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입니다. 부장님께서 모두 참석하라고 하셨어요."
아침부터 울리는 박 과장의 목소리는 마치 징집 영장을 읽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달력을 보니 이번 달 벌써 여덟 번째 단체 회식이었다.
"저······. 과장님."
이수진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왜?"
"제가 오늘 급한 집안일이······."
"급한 일?"
박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뭔데?"
"아버지 병원에······."
"병원?"
박 과장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어제도 병원 간다고 했잖아. 이번 달에 벌써 네 번째야. 아버님께서 그토록 심각한 상태인가?"
이수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이다.
"오늘은 전원 참석입니다. 아시죠?"
박 과장의 말에는 더 이상의 이의제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네······."
침울한 대답이 이어졌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태호가 쪽지를 건넸다.
'오늘도 3차까지 각오해야 해요. 오늘 부장님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네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김 부장의 기분이 좋다는 건 곧 긴 회식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어이, 거기서 뭐 해?"
김 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둘은 화들짝 놀라 자리로 돌아갔다.
오전 내내 사무실은 무거운 분위기였다. 다들 저녁 시간의 '강제징집'을 걱정하는 듯했다.
점심시간, 민준은 구내식당에서 송 대리와 마주쳤다.
"민준 씨, 괜찮아요?"
"네?"
"아까 보니까 많이 걱정되는 표정이던데요."
"아······. 그게······. 사실 오늘은 약속이 있었거든요."
송 대리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소하셔야죠?"
"네······. 이번 달 들어 벌써 세 번째 취소예요."
"저도 그랬어요. 결혼하기 전엔 약속 잡을 때마다 '회식만 없으면 좋겠다'라고 기도했었죠."
"근데······. 이게 정말로 정상인가요?"
송 대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죠. 회식을 통해 팀워크를 다지는······."
"팀워크요?"
민준이 자조적으로 웃자 송 대리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요즘은 조금은 나아졌어요. 예전에는 아예 불참이란 게 없었거든요. 지금은 그래도 가끔은······."
송 대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부장이 식당에 들어왔다.
"오, 다들 여기 있었네. 오늘 회식 기대되지?"
다들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업무 시간, 팀 메신저 방이 울렸다.
[영업관리팀 전체공지]
오늘 회식 관련 안내입니다.
1차 : 삼겹살
2차 : 호프집
3차 : 노래방
전원 참석 필수입니다.
- 팀장 김민석
메시지를 본 순간 사무실 전체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태호가 살짝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민수 씨, 오늘은 어떤 건배사를 준비했어요?"
"건배사요?"
"신입은 매번 건배사를 시키거든요. 민준 씨랑 나, 수진 씨랑 동현 씨······. 모두 색다른 것으로 준비해야 해요."
또 다른 숙제가 생긴 것이다.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회식 건배사 모음'
'신입사원 건배사'
'재미있는 건배사'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모두 비슷하고 진부한 내용들뿐이었다.
오후 6시, 김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이제 모두 회식하러 갑시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김 부장이 다시 한번 외쳤다.
"뭐들 해? 다들 정리 안 하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직원들.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들처럼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1차 회식 장소는 회사 근처의 삼겹살집. 이미 단골이 되어버린 이곳은 팀의 회식 전용 장소나 다름없었다.
"자, 건배!"
김 부장이 소주잔을 들었다.
"위하여!"
억지스러운 함성과 함께 첫 잔을 비웠다.
"강 사원, 건배사 한번 해볼까?"
예상했던 순간이 왔다. 준비해둔 건배사를 떠올렸다.
"저······. 우리 영업관리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뭐야, 그게 건배사야? 좀 더 재치 있게!"
당황한 민준은 또다시 벼락치기로 준비한 건배사를 읊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다! 하나 된 팀을 위하여!"
"하하, 요즘 애들은 감각이 없어."
김 부장의 혀가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2차는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취기가 오른 상사들은 점점 더 부담스러운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야, 신입 들! 노래 한 곡씩 해야지!"
이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나비'를 부르는 동안, 민준은 속으로 3차를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무의미했다. 김 부장의 한마디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테니까.
예상대로 3차 노래방으로 향하는 길, 몇몇이 슬쩍 빠지려 했지만······.
"어이, 다들 어디 가? 우리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김 부장의 한마디에 모두가 다시 줄을 맞춰 걸었다.
노래방에 들어서자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임창정의 '소주 한 잔'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수진은 이미 취기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태호는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김동현은 박 과장의 어깨를 주물러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 사원! 여기 와서 노래 좀 불러봐!"
이 차장의 호출에 하는 수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회사 생활이 이래서 힘든 거구나······.'
민준은 트로트 가사를 읊조리며 생각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모든 '강제징집'이 끝이 났다. 지하철은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다들 고생했어! 택시 타고 들어가!"
김 부장의 마지막 훈시가 끝나고, 뿔뿔이 흩어졌다.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을 켜보니 부모님께서 걱정하는 메시지를 여러 개 보내놓으셨다.
'우리 아들, 오늘도 늦네.'
'밥은 먹었니?'
'너무 늦지 말고 들어와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회사 생활이란 정말 이런 것일까? 강제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다음 날 일정도 생각하지 않은 채 밤늦게까지 회식하는 것이?
새벽 1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 어두운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는 쪽지가 있었다.
'회식하느라 고생했어. 방에 해열제랑 숙취해소제 놓아뒀어. - 엄마가'
코끝이 찡해졌다. 이런 날이 또 올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울리는 알람.
"아······."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일어나야 했다. 지각은 용납되지 않으니까.
출근길 지하철에서 태호에게 메시지가 왔다.
'민준 씨, 살아있나요?'
'겨우겨우 살아있네요.'
'오늘 또 회식이 있대요.'
순간 현기증이 났다. 또? 벌써?
사무실에 도착하자 김 부장이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제 고생들 많았어! 오늘도 일찍 끝내고 회식하자!"
이게 바로 '꼰대 왕국'의 실체였다. 밤낮없는 회식, 거절할 수 없는 참석, 그리고 끝나지 않는 '강제징집'의 연속.
자리에 앉아 오늘의 회식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이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대답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늘도 '회식 강제징집'에 응하는 수밖에.
"오늘은 소고깃집 간다!"
김 부장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이수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괜찮아요?"
민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어제 너무 과음했나 봐요."
옆자리의 태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근데 오늘도 회식이라니······."
셋은 다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도 제대로 먹기 힘들 정도로 속이 안 좋은데, 저녁에 또 회식이라니······.
"혹시······. 저기······. 다들 회식비는 어떻게 감당하세요?"
이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회식비도 큰 문제였다. 월급의 상당 부분이 '강제징집' 회식비로 나가고 있었다.
"저는 이번 달 카드값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회식비가 월급의 15%······."
태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업무 시간, 김동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혹시 회식 좀 빠지는 방법은 없을까요?"
"글쎄······. 저도 아직 못 찾았어요."
"제가 오늘 진짜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요. 여자친구 생일인데······."
마침 지나가던 박 과장이 그 말을 듣고 끼어들었다.
"여자친구? 일이 우선이지! 나중에 결혼하면 그런 날 많아."
김동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우리 부장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소고깃집을 예약했다고. 어떻게 빠져?"
그렇게 또 하나의 개인 생활이 '회식 강제징집'으로 인해 무너져갔다.
저녁이 다가올수록 사무실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다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기다리는 듯했다.
"어이, 강 사원. 오늘은 소주 말고 위스키 한잔할까?"
이 차장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 어제 너무 많이 마셔서요······."
"에이, 젊은 사람이 그게 뭐야. 우리 때는 일주일 내내 회식해도 끄떡없었어!"
문득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회식이 있어도 자유로웠다. 참석은 선택이었고, 술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이것이 정말 팀워크를 위한 걸까? 아니면 그저 상사들의 술자리가 필요한 것일까?'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자친구였다.
'오늘도 늦어?'
'응······. 미안해.'
'괜찮아······. 이제는 익숙해.'
그 '익숙해'라는 말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회사 생활에 맞춰 모든 관계가 틀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밤 9시, 2차 호프집에서 김 부장이 또다시 건배를 외쳤다.
"우리 영업관리팀을 위하여!"
모두가 피곤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옆자리의 이수진은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문득 김 부장이 물었다.
"야, 다들 왜 이렇게 축 처져있어? 너희들 회식이 싫은 거야?"
순간 모두가 조용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다 너희들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이런 자리가 있어야 팀워크가 생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게워냈다.
'이게 정말 팀워크를 위한 것일까······.'
결국 그날도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엄마의 쪽지가 있었다.
'내일은 꼭 일찍 들어오렴.'
하지만 그 '내일'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회식 강제징집'의 날들은 계속될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지하철에서 우연히 이수진을 만났다.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민준 씨, 괜찮으세요?"
"네······. 그냥 좀 힘드네요. 어제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갔거든요."
"저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민준 씨······."
이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요? 회사 때문에 우리 인생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동안 취소된 약속들, 깨진 개인 시간의 연속, 그리고 매일 아침 피곤함으로 절어있는 우리들의 모습.
사무실에 도착하자 김 부장이 호랑이처럼 우리를 맞이했다.
"어이구, 다들 힘이 없어 보이네! 어제 그 정도로 그래서 어디다 쓰겠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오늘은 회식이 없으니까 일찍들 퇴근해!"
김 부장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신 모래는 전체 회식이다! 빠지는 사람 없기!"
또다시 시작되는 '강제징집'의 악몽.
언제쯤이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저 희미한 희망을 품은 채, 또 하루를 버텨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