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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Nov 12. 2024

부장님의 사랑과 채찍

"야, 이게 다 내가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김 부장의 고함에 사무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출근한 지 3주째, 민준은 또다시 김 부장의 '사랑의 매'를 맞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혼자서 살아갈 거도 아니고, 평생 회사 생활을 할 텐데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면 어떡하냐고!"

문제의 시작은 단순했다. 오전에 있었던 거래처 미팅 자리에서 '실수'를 한 것이다. 실수라고 하기도 뭐한, 그저 김 부장의 기준에서 '예의 없는'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거래처 사장님한테 커피잔을 건네줄 때 두 손으로 해야지! 한 손은 뭐야!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민준은 고개를 숙인 채 김 부장의 호통을 듣고 있었다. 옆자리의 태호는 눈빛으로 위로를 보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죄송하다고 하면 다야? 이게 몇 번째야? 지난번엔 명함 건네줄 때도 90도로 안 숙였지, 그 전엔 어르신들이 말씀하실 때 끼어들었지······. 너 진짜 집에서 부모님께 예절 못 배웠어?"

순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조심하겠다······. 조심하겠다······. 맨날 그 소리야. 야,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손해야. 회사 생활이 얼마나 험난한데······."

김 부장의 '교육'은 30분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사무실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오는데 송 대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민준 씨, 괜찮아요?"

"네······. 뭐······."

"부장님께서 그러시는 건······. 다 이유가 있으세요.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송 대리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화장실로 향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사랑의 매'일까? 정말 내가 잘되기를 바라서 하는 행동일까?

문득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상사가 후배를 이렇게 대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실수해도 따뜻하게 조언해주고, 개선할 점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박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 강 사원."

"네, 과장님."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부장님은 원래 그러신 분이야. 다 너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니까."

'잘되라고······. 또 그 말이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태호와 마주 앉았다.

"민준······. 아니, 민준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한 번 겪었거든요. 지난달에······."

"어떻게 견뎠어요?"

"그냥······. 견뎌야 해서 견뎠죠. 여기가 원래 그런 데잖아요."

밥을 먹는 내내 김 부장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 잘되라고······.' 그 말이 오히려 폭력처럼 느껴졌다.

오후 업무 시간, 김 부장이 다시 민준의 자리로 왔다.

"강 사원."

순간 온몸이 굳었다.

"저······. 네, 부장님."

"이따 퇴근하고 잠깐 시간 돼?"

'또 시작이구나.'

시험장 안에 앉아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야, 내가 너 교육하려고 그러는 거야. 시간 내!"

결국 그날 저녁, 회사 근처 술집에서 김 부장과 단둘이 마주 앉게 됐다.

"자네가 요즘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예상치 못한 김 부장의 부드러운 말투에 놀랐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이런 스타일은 아니었어. 젊었을 땐 자네처럼 나도 답답했지. 왜 이렇게 해야 하나, 꼭 이래야 하나······."

소주잔을 비우며 김 부장이 말을 이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고. 우리나라 비즈니스 문화가 이렇게 돌아간다는 걸. 특히 중소기업은······. 대기업이랑은 달라.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이런 예의와 격식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어."

"하지만 부장님······."

"알아, 내 말이 구시대적으로 들린다는 거. 하지만 이게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야. 내가 널 미워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네, 이게 다 저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죠?"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김 부장은 오히려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게 우리 세대가 후배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야."

소주잔을 다시 채우며 김 부장이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엔 너 같았어. 스물일곱, 똑같은 나이였지. 그때 우리 회사의 최 부장님이 날 똑같이 다그치셨어. 그때는 이해가 안 됐지. 근데 지금은 알아. 그분이 날 얼마나 아끼셨는지."

김 부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사회생활이란 게 말이야, 실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야. 예의, 매너, 눈치······. 이런 게 다 필요해. 특히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더."

"근데 부장님, 그게 꼭 이런 방식이어야 할까요?"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방식이라니?"

"화내시고······. 고함치시고······. 인격적으로······."

민준은 말끝을 흐렸다. 김 부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래, 나도 가끔은 생각해. 내 방식이 너무 과하지 않나 하고······. 하지만 이게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야.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방식이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 김 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오늘은 내가 조금 과했지?"

예상치 못한 김 부장의 사과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게······."

"알아. 내가 좀 무서운 상사지? 하하. 근데 그만큼 네가 기대되는 인재라서 그런 거야. 자네가 잘 될 것 같아서 더 신경 쓰는 거야."

그날 밤, 김 부장의 '사랑의 매'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여전히 동의할 순 없었지만, 최소한 그의 진심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스마트폰이 울렸다.


송 대리 : 부장님과의 술자리는 어떠셨어요?

강민준 : 조금······. 다른 모습을 봤어요.

송 대리 : 그렇죠? 부장님도 사실은 우리를 많이 생각하세요. 표현 방식이 조금 특별하시지만······.

강민준 : 근데 이게 정말 맞는 걸까요?

송 대리 : 글쎄요······ .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부장님의 진심은 이해하게 됐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스마트폰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김 부장의 '사랑과 채찍'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방식에 동의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의 진심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어젯밤의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김 부장이 벌써 와있었다.

"어, 강 사원. 일찍 왔네?"

"네, 부장님."

어젯밤과는 달리 다시 차가워진 목소리. 마치 어제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자리에 앉아 어제의 일을 곱씹어보았다. 김 부장의 진심은 이해했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태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어제······. 많이 힘드셨죠?"

"아니, 의외로······. 조금은 달랐어요."

태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부장님이랑 단둘이 있으면 더 무섭다던데······."

"네. 근데 어제는······. 조금은 부장님의 다른 모습을 봤어요."

그때 이 차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조회를 시작합시다!"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어제의 감동은 잠시뿐, 여전히 '꼰대 왕국'은 굳건했다.

오전 업무 중에 김 부장이 다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다른 신입이 표적이었다.

"야! 이게 뭐야! 누가 보고서를 이따위로 쓰랬어?"

문득 어젯밤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야······."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


점심시간, 송 대리와 마주 앉았다.

"어제 부장님과의 술자리 이후로 생각이 많으시죠?"

"네······. 부장님의 마음은 이해가 가요. 하지만 그 방식은 여전히······."

송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순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나중에는······.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우리가 그 자리에 갔을 때, 과연 다르게 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은 온종일 민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과연 다를 수 있을까? 상사들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나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모든 것은 시간이 답해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김 부장의 '사랑과 채찍'을 견뎌내야 하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까지는······. 이 '특별한 사랑'을 견뎌 내야만 한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김 부장이 다시 한번 민준을 불렀다.

"강 사원."

"네, 부장님."

"어제 얘기······.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마."

"네?"

"내가 약해 보일 수 있으니까.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얘기를 한 거야."

김 부장의 말에서 어딘가 모를 외로움이 느껴졌다. 강한 척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순된 마음이.

"잘 알겠습니다, 부장님."

그날 저녁, 퇴근길에 우연히 이수진과 마주쳤다.

"민준 씨, 괜찮으세요?"

"네? 아······. 네."

"어제 부장님한테 많이 혼나셨잖아요······."

"아, 괜찮아요. 저보다 이수진 씨가 더 힘드셨을 것 같은데······."

이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이렇게 버티는 게 맞는 걸까요? 이게 정말 우리를 위한 거로 생각하면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이수진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모든 것들이······.


민준은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나중에 내가 그 자리에 간다면······.'

그리고 적어 내려갔다.


1. 절대로 고함치지 않기

2. 인격을 존중하면서도 업무적 지도는 확실히

3. 진심을 전하는 다른 방법 찾기


이렇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무뎌지고, 결국 '사랑의 매'를 휘두르게 될까 봐.

집에 도착해서도 이 생각은 계속됐다. 김 부장의 '사랑과 채찍'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구시대의 잔재일 뿐일까?

답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만은 달라져야 한다. 달라질 수 있다.

그날 밤, 오랜만에 편한 잠을 잤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랑의 매'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것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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