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의 ‘사라져가는 것들’과 수림의 ‘십자가’를 들으며
필름을 인화했는데 내곡동 방 사진이 있어 관련해 일기를 써보았습니다. 내곡동 방을 떠나오며 사실 살짝 울었는데, “아니, 도대체 그때 왜 울었지?”를 고민하다가 쓴 일기입니다. 여러분에게 방은 어떤 의미인가요?
<방방방房房房>
내곡동으로 이사를 온 건 수능 한 달 전의 일이다. 19살의 난 방을 꾸민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대학생이 된 언니랑 오빠는 이미 자기 방을 찜해 두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둘은 안방에서 멀고, 동시에 현관에서 가까워 독립성이 보장되는 방을 차례로 선택한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큰 방을 차지하는 데 미쳐 있었다. 방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던 거다. 언니랑 오빠가 방을 다 선택했다는 말에 나는 엄마에게 딱 하나만 물었다. “그래서, 내 방이 제일 커?”
방을 꾸밀 시간도, 정성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사람답게 엄마가 골라준 방에 — 사실상 언니, 오빠가 선택하지 않아서 버려진 방이라고 봐도 무방 — 엄마의 가구 배치대로 사는 데 큰 이견이 없었다. 공간에 있어서는 자기 색깔이 없는 사람이었다. 버킷리스트를 갱신하고, 무엇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게 일상인 여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처럼, “수능이 끝나면 방을 꾸며볼까”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언니, 오빠는 자기 방을 잘 꾸미고 살았기 때문에 별 큰 생각 없이 다들 그렇게 하는구나, 나도 해야지 싶었던 거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방이란 무언갈 하기 위한 공간에 가까웠다. 공부 공간과 취침 공간을 분리하면 공부가 잘된다는 말에 잠은 언니 방에서 자고, 공부는 오빠 방에서 하던 민폐 시절도 있었다. 나에게 방은 풍수지리 어쩌고에 따라 옷장 옆에 있던 침대가 책상 옆에 붙었다가, 다시 옷장 옆에 붙는 일들이 벌어지는, <나>라는 사람과는 어째 분리된 무언가에 가까웠다.
그랬던 내가 방에 애착을 가지고, <나>를 투영하기 시작한 건 내곡동 방이 처음이었다.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 5년을 살았으니, 많은 서사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곡동은 너무 싫었지만, 내곡동 방은 꽤 좋아했다. 스무 살의 술 냄새, 스물한 살 대학생이 가질 법한 그 나이대의 지독한 자기 혐오, 스물두 살의 “이제는 알겠다”는 얄팍한 자기 확신, 그리고 스물네 살의 현실 도피를 꾹꾹 눌러 담은, 말 그대로 내 역사가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우리 집에서 그 방을 좋아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자주 더러웠고, 아주 가끔 깨끗했던 내 방을 엄마, 아빠는 극히 싫어했다.
내곡동 방은 처음으로 내 색깔을 담은 방이었다. 이전의 방들과는 다르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와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취향들이 섞여 혼란스러운 공간이었다. 엄마가 사주는 가구가 아니라, 내 돈으로 산 물건을 처음으로 들인 공간이기도 했다. 그 방은 지랄 맞은 주인 취향에 따라 조촐한 빔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갖춘 독립 영화관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끝내주는 선곡 리스트를 가진 엘피 바가 되기도 했다. 롤러코스터 같던 지난 5년의 세월은 내곡동 방에 켜켜이 쌓였다. 그 방은 수능이 망한 날, 밤새 침대에서 울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던 19살의 나를 기억하는 공간이자, 언니한테 대들다가 머리를 한 무더기로 뽑혔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었다. 유일하게 새벽에도 불이 환해 밤마다 도롱이가 놀아줄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 이거 거짓 아님 — 도롱이랑 나만 아는 귀여운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내곡동 방을 떠나온 날에 영문 모를 눈물이 찔끔 났던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려운 시간과 티 없이 어린 나를 기억하는 공간은 더 소중하다. 나의 공간이 의미있는 건 좋아하는 기억으로만 채울 수는 없어도, 온전히 내 의지와 생각, 취향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떠나는 일에 언제쯤 덤덤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곡동 방에는 스무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의 내가 봉인되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