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당연한 것이 남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날이 점점 풀리자 친한 언니들과 함께 매주 등산을 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각자 멀리 떨어져 사는 터라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 역에서 만나서 인왕산으로 등산을 하러 가자고 날을 잡았다.
드디어, 언니들과 약속했던 등산 가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 집에서 인왕산까지 거리가 꽤 되는 편이라 지하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가고 있는데 조는 와중에 열차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거 구파발 가는 거 맞아요? 아니에요?"
졸고 있었던 터라 비몽사몽인 채로 밖을 얼핏 보니 할머니가 애타게 사람들에게 이 지하철 열차가 구파발역을 가는 게 맞냐고 물어보고 계셨다. 하지만 그 많은 인파 중 아무도 할머니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내가 타고 있던 열차가 구파발역을 가는 지하철 열차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에게서도 대답을 듣지 못한 그 할머니는 결국 내가 탄 열차를 타지 못하셨다.
'아, 이거 구파발역 가는 거 맞는데...'
막상 열차가 문을 닫고 출발하고 나니 그제야 나라도 열차 안에서 할머니께 "할머니! 이거 구파발 가는 거 맞아요!"라고 소리쳤어야 했나 싶어 괜히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후회되었지만 나는 금세 '아니야, 분명 누군가는 할머니 질문에 답을 해줬을 거야. 다음 열차 타셨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목적지인 경복궁역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계속 그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른거리는 탓에 잠이 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라서 그런지 유독 할머니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아니, 근데 왜 할머니들은 가끔씩 그렇게 물어보실까? 어디 가는지 벽에 자세하게 붙어있는데... 화살표까지 있는데.. 어디에 붙어있는지 못 보셨나...'
지하철을 기다리다 보면 여기저기 잘 다니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분들도 계시지만, 오늘 보았던 할머니처럼 가끔씩 그렇게 꼭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신다. 우리나라 지하철은 다른 나라 지하철보다 훨씬 잘되어있고 잘 설명되어있어서 외국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꼭 극찬하는 게 바로 우리나라의 지하철 시스템인데 말이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번뜩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내가 한 질문에 대한 퍼즐이 맞춰졌다.
'아! 글을 못 읽으시는구나!'
내가 유치원 때 한글을 처음 배웠을 때 하도 글씨를 쓰고 싶어서 8절지 스케치북에다가 크레파스를 꺼내 들고 할머니 이름, 엄마 이름, 아빠 이름, 내 이름을 무지개 색깔별대로 각 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쓰면서 온종일 할머니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우리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 장혀다, 장해."라고 칭찬해주셨던 기억이 남아있어서 할머니가 당연히 글을 읽으실 줄 아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와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바로 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르신다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의 이름 정도는 읽고, 쓸 줄 아셨지만, 그 외의 것은 읽으실 줄 모른다고 하셨다. 할머니 시대에는 의무교육 시행 전이였기 때문에 그 나이 때 분 중 특히 할머니들은 글을 모르시는 분들이 꽤 많다고 하셨다. 아빠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인터넷으로도 찾아보니 정말 한글을 모르시는 분들이 전국에 무려 311만 명이나 있고, 그중 대부분은 할머니들이라는 것이 자료에 나와 있었다. 심지어 더 찾아보니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는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개봉했던 걸 보면 지금까지도 할머니들의 문맹률이 꽤 높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7451
이런 자료들과 영화를 보고 있자니 편협한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좀 창피했다. 그때 지하철을 눈앞에서 놓치셨던 할머니를 보며 단순히 '벽에 지하철 노선도 붙어있는 거 못 보셨나?', '설명하는 글자가 좀 더 크게 붙어있어야 하나?'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가 글을 당연히 읽고 쓸 줄 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당연히 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앞으로는 단순히 나의 시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고, "다름"을 깨닫는 것을 통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내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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