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와 대화하다가 막힌 지점
세상이 하도 험악하니 딸내미가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걱정이 됩니다. 조심한다고 아무리 조심해도 밤거리에 넘쳐나는 온갖 범죄자들과 정신 이상한 미친놈들을 다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외동딸을 둔 아빠로서 그 딸이 매일 밤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는 행복이 혹시나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저만의 입장은 아닐 것 같습니다. 특히 기성세대의 눈에는 너무 과감한 복장으로 딸내미가 외출한 경우에는 그 불안감이 크게 증폭되고는 합니다.
어제는 기어코 딸내미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부모의 입장을 전하고자 했는데 받아들이는 딸내미에게는 걱정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오늘 치마가 좀 짧은 거 아니냐?"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쓸데없다니. 걱정돼서 그러지. 밤거리에 성폭행과 성추행 사고가 얼마나 많은데..."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성추행당하는 게 아니잖아!"
"그럴 위험이 높아지지. 밤에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면 위험하단 말이야."
"아빠는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기 때문에 성추행, 성폭행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밤거리에 야한 옷을 입고 다니면 아무래도 미친놈들이나 범죄자들을 더 부추기게 된다는 얘기지."
"그 얘기가 그 얘기지. 성폭행하고 성추행하는 남자들이 잘못이지, 짧은 치마를 고른 여자들이 잘못이야?"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위험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잖아!"
"아빠는 밖에 나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
"왜 아빠가 못할 소리 한 거냐?"
"그런 소리하면 성범죄를 피해자인 여자의 탓으로 돌리는 한남 소리 듣는다 말이야!"
제 말속에 성범죄를 피해자인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을 담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는데 듣는 딸내미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저는 단지 밤늦게 다니는 것 특히 너무 가벼운 복장으로 다니면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범죄자들의 범죄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의도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의 어디서부터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딸내미에게는 피해자들의 책임을 묻는 논조로 다가갔는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아니면, 진짜 제 깊은 잠재의식 속에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건에 이를 야기한 피해자의 책임도 있다는 남성 편향적인 사고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정한 옷을 입어야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피해를 당할 위험이 높아지니 여성들이 복장에 주의해야 된다는 사고가 저의 머리 어딘가에 박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고가 100% 잘못된 게 아니라는 생각마저도 딸내미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페미니즘을 논하자는 것도 아니고, 성범죄의 책임을 따지자는 생각은 더더구나 아니며, 그저 딸내미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밤거리를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여성에게 피해자의 책임을 묻는 범죄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서 이런 걱정과 바람만을 딸내미에게 어떻게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2020년 12월 2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