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우리 아들 넥타이도 다 하고."
엄마는 출근하기 전 거울 앞에서 마지막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민준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민준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넥타이까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아들, 첫인상이 중요한 거야. 우리 민준이 첫 직장이잖아."
하지만 민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넥타이를 풀었다. 어제 온 사내 메일에는 분명히 '자율복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스타트업 인턴 시절처럼 깔끔한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제 우리 민준이도 직장인이네. 아자!"
"네, 엄마. 저 다녀올게요."
한국전자부품 주식회사. 설레는 마음을 안고 회사 정문으로 들어갔다. 민준의 회사는 전자부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이지만, 업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강소기업이었다. 취업난 속에서 이런 회사에 들어온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거라고, 주변에서도 축하해 주었다.
'자, 이제 시작이야.'
로비에 도착하자 어제 인사팀에서 받은 안내 문자대로 안내대에서 사원증을 받았다. 시계를 보니 8시 55분. 첫 출근이라 일찍 서둘러 나온 덕분에 여유가 있었다.
"어, 강민준 씨죠?"
뒤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친근한 미소를 띤 여성분이 서 있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영업관리팀 대리 송지은이에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송지은 대리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었다. 로비의 구조부터 시작해서 각층별 부서 배치, 그리고 사내 시설들까지.
"우리 팀은 7층이에요. 아, 참고로 우리 팀은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하는 게 관례예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송 대리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네? 하지만 출근 시간이 9시라고······."
"아, 그건 공식 출근 시간이고요. 우리 팀은 다들 8시 30분 전에 와서 조회 준비를 해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봐 드리는 거예요."
민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벌써 회사 분위기가 스타트업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7층에 도착하자 사무실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미 직원들이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 듯했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정장 차림의 복장이었다.
"어······. 저기······."
"네?"
"혹시 따로 정해진 복장 규정이 있나요? 메일에서는 자율복장이라고 해서······."
송 대리는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게······. 공식적으로는 자율복장이 맞는데, 우리 팀은 조금은 특별해요. 김 부장님이 꽤 보수적이거든요."
그때였다.
"어이! 자네 신입이야?"
거친 목소리와 함께 중년의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꼿꼿이 세운 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소문의 '김 부장님'이구나.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영업관리팀에서 근무하게 된 강민준입니다."
공손히 인사를 했지만, 김 부장의 눈초리는 날카롭기만 했다.
"자네, 이게 무슨 복장이야? 첫 출근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지? 요즘 젊은 애들은 기본이 안 돼 있어······."
아침부터 쏟아지는 김 부장의 호통에 사무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민준은 그저 어깨를 움츠린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 대리, 신입 옷 좀 어떻게 해줘."
"네, 부장님.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김 부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송 대리가 다급히 민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저랑 가볼 데가 있어요."
지하 1층 구내매점. 송 대리는 진열대에서 넥타이 하나를 골랐다.
"다행히 구내매점에서 넥타이도 파네요. 제가 선물할게요."
"아니에요. 제가······."
"괜찮아요. 선배가 사주는 첫 넥타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아까처럼 갈굼 당하는 거 보기 좀 그래서요."
송 대리의 배려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민준의 자리 옆에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윤태호라고 합니다. 저는 민준 씨와 동기지만 한 달 전부터 발령받아 일하고 있어요."
"아, 네. 저는 강민준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했지만, 태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선 악수 같은 거 안 해요. 예의 없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이건 도대체 뭐지?'
하나씩 알게 된 회사 문화에 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자, 이제 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박 과장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전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민준은 윤태호를 따라 황급히 일어났다.
"어제 매출이······."
박 과장의 발표가 시작되었지만, 민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옆자리의 태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조회가 끝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이 차장이 다가왔다.
"신입사원은 잠깐 회의실로 오세요."
회의실에서 이 차장은 민준에게 '신입 교육'이라며 장장 2시간 동안 회사 생활의 기본을 주입했다. 그 내용은 대부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성을 중시하는 것 같더라고. 하지만 회사는 달라. 여기는 조직이야. 규율이 있고 질서가 있어. 알겠지?"
"네······."
민준의 힘없는 대답에 이 차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아니라 '네, 차장님'이라고 해야지. 또, 말끝을 흐리지 말고 또박또박해야 해. 알겠어?"
"네, 차장님!"
이번엔 또렷하게 대답했다.
점심시간, 민준은 태호와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드디어 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태호 씨, 근데 진짜 문화충격입니다. 스타트업하고는 차원이 너무나 다르네요."
"스타트업에 다녔었나요?"
"네, 인턴으로 6개월 정도. 거긴 진짜 수평적이었거든요. 대표님이랑도 편하게 대화하고."
태호는 픽 웃었다.
"여기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순응하는 게 최고입니다. 저도 처음엔 적응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해요."
'그러려니.'
이 말이 민준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저기요······. 신입 들?"
고개를 돌리자, 송 대리가 있었다.
"같이 밥 먹어요. 제가 앞으로 이것저것 알려드릴 게 많아서요."
식사하면서 송 대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존 팁'을 알려주었다. 김 부장이 등장하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법부터, 보고서 작성 시 부장의 취향을 맞추는 법까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절대 혼자 퇴근하지 마세요. 특히 부장님이 계실 때는요."
"네? 퇴근도 같이요?"
"당연하죠. 여기선 '눈치껏' 퇴근해야 해요."
첫날부터 쏟아지는 정보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후 업무는 비교적 조용히 흘러갔다.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기본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익히고, 필요한 서류들을 검토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를 보게 되었다.
드디어 퇴근 시간.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무도 가방을 싸는 기색이 없었다. 태호는 '물먹은 솜처럼'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강 사원."
김 부장의 목소리에 민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부장님!"
"오늘 첫날이니까 일찍 가봐. 내일부터는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김 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넥타이는 잘 골랐네. 내일부터는 양복 꼭 입고 오고."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송 대리가 따라 나왔다.
"첫날부터 고생 많았어요.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다들 처음엔 그래요."
"네······. 근데 이게 정상인가요?"
"글쎄요······. 저도 처음엔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적응되더라고요. 시간이 약이에요."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출근 전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막 시작된 '꼰대 왕국'에서의 생존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달력을 보았다. 수습 기간 3개월, 그리고 정직원 전환까지······.
과연 잘 버틸 수 있을까.
그때 문자가 왔다.
'오늘 고생했어요. 저도 처음엔 민준 씨가 겪은 거 다 겪었어요. 하지만 버티다 보니 견딜 만하더라고요. 힘내세요! - 송지은 대리'
문자를 읽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이 회사에는 송 대리 같은 동료가 있으니까.
"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하루가 마치 일주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자, 엄마의 반가운 목소리가 다가왔다.
"우리 아들 첫 출근 어땠어?"
"그냥······. 그랬어요."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어두워 보이네."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아들. 첫술에 배부르겠어? 아빠도 처음 직장 다니실 때 그런 시절 겪었다고 하더라. 지금은 그때가 다 추억이라고."
"엄마, 이런 회사 문화가 맞는 걸까요? MZ세대를 전혀 이해 못 하는 꼰대들이랑 어떻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벌써 자신도 모르게 '꼰대'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민준아, 세상은 네 맘대로 안 돼. 때론 맞춰가는 것도 필요해. 그게 사회생활이야."
엄마의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수평적인 문화, 자유로운 소통, 업무 효율성 중심의 평가······. 그때가 그리웠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내일 입을 옷을 고르려고 옷장 앞에 섰지만, 양복이 한 벌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은 백화점에 들러야겠다.'
민준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스마트폰을 켜니 동기들의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윤태호 : 다들 첫날 고생하셨습니다!
이수진 : 네, 고생 많으셨어요.
김동현 : 내일도 힘내세요······.
강민준 : 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채팅창을 보니 다들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긴장이 채팅에서도 이어지는 듯했다.
윤태호 : 민준 씨, 내일은 정장을 입고 와야 합니다.
강민준 : 오케이.
이수진 : 아······. 채팅에서도 존댓말 써야 한대요.
강민준 : 아, 죄송합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 하루 동안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공식 출근 시간과 실제 출근 시간이 다르다는 것부터, 자율복장이 사실은 정장이어야 한다는 것,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해야 한다는 것까지.
시계를 보니 이제 막 9시.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때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박 과장 : 강 사원, 내일 아침 회의 자료를 미리 검토하고 오세요.
강민준 : 네, 과장님.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벌써 시작이구나. 자료를 확인하려고 노트북을 켰다. 회사 메일에 들어가 보니 박 과장이 방금 보낸 자료가 있었다.
'신입사원이 이런 것까지 검토해야 하나······.'
하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첫날부터 찍히고 싶진 않았으니까.
자료를 훑어보다가 문득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업무 시간 외 연락도 없었고,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여기는 딴판이었다. '꼰대 킹덤'이었다.
'이래서 다들 대기업만 가려고 하는 건가······.'
민준의 친구 중 몇몇은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들도 이런 걸 겪고 있을까? 아니면 대기업은 조금 더 나은 문화를 가지고 있을까?
자료 검토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제 겨우 첫날인데, 앞으로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되었다.
"일단은······. 버텨보자."
이렇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오늘보다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결국 이 모든 게 사회생활의 일부겠지. 엄마 말씀대로 맞춰가는 법을 배워야 하나. 하지만 신념과 가치관은 지키고 싶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도 8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한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알람을 7시로 맞추고,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서 다렸다. 넥타이도 미리 골라두었다.
'이제 이게 일상이 되겠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3개월만 버티자. 수습 기간만 잘 버티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첫날이 저물어 갔다. 내일은 또 어떤 '신입의 충격'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