 집단은 스스로 파시즘의 지배하에서 자유로부터 도피함으로 거짓자유를 누리려 했다.
진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더 많은 경우 고통이 따른다. 자유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자유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