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강연을 다니다보면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부모들이 물어옵니다. 자녀가 예술 분야로 진로를 정하고 싶어하는데 어떡하면 좋으겠냐고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으니 제게 아주 현명한 답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더라고요. 일단 제가 아는 한 최대로 가리는 것 없이 업계의 현실을 알려드리지마는, 또 너무 완강하게 반대하거나 금지하지는 마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예술계의 실패와 성공이 모두 큰 것은, 그리고 성공 쪽이 훨씬 드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고 영영 그럴 테지요.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절박한 안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술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천천히 스스로를 해치는 것을 제가 얼마나 자주 봤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수준의 자해입니다. 아아, 이 사람 큰일났다, 싶을 땐 늦었고 곁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디다. 큰 회사에 다니고, 가업을 잇고, 대단한 돈을 거머쥐고, 다정한 반려인이나 귀여운 아이들을 얻고 나서도 무언가 안에서 그네들을 갉아먹습니다. 기생충이 먹을 게 없으면 내장을 파고들듯이요. 수집가나 애호가가 되어 욕구를 해소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습니다. 결국 일에도 뜻이 없어지고 주변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저보다 훨씬 가난한 예술가들 곁에서 머물며 소비만 하다가 자기 자신도 소모해버립니다. 주로 술과 도박과 별의별 파괴적인 것들이 끼어들이 소모를 가속시키고요. 차라리 예술을 편히 시작할 수 있었을 나이에 시작했더라면, 그 성취나 결과가 형편없었을지는 몰라도 나았을 겁니다. 물론 언제든 시작할 수 있기야 하지만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예술은 대개 너무 늦지 않게 시작해야 하니까요. 예외적으로 뛰어난 몇 사람이 사십에, 오십에 시작하는 경우에도 진입구 자체는 훌쩍 좁아진 후입니다.
그러니 남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자기 자식이 어떤 성품인지 다 아실 테니 재능의 있고 없고를 떠나,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해칠 것 같습니까? 즐겁게 그리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지,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하는지 관찰하십시오. 특히 후자라면 더더욱 인생의 경로를 대신 그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아이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다른 사람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네, 다른 사람입니다. 부모도 결국 다른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걷어내주시기야 해야겠지만, 가능성이 조금 번쩍대다 마는지 오래 타는지 저가 알아서 확인하도록 두십시오.
-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에서 발췌
저는 컴퓨터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이과반이라고 불리는 과학중점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고요, 전체 공부 시간의 3분의 2는 수학공부에 투자를 했습니다. 저는 제가 예술을 좋아하는지, 문명과 역사와 철학과 인지행동 쪽에 관심이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알아볼 기회야 있었게지마는, 그런 것 따위야 당장의 대학 입시가 더 중요하기에 우선순위가 밀렸거든요.
욕심이 많았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었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고, 왜 그래야만 하는 줄은 몰라도 그저 관성처럼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저 자신을 소모시켰습니다.
운 좋게도 현역으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20살 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하고 나다운지, 사회에서 원하는 게 아닌 진짜 나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방황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방황이라고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일부러 바쁘게 지냈고, 사회에서 보기에는 삐까뻔쩍한 나름의 성취들을 모으면서 공허함을 달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닥 효과는 없었지만요. 지친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좋은 음식이 아닌 불량식품을 입에 넣는 꼴이었습니다. 불량식품인지도 모른 채로 말이죠.
그 상태로 졸업을 했고, 개발직으로 회사에 들어갔고, 뭔가 아닌 것 같아서 퇴사하고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무작정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스타트업의 비개발직 직무를 지원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타트업에서는 여러 직무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으니 제 적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회사는 새로운 사업을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었고, 처음 하는 업무들인데 사수는 없고,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는 일을 도무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회사 초반에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지만, 노력과는 별개로 해당 분야에 재능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말에 회사 오피스를 가면서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Gabriel's Oboe와 Nella Fantasia를 들으면서 버스에 앉아 있었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남들 몰래 눈물을 훔쳤던 것 같습니다. 그 뒤 어릴 때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연주해야만 할 것 같아서 다음 주 주말엔가 바로 ktx를 끊어서 본가에서 바이올린을 가져왔습니다.
다음 충동은 미술이었습니다. 원래 미술관이나 전시회 등을 방문하는 건 좋아했지만, 제가 무엇인가를 그린다거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회사를 다니면서 미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집과 회사 근처 성인미술학원 등을 알아보니 예상했던 것처럼 저렴하지는 않아서 미술을 배우는 걸 잠시 미뤄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너무 그리고 싶어져서 다이소에서 스케치북을, 근처 알파문구점에서 4B 연필과 콩테를 하나씩 구매했습니다. 유튜브를 따라 크로키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리는 대상에 대해 제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선과 표현방식 등이 달라지는 게 진심으로 재미있어서 그림에 빠졌습니다. 색연필을 구매했고, 제 이성적인 생각보다 내면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 예를 들어 제 이성은 기왓장을 남색으로 표현해야지, 라고 말할 때 내면은 빨간색과 주황색 초록색을 추천해 주더군요 - 더 다채롭고 제가 보기에 멋있는 결과물이 나오는 걸 보면서 미술이 더 재밌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발레를 꾸준히 다녔습니다. 발레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되지 않았던 동작과 자세들이 다음 수업에서 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발레 음악이 나왔을 때 음악에 내 몸을 맡기게 될 때,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발레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회사 일이 너무 힘들어서 곧 그만두었지만요. (발레를 할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글은.. 써야만 했습니다.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감정들을,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든 날에는 그냥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았고, 쓰고 나면 삶의 힘든 부분들이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습니다.
예술을 하는 순간도 행복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확장되는 느낌이 가장 좋았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맛집도 사진찍는 것도 그닥, 팝업스토어 등 사람 많은 곳은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전에는 좋아하는 것도 하고싶은 것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공허한 느낌을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음악과 미술과 무용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리고 힘들 때 예술을 삶으로 끌어들이니, 삶의 색이 더 다채로워지고 날렵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이 생기고 제가 누구인지 더 잘 아니 타인이 던지는 메세지들 중에 어떤 것이 나에게 필요한 조언이고 어떤 조언은 맞지 않는 조언인지 상처를 받지 않고 구별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삶을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자유롭게 두어보려고 합니다. 인지행동 쪽에 관심이 있어서 해당 분야 공부를 시작했고, 예술도 자유롭게 즐겨보려고 합니다. 이전에는 좋은 직장과 돈에 더 기준을 두었다면,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간소하게 살되, 자연과 예술과 학문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작성해보니 돈이 되기 어려운 것들만 골라 적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것들을 앞으로 제 삶에 어떻게 녹여내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먹고사니즘을 해결할지는 앞으로 제가 계속 고민해야 할 과업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어서, 행복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