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를 보고야 말았다.

거대 자궁근종을 임신했다.

by 손여는

피를 보고야 말았다.

기어코 피를 보고야 말았다. 때는 이번 달 생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최근 일 년 동안 생리 둘째 날이 되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그 양이 어마무시했다. 일반 패드로는 턱도 없어서 팬티형 패드로 바꾼 지 오래였고, 그마저도 둘째 날이면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바꿔 줘야 겨우 감당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생리 둘째 날, 부득이하게 오랜 시간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번 생리는 어쩐 일인지 평소와는 달랐다. 둘째 날, 흐르고 넘쳐야 할 양이 흐지부지 있다가 말았다. 생리에 좋다는 우엉차를 아침부터 진하게 우려 마셨더니 당장 효과를 본 건가 싶었다. 이제 생리가 시작되면 무조건 우엉차를 마시면 되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있는 듯 마는 듯 하던 생리가 거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쯤, 자고 있는데 뭔가 엄청난 것이 내 몸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일어나보니, 이미 침대는 흥건히 젖어있었고, 어두웠지만 진한 색감과 비릿한 냄새로 봤을 때 피가 분명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불을 켜보니, 예상했던 대로 검붉은 피가 낭자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튿날 못 나왔던 것이 이제야 몰아서 나오나?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평소와 달랐다. 말 그대로 폭포수처럼, 엄청난 혈 덩어리들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서둘러 화장실로 가서 씻고 패드를 착용했지만 울컥 울컥 쏟아지는 피는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별안간 며칠 전, 친구와 했던 통화 내용이 머리를 스쳤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지난 10월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였다. 내가 속해있던 무리는 아니었지만 건너 건너 아는 사이였다. 사인은 자궁암. 그 동창도 올봄에 갑작스레 원인 모를 엄청난 양의 하혈을 했고, 급기야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야 했단다. 얼마 뒤, 떨어진 진단명은 자궁암 초기. 그나마 초기라는 말에 희망을 걸고 치료를 시작했지만, 암은 빠르게 다른 장기로 전이됐고, 결국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자 주변에 부고를 접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최근 아빠의 죽음을 경험하고는 이제는 죽음이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 연배의 부고가 아닌, 나와 동갑인 동창의 갑작스러운 병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나도? 불안이 엄습해온다. 하필 시간도 사방이 고요하고 컴컴한 오밤중. 더구나 일인가구인 나는 쿵쿵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날뛰는 불안에도 당장 의지할 사람이라곤 없다. 급한대로 핸드폰을 켜고 녹색 창에 증상을 쳐본다. 비정상적인 복부팽창과 극심한 하혈은 난소암, 자궁암, 자궁근종의 대표적 증상이란다. 셋 다 나쁘지만 그래도 ‘암’만은 아니기를... 그러는 와중에도 하혈은 계속됐고, 나는 수시로 패드를 갈며 불안에 떨어야 했다. 불 꺼진 침대에 모로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잠이 올 리 없다. 진짜 중병이면 어떡하지? 내 나이 이제 겨우 마흔둘이다. 백세 시대,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슬로건이 일상이 된 요즘, 육십은커녕, 반백도 지나지 않은, 백세 시대의 기준에 의하면 아직 제대로 된 인생은 시작도 못 해 본, 창창한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 내 삶에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마. 감. 임. 박.’이라는 빨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거대 자궁근종을 임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