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면 삶이 더 편할 텐데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저도 속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갖추고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여유 있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거든요. 속과 겉이 다르니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 가끔 벌어집니다. 제가 속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최근의 3가지 사례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사실 딸의 남자 친구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의 학벌도, 그의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남자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것들이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그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할 계획이 없다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반대의견을 냅니다. 에둘러 표현한다는 게 학벌이나 직업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성실성이나 개인 의지 발현의 결과이니 무시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며, 이 결과로 얻은 현재의 결과물들이 비슷한 수준이어야 나중에 결혼한 후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쉽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딸의 결혼 상대는 최소한 아빠인 저보다는 경제적으로, 직업적으로, 인격적으로 나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하지만 정말로 솔직하자면, 그가 공부 못한 게 싫고 아직 젊은 사람이 언제 망할지 모르는 조그마한 자영업에 만족하고 있는 게 싫습니다. 나중에 혹시 결혼하게 되면, 아내를 대신하여 전업주부를 하겠다고 집에 눌러앉아 딸아이 혼자 밖에서 고생하게 만들까 벌써부터 겁이 납니다.
두 번째 사례는 여기 르완다를 떠나는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니 송별식 겸 해서 그간 어울렸던 사람들과 밥을 자주 먹게 됩니다. 제가 회사 파견이라 현지에서는 용돈에 여유가 있어서 밥값을 더 내는 편인데 밥을 사고 나면 상대도 밥을 한 번 사지나 않을까 하고 저절로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다, 상대가 밥 살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섭섭해하고 제가 그들에게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 서운함이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조용히 밀려듭니다. 르완다에서 짧지만 굵게 인연을 맺은 사람과 헤어지는 마당에 밥 한 끼 먹고 헤어질 수 있으면 이것도 다행이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만, 서운함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걸 보면 저는 속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누가 사면 어떻겠습니까? 한국인의 정이 있는 밥 한 끼 같이 먹는 귀한 일인데...
르완다에 살다 보면 아주 마이너한 속물의 모습도 저 자신에게서 발견하고는 합니다. 르완다는 자체적으로 화폐 주조를 못하고 지폐와 동전을 우간다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워낙 가난한 나라라 제조 비용도 아껴야 되지만, 특히 최근에는 양국 사이가 좋지 않아 화폐 조달이 원활치 않다고 합니다. 덕분에 지폐는 오래 써서 너덜너덜하고 심하게 때가 낀 것들이 많고 동전은 항상 부족합니다. 때문에 슈퍼에서 현금으로 지불할 때 동전이 없다는 이유로 캐시어들이 잔돈 계산에서 동전을 남기지 않도록 머리를 굴립니다. 가령 잔돈으로 2,100 프랑을 거슬러줘야 하면 2,000 프랑만 주고 1,900 프랑을 거슬러줘야 될 때도 2,000 프랑을 거슬러 주는 식입니다.
여기서 100 프랑을 손해 보거나 이득을 얻는데 100 프랑은 사실 한국돈으로 치면 120원 정도입니다. 한국에서는 거리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을 줍지도 않을 판인데 여기서는 100프랑을 더 받으면 기분이 좋고 덜 받으면 심술이 나서 캐시어를 째려보게 됩니다. 적은 돈이지만 제 눈앞에서 제 것을 떼어먹는다 생각하니 또 속물근성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 걸 봐도 저는 속물이 맞습니다.
남들에게는 여유 있는 사람으로, 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속 한편에 자그마한 손해라도 보지 않으려는 좀스러운 속물근성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으니 자기가 자기가 싸우는 갈등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대놓고 속물이 되거나 반대로 속물 같은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되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하도 없이 살아서 그런 건지 아예 처음부터 속물로 태어나 그런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속물의 감정이 겉으로 툭 튀어나와 나나 상대나 당황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아니 그냥 정신 건강에 좋도록 겉과 속이 모두 동일한 속물이 될까요?
2021년 1월 23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