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치욕
미국의 대도시를 제외하곤 미국 교외의 대부분 일반 주택은 크고 작은 앞뒤의 뜰이 있다. 특히 앞뜰은 모두에게 보이는 공적인 공간인 동시에 내 집 앞마당에 속하는 사적인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내 집을 드러내는 얼굴과 같아서 모두들 앞뜰은 잔디와 나무, 꽃들로 정성을 들여 사시사철 가꾼다.
미국에 처음 와 양 옆집 할아버지네 잔디들은 너무나 푸르고 촘촘히 아름다운데 우리 집 잔디는 뭔가 듬성듬성 얼룩덜룩.. 가만히 들여다보니 잔디뿐만 아니라 민들레, 강아지풀 등 이름 모를 다른 풀들도 잔뜩 있다. 잔디만 있어야 보기에 아주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게 문제 아닌 문제이다. 미국의 홈 케어 스토어의 대명사인 홈디포나 로즈에 가보면 'Weed Killer' 섹션에 이런 스프레이가 가득하다. 잡초로 규정된 풀에 민들레와 강아지풀이 이렇게 대표 이미지로 나온다.
결국 뿌리까지 죽여준다는 이 스프레이를 사다가 집 앞 보이는 민들레마다 뿌려댔던 기억이 있다. 얼마 후 큰 애를 낳고 한국에서 공수해 온 한국 그림책을 애한테 읽어주다가 화들짝 놀란 그림이 있다. 민들레에 관한 책이었는데 양 페이지를 가득 채운 민들레 그림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봄을 알리는 들꽃으로, 솜뭉치 같은 씨를 꺾어 후우 불어 날려 보내던 추억을 숱한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심지어 약으로 쓰이며, 강인한 정신력을 상징하는 여러 단체 이름으로도 쓰이는 그 불굴의 정겨운 민들레는 온데간데없고 잔디밭에 있어서는 안 될 잡초로 내게도 인식이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왜 잔디만 정원을 채우는 풀이어야 할까. 왜 다른 식물은 '잡초'로 규정되어 없어져버려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걸까.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 상태는 온갖 풀들이 어우러져 자라는 상태인데, 잔디만 있어야 하는 그 인공적인 자연을 꾸미기 위해 미국의 가정들은 일 년 내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다. 매년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려고 봄마다 각종 풀을 피어대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와 힘에 맞서 미국의 뜰은 이른바 '잡초와의 전쟁'이 2월부터 시작된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미국 집 잔디 정원은 어쩌면 가장 부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까. 다름이 허용되지 않은 푸르름이 진정한 푸르름일까. 공존이 아니라 독점의 공간이자 획일의 모습은 아닐까.
오늘 딸과 동네를 걷다가 핀 민들레를 보고 문득 오명을 쓰고 있는 민들레가 안타까워 써 본 글이다.
"민들레야,
너는 여기서 치욕을 겪고 있지만
저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너의 '영토'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유명한 시집도 있음을, 꺾이지 않는 강인한 들꽃의 대명사로 대접받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