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비 Mar 11. 2024

그와의 카이로스

운명의 순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


인생에 있어 어김없이 흐르는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의 시간인 크로노스. 하지만 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내 삶의 의미가 바뀌는 운명적인 순간이 있다. 그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 결정적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도약하게 하는, 곤두박질치게 하는 특별한 의미의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 잊어버릴 수 없는 한 순간.


흔히들 생일, 입사, 결혼, 이별 등의 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얘기하지만, 내 생을 돌아보면 카이로스의 순간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순간들이었다.


그 아이를 다시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때 그 순간.

쏟아지는 땀방울에 온몸이 녹아내릴 듯 지쳐 있을 때 걸려온 해맑은 전화가 비수처럼 꽂히던 그 순간.

전철 타고 헤매며 찾아가 첫 면접을 봤던 작은 사무실 공간의 그 순간.

어둡고 찬 공기를 마시며 교회에 들어가 앉은 그 새벽.


하지만, 카이로스는 갑자기 찾아온 한 순간이라기보다는 대부분 크로노스의 시간이 쌓여서 어느 순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미움이든 열정이든 성취든 회한이든 질문이든 믿음이든 침묵의 크로노스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비약으로, 균열로,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남편과의 카이로스 순간.

출장 와서 일 끝내고 아파트에서 쉬고 있는데 비디오 한 편 같이 보자고 연락이 왔다. 빌린 비디오 테이프와 함께 허니듀(멜론)를 하나 사서 왔다. 혼자 주방으로 가더니 익숙한 솜씨로 허니듀를 예쁘게 잘라왔다. 허니듀 껍질을 받침으로 장식해서 가지런하게 접시에 담아와서는 포크로 제일 크고 맛있는 중간 조각을 찔러 내게 건넸다. 그리곤 가장자리의 가장 맛없는 조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기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이 훌쩍 문턱을 넘었다. 엄청난 망설임과 고민의 빗장을 열고 '이 사람이라면...'라는 명징한 소리를 향해서. 물론 그 전의 숱한 배려와 정성과 사랑의 순간들이 쌓여 있으니 그 아무것도 아닌 무심한 행동이 마지막 임계점을 채우는 tipping point의 순간이 되었겠지.


충실히 채워진 크로노스의 시간은

어느 한순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비약한다.

오늘 나의 보잘것없는 크로노스의 일상은 또 언젠가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카이로스로 닿을 수 있다. 그는 기억도 못하는 무심한 그 포크질 한 번이 대양을 건너게 하는 거대한 날개짓이 되었던 것처럼.


결국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 영원이 되고, 영원은 곧 지금 이 순간이다.

오늘 내가 보내고 있는 이 평범한 순간순간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서 어떤 영원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지금 이 순간 이곳이다.

HERE AND NOW.

                     

작가의 이전글 민들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