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준 씨, 그게 아니라······."
아침부터 이 차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8시 30분, 아침 회의가 시작됐다.
"선배님께 보고드릴 때는 존칭을 더 정중하게 써야지. '검토 부탁해요'가 아니라 '검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로. 알겠어요?"
"네, 차장님. 죄송합니다."
옆자리의 태호가 슬쩍 쪽지를 건넸다.
'직급별로 다른 존댓말 써야 해요. 과장님과 차장님한텐 ~해주시기를, 부장님한텐 ~해주시옵기를······.'
'뭐야, 이게 다 다르다고?'
황당한 마음에 태호를 쳐다봤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어서 다음 안건······."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송 대리가 다가왔다.
"민준 씨, 잠깐 시간 될까요?"
커피 자판기 앞으로 자리를 옮기자, 송 대리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존댓말 때문에 많이 당황했죠?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우리 회사가 원래 좀 특이해요. 직급별로 존칭을 다르게 써야 하거든요."
"네······. 근데 이게 다 필요한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이게 우리 회사의 불문율이에요. 특히 김 부장님은 이런 거 엄청나게 따지시거든요. 제가 정리해 둔 직급별 존칭 표현 집이 있는데, 보내드릴게요."
잠시 후 메일이 도착했다. '직급별 존칭 표현 지침'이라는 제목의 문서였다. 내용을 보니 머리가 아찔했다.
[직급별 존칭 표현 지침]
사원 간 : ~하길.
대리에게 : ~해주길.
과장, 차장에게 : ~해주시기를.
부장에게 : ~해주시옵기를.
※ 상황별 세부 표현은 별 첨 참조
...
"이걸 다 외워야 하나요?"
"네. 그리고 중요한 건 상황별로 또 다르다는 거예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어이, 여기서 뭐 해?"
김 부장이었다.
"아······. 부장님, 죄송합니다. 업무와 관련해서 잠시······."
"커피 마시면서 잡담하지 말고 빨리 자리로 돌아가. 일해야지."
자리로 돌아와 보니 태호가 씩 하고 웃고 있었다.
"첫 번째 교훈. 커피 마시다가 걸리면 무조건 업무와 관련해서 얘기했다고 해야 합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커피를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니.
오전이 지나고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박 과장이 다가왔다.
"강 사원, 이따 시간 되나?"
"네, 과장님."
"그게 아니라 '네, 과장님. 시간 됩니다.' 이렇게 말해야지."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오후에는 보고서 작성이 있었다. 처음 써보는 거라 송 대리한테 물어보면서 작성했다.
"이런 식으로 쓰시면 돼요. 아, 그리고 부장님에게 보고서를 제출할 때는 꼭 이렇게 말씀하세요. '검토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거 너무 과하지 않나요?"
"김 부장님은 이게 딱 좋으시대요. 젊은 사람들이 예의가 없다고 늘 말씀하시거든요."
보고서를 들고 김 부장 자리로 향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부······. 부장님, 보고서 가져왔습니다."
"음? 뭐라고?"
"아······. 죄송합니다. 보고서를 검토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김 부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요즘 젊은 애들은 말버릇부터 고쳐야 해."
돌아서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말버릇을 고쳐야 하는 문제인 건가? 아니면 그저 아부하는 걸 배우는 건가?
오후 업무 중에 이 차장이 갑자기 소리쳤다.
"야! 누가 이메일을 이따위로 보냈어?"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신입 동기인 이수진이었다.
"선배한테 메일을 보낼 때 존칭도 없이 그냥 막 보내? 네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수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써서 보내. 그리고 앞으로 누구든지 메일 예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그냥 안 넘어갑니다."
사무실이 순간 얼어붙었다. 민준은 급히 자신이 보낸 메일함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큰 실수는 없었다.
태호가 슬쩍 속삭였다.
"혹시 메일 작성 지침을 가지고 있어요? 없으면 내가 하나 보내줄게요. 거기 보면 직급별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다 나와 있어요."
"고마워요. 근데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요? 꼭 이렇게까지 하면서······."
"쉿! 여기선 그런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듣겠어요."
오후 5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휴게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진이었다.
"수진 씨, 괜찮아요?"
송 대리가 이수진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저······. 저는 그냥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요? 이런 거 더 이상 못 하겠어요."
"다들 처음엔 그래요. 저도 그랬고. 시간이 지나면 수진 씨도 나아질 거예요."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언니, 이게 정상인가요? 이메일 하나 보내는데도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
"그렇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냥······. 적응하는 수밖에요."
민준은 발걸음을 돌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게 정말 우리가 원하는 회사 생활일까?
자리로 돌아오니 박 과장이 서 있었다.
"강 사원, 저녁에 회식 있으니 준비하고 있도록 해. 오늘 부장님께서 체육대회 준비와 관련해서 이야기하실 게 있다고 하셨어."
"네? 아······. 오늘은 좀······."
"뭐? 빠지게?"
박 과장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순간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와버렸다. 박 과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죄송합니다.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신입이 기본을 잘 알아야······."
저녁 회식 자리. 소주잔을 돌리면서 김 부장이 말했다.
"자네들, 요즘 회사 생활 어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김 부장은 픽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빡빡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이게 다 너희들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사회생활이란 게 그저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문득 아침에 이수진이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게 정말 우리를 위한 것일까?
"자, 건배! 우리 회사의 미래를 위하여!"
모두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민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래라······. 과연 이런 꼰대 문화가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태호가 따라 나왔다.
"저기, 민준······. 아니, 민준 씨. 좀 같이 걸을까요?"
둘은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역시 태호도 속마음이 있었던 거였다.
"사실 저도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이런 식의 존댓말 문화가 이해가 안 됐거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래서 적응됐어······. 아니, 적응되셨나요?"
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보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도 존댓말을 쓰고 있네요. 참 웃기지 않나요?"
둘 다 피식 웃었다. 이제는 평상시 대화에서도 존댓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근데 민준 씨, 우리 진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민준 씨가 다니던 스타트업에서는 어땠나요?"
"거긴 달랐죠. 수평적이었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편하게 지냈어요. 직급이나 나이 때문에 불필요한 벽을 만들지도 않았고요."
"부럽다······. 아니, 부럽네요."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지며 태호가 말했다.
"내일도 힘냅시다, 민준 씨."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 동안 나눴던 모든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존댓말, 높임말,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위계질서.
스마트폰을 켜니 동기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가 와있었다.
이수진 : 여러분, 혹시 메일 작성 지침서 있으신가요?
윤태호 : 제가 보내드릴게요. 직급별로 정리해 놓은 게 있어요.
김동현 : 저도 주세요!
이수진 : 감사합니다. ㅠㅠ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메일 하나 보내는데도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한다니.
문득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안녕하세요'로 시작해서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간단한 메일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급별로 다른 인사말, 맞춤형 존칭, 격식 있는 마무리까지.
'이게 정말 효율적일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존중은 굳이 이런 식의 형식적인 높임말로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스마트폰을 들어 검색창에 입력했다.
'회사 존댓말 문화'
'직장 내 세대 차이'
'수직적 조직문화'
검색 결과를 보니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MZ세대의 불만, 기성세대의 답답함,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윗사람이 되는 걸까?'
문득 이 차장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너희 나이 때는 달랐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옳다는 걸 알게 됐지."
정말 그럴까?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후배들에게 존댓말을 강요하는 사람이 될까?
스마트폰에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송 대리 : 민준 씨, 오늘 회식 자리에서 잘 버티셨네요.
강민준 : 네, 덕분에요.
송 대리 : 내일은 부장님이 없으세요. 조금은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거예요.
강민준 : 그나마 다행이네요.
잠시 후 태호에게서도 메시지가 왔다.
윤태호 : 민준 씨, 나······. 아니, 저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강민준 : 네?
윤태호 : 사실······. 저도 너무 힘들어요. 그냥 적응하는 척하는 거예요.
이런 메시지를 보니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됐다. 혼자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내일도 또 비슷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직급별로 다른 존댓말을 쓰면서, 눈치를 보면서, 불필요한 격식에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지만 오늘 깨달은 게 있다면,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어쩌면 MZ세대가 이런 문화를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그렇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어떤 존댓말의 향연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어제 배운 직급별 존댓말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혼자 중얼거려 봤다.
"과장님, 검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차장님,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장님, 검토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옵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마치 사극 대사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동기 채팅방에는 벌써 새로운 메시지들이 쌓여있었다.
이수진 : 오늘도 힘냅시다······.
김동현 : 네, 다들 힘내세요!
윤태호 : 부장님이 오늘 계시지 않는다는 게 실화인가요?
강민준 : 네, 송 대리님이 그러시던데요.
채팅방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 김 부장이 없는 하루.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상사 한 명의 부재가 이렇게 큰 해방감을 주다니. 이게 정상적인 직장 생활일까?
출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민준은 지금 존댓말이라는 껍데기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게 아니라, 그저 형식적인 말투로 위계질서를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는 변할까? 아니,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을까?'
민준은 이런 생각을 하며 회사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도 존댓말 지옥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