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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Nov 14. 2024

퇴근 시간의 함정

"퇴근하고 잠깐 보자."

이 차장의 말 한마디에 온종일 쌓아왔던 퇴근 시간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늘은 꼭 정시에 퇴근하리라고 다짐했던 날이었는데.

"네······. 차장님."

시계는 오후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식 퇴근 시간인 6시까지는 이제 10분. 하지만 이 회사에서 정시 퇴근이란 그저 바람 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저기, 강민준 씨."

옆자리의 태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했잖아요. 약속은 어떻게 하려고요?"

맞았다. 오늘은 대학 동기들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3개월 만에 어렵게 잡은 약속인데.

"취소해야지······. 어쩌겠어요."

태호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맞다. 요즘 화젯거리인 퇴근 대처법 알려줄까요?"

"퇴근 대처법요?"

"네. 우리 팀 선배님들이 쓰는 방법들인데, 기록해둬요, 다음에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태호는 메신저로 긴 글을 보내왔다.


[긴급 퇴근을 위한 처방문]

급한 병원 약속은 금기 - 너무 뻔한 핑계

관공서 방문은 가능 - 확인하기 어려움

집안 경조사는 신중히 - 나중에 들통날 수 있음

부모님 병원은 위험 - 다음날 안부를 물어봄

친척 방문은 괜찮음 - 적당히 먼 친척으로


"이걸 다 외워야 해요?"

"당연하죠. 생존을 위해서라면······."

태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차장이 다가왔다.

"무슨 얘기해? 퇴근 시간인데."

"아······. 아니에요. 내일 업무와 관련해서······."

이 차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야지. 젊은 친구들이 열심히 해야······."

송 대리가 지나가면서 눈짓했다. '조심해요.' 무언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오후 6시, 퇴근 시간이 되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마치 누가 먼저 일어날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어, 박 과장님 벌써 가세요?"

이 차장의 목소리에 사무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구로 향했다.

"아······. 네. 오늘 병원에······."

"병원? 많이 아프신가요? 그럼 일찍 가시지, 왜 이제 가세요?"

박 과장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아니에요, 건강이 최고죠. 얼른 가보세요."

이 차장의 말투는 친절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너의 퇴근을 기억하고 있겠다'라는 경고.


오후 6시 30분, 여전히 아무도 가방을 싸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를 눈치 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김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오늘도 고생들 많았어."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 부장이 먼저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도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긴장해야 했다.

"강 사원, 이따 보자."

이 차장의 말에 온몸이 굳었다.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대학 동기들과의 약속을 취소했다. 세 번째 취소였다. 메시지를 보내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민준아, 또?"

"미안해······. 회사에서 또······."

"에이, 알겠어. 다음에 보자."

다음에. 그 '다음에'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후 7시, 이 차장이 민준의 자리로 왔다.

"자, 일 다 끝났지?"

"네······. 차장님."

"그럼 술 한잔하러 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퇴근하고 잠깐 보자'의 진짜 의미는 바로 이거였다.

회사 근처 술집, 이 차장은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즘 자네가 눈에 좀 거슬려서······."

"네?"

"퇴근 시간만 되면 자꾸 시계를 보잖아. 무슨 고민이 있나?"

"아······.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원래 정시 퇴근이라는 게 없어. 다들 그렇게 일하고 있어. 알겠어?"

"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

그때 옆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회사 직원들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편하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기 봐."

이 차장이 그쪽을 가리켰다.

"쟤들처럼 막 퇴근하고 술 마시고 그러면 안 돼. 우리는 중소기업이야.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어."

'더 열심히.'

그 말이 오히려 더 공허하게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메신저를 확인했다.


윤태호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강민준 :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수진 : 저는 오늘 기적적으로 7시에 나왔어요.

김동현 : 부럽습니다. ㅠㅠ

윤태호 : 내일은 또 회식인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이 '퇴근 시간의 함정'은 계속될 것이다.

문득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자유로웠다. 할 일만 끝나면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할 수 있었다. 회식도 강요하지 않았다.

이때 스마트폰에 문자가 왔다.


'오늘 못 봐서 아쉽네. 다음엔 꼭 같이 보자!'


대학 동기였다.

마음 한편이 아팠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일'이 아닌 '눈치' 때문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 현실이.

아파트에 도착해보니 이미 밤 10시였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다리고 계셨다.

"또 회식이었니?"

"아뇨······. 그냥 일이 좀 많아서······."

거짓말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퇴근이 늦은 진짜 이유를 설명하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흘러갔다. 눈치 보며 퇴근하고, 어쩔 수 없이 회식하고······.

태호가 보내준 '긴급 퇴근 지침'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게 필요한 현실이 씁쓸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김 부장님은 젊었을 때 어땠을까? 이 차장님은? 그들도 이런 고민을 했을까?'

창밖을 바라보니 달이 밝았다. 저 달은 매일 정시에 뜨고 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다음 날 아침,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은 또 몇 시에 퇴근할 수 있을까? 아니, 퇴근할 수 있긴 할까?

엘리베이터에서 송 대리를 만났다.

"어제 이 차장님과의 술자리······. 많이 힘드셨죠?"

"네······. 근데 송 대리님은 어떻게 견디세요?"

송 대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아직 버티는 중이에요. 다만······. 이제는 조금 요령이 생겼달까요?"

"요령이요?"

"네. 진짜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땐 미리 김 부장님께 말씀드려요. 단, 한 달에 한 번 정도만요. 그래야 진짜 믿으시더라고요."

그제야 송 대리가 가끔 정시에 퇴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이 차장이 사람들을 모았다.

"오늘은 회식하는 날입니다. 다들 참석하시는 거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참석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자리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아침 8시 30분. 앞으로 12시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회사 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게 정말 일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그저 시간만 채우는 것일까?'

오전이 지나고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태호와 마주 앉았다.

"민준 씨, 오늘 회식······. 각오하셨죠?"

"네. 근데 정말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요?"

태호는 잠시 숟가락질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아니면 세상이 이상한 건지······."

"스타트업에선 완전 달랐거든요. 일만 잘하면 됐어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부럽다······. 아니, 부럽네요. 저는 첫 직장이 여긴데, 그래서 이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오후 업무 시간, 김 부장의 지시로 발송된 부서 전체 메일을 받았다.


수신 : 영업관리팀 전체

제목 : 퇴근 시간 관련

최근 들어 정시 퇴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업무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앞으로는 팀원 모두가 업무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영업관리팀장 김민석


메일을 읽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정시 퇴근'이 문제가 되는 회사라니.

"강 사원."

갑자기 들린 이 차장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차장님."

"어제 우리가 나눈 이야기······. 기억하지?"

"네······."

"그럼 오늘부터 실천해봐. 열정이 없어 보이면 안 되잖아?"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이게 정말 '열정'일까? 아니면 그저 보여주기식의 문화일 뿐일까?

저녁이 되자 예상대로 아무도 퇴근하지 않았다. 다들 시계만 힐끔힐끔 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다가 우리도 저들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김 부장이나 이 차장처럼, 후배들의 퇴근을 감시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밤 11시, 결국 회식은 3차까지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을 켰다.


[엄마]

'우리 아들, 오늘도 늦네······.'


[대학 동기]

'민준아, 다음 주에는 꼭 보자!'


[스타트업 전 직장 동료]

'여기는 여전히 자유로워. 다시 오는 건 어때?'


메시지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일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이 '퇴근 시간의 함정' 속에서 버티는 수밖에.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마치 하루하루를 알리는 출퇴근 시간처럼. 집에 도착하자 시계는 이미 자정이 넘어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어두운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이미 주무시는 듯했다.

식탁 위에 쪽지가 있었다.

'간식 데워먹어. - 엄마가'

새벽의 고요 속에서 혼자 간식을 먹으며 생각했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도 모레도 이런 날들의 연속이겠지.

이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태호였다.


"민준 씨, 고생했어요. 내일······. 아니, 오늘도 힘냅시다."

"네······."

"우리 그래도 버텨봐요. 언젠가는 변할 거예요."

하지만 그 '언젠가'가 과연 올까?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는 이 '퇴근 시간의 함정'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정시 퇴근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

알람을 맞추며 생각했다.

'내일은 또 어떤 핑계로 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할까?'

그리고 그 대답은······. 아마도 출근하면 바로 알게 되겠지.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잠이 오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켜고 메모장을 열었다.


[나의 하루 일정]

7:00 기상

7:30 출근 준비

8:00 집 출발

8:30 출근

18:00 공식 퇴근 시간

??.?? 실제 퇴근 시간


마지막 줄의 물음표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언제 퇴근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이 불확실성이, 하루하루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아파트 단지의 다른 집들도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많았다.

'저기도 나처럼 늦게 퇴근한 직장인이 사는 걸까?'

갑자기 카카오톡 단체방이 울렸다.


[영업관리팀 신입 직원 방]

이수진 : 다들 잠이 잘 안 오시죠?

윤태호 : 네······. 술도 깨고······.

김동현 : 저도 이제는 멀쩡해요.

강민준 : 저도요.


새벽의 단톡방은 마치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밤낮없는 회사 생활, 불규칙한 생활 리듬,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동기들.


이수진 : 민준 씨, 아까 3차 가기 전에 보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시던데······.

강민준 : 지금은 괜찮아요. 다들 마찬가지잖아요.

김동현 : 이제 적응하셨나요?

강민준 : 글쎄요······. 적응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요?


잠시 채팅방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윤태호 :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요?

이수진 : 언젠가는······.

김동현 : 우리가 윗사람이 되면······.

강민준 : 그때도 우리가 이러고 있진 않겠죠?


밤은 깊어갔지만, 신입 직원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마치 낮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이 시간에야 풀어놓을 수 있다는 듯이.

새벽 2시, 결국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5시간 후면 또다시 같은 하루가 시작될 테니까.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생각이 맴돌았다.

퇴근 시간, 회식, 눈치, 야근······.

이것들이 정말 우리의 삶을 이루는 전부여야 하는 걸까?

이때 스마트폰 카톡이 한 번 더 울렸다.


송 대리 : 민준 씨, 주무시나요?

강민준 : 아니요, 아직요.

송 대리 : 죄송해요. 제가 먼저 퇴근해서······.

강민준 : 괜찮습니다. 송 대리님은 아이도 있으시잖아요.

송 대리 : 그래도······. 후배들만 남겨두고 갔던 게 마음에 걸려서요.


송 대리의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그 자리에 가면, 나는 어떤 선배가 되어 있을까?'

창밖으로 희미한 달빛이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또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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