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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비 Jan 22. 2024

헬레보루스

크리스마스 로즈

며칠 전 문득 창밖을 보니 뒤뜰 조그만 꽃밭에 빨간 점 같은 것이 보인다. 설마 이 1월 중순의 칼바람 같은 추위에 꽃이 폈으려고... 생각하며 나가서 확인해 보니 꽃봉오리가 맞다. 몇 해 전인가 아는 집사님 댁에서 받아와 심어둔 건데 어떤 꽃이 피는지조차 잘 모르고 잊고 있었던 식물이었다. 이 추운 날 잎도 어찌나 푸른지. 그 초록의 잎과 진홍색 꽃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저껜가 읽은 구절.

The flowers of late winter and early spring occupy places on our hearts well out of proportion to their size. - Gertrude S. Wister.


그렇지... 여름 장미가 아무리 찬란해도 가을 국화가 아무리 사방에 가득해도 겨울 칼바람과 찬서리와 얼음을 이기고 뚫고 나온 이 작은 겨울 꽃 하나의 큰 울림을 당해낼 수는 없지.

그렇게 뭉클하게 피어난 대견한 꽃인데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춥다 보니 밖에는 거의 안 나가는 겨울 뒤뜰인데 저리 꽃이 피면 어쩌누. 피어난 보람도 없이 저러다 저버리면 어쩌누. 정작 주인은 나갈 엄두도 안 내는데.


꼭 우리 인간들처럼, 온갖 고초를 겪고 피었는데 정작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흙수저인 듯한 느낌. 풍성한 햇빛과 비를 맞고 잘 자란 여름 가을꽃들은 그 크기와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모두들 사가며 감탄해하는 금수저.

사실 꽃 이름도 몰라 구글링으로 찾아냈다. 헬레보루스. 여름 장미가 아니라 겨울 크리스마스 즈음에 핀다고 크리스마스 로즈라고 한다고. 내가 몰랐다고 네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저리 이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각자 꽃은 그 피는 때가 다르고 그 크기가 다르고 그 향기가 다르고.

우리도 피는 때가 다르고 미치는 영향력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하지만, 비교할 것도 속상할 것도 우쭐댈 것도 없이 모두 꽃이고 모두 아름답고 모두 귀하다.


헬레보루스. 이 겨울에 우뚝 쏟아나 피어낸 그 힘을 자랑 않고 오히려 고개 떨군 아름다움으로 내게 와 줘서 고마워. 가장 강한 울림은 오히려 부드러움임을 일깨워줘서 고마워. 나도 너처럼 부드러운 아름다움으로 나의 세월을 드러낼 수 있기를. (요즘 나는 강한 뾰족함으로 내 나약함을 드러내는 중이거든...)     


크리스마스로즈
학명- Helleborus niger L.
분류- 미나리아재비과

일주일 후에 나가보니 이리 활짝 피었다. 피고 나서 보니 장미랑 비슷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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