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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Nov 25. 2024

회의실 생존기

"내일 오전 10시, 임원 회의가 있어. 강 사원이 회의실을 세팅하고 자료도 준비해."

아침 일찍 들려온 박 과장의 지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임원 회의는 회사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회의였다. 모든 게 완벽해야 했고,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태호가 살짝 다가와 쪽지를 건넸다.


[임원회의 점검표]

회의실 온도 26도 유지

생수는 차갑게 (얼음 3개씩)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통일

자료는 흰색 클리어 파일에

볼펜은 검은색으로 통일

의자 간격 정확히 50cm

PPT 화면 밝기 70%

블라인드 45도 각도

탁자 먼지 제로

휴지통 비우기

회의실 방향제 '숲' 향으로

...


"이걸 다 해야 해요?"

"당연하죠. 그리고 이건 기본이고, 더 많은 게 있어요."

태호의 말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오전 8시, 회의실 세팅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 그리고 에어컨 온도를 맞추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아, 강 사원. 잘됐다."

마침 지나가던 이 차장이 불렀다.

"네?"

"자료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네? 지금요?"

"응. 별거 아니야. 그냥 전체적으로 다시 만들면 돼."

순간 현기증이 났다. 회의가 2시간도 안 남은 상황에서 자료를 전면 수정하라니.

"저기······. 차장님. 시간이······."

"뭐? 못하겠다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바로 하겠습니다."

송 대리가 급하게 다가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송 대리님도 일이······."

"괜찮아요. 우리 때도 이랬으니까요······."

그렇게 둘은 정신없이 자료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PPT를 고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정 부분이 정확한지 확인했다.

"아, 맞다!"

태호가 갑자기 소리쳤다.

"뭔데요?"

"의자 방향! 임원들이 앉는 의자는 시계 방향으로 5도 정도 틀어야 해요!"

"뭐요? 그건 또 왜죠?"

"임원들 편하게 앉으시라고······. 그리고 햇빛 반사각도 고려해서······."

말도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이 회사에서는 그런 게 당연했다.

9시 30분, 겨우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때 김 부장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어? 이게 뭐야?"

"네?"

"커피잔 방향이 잘못됐잖아! 손잡이는 오른쪽 45도 각도로 틀어야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죄송합니다······."

하나씩 커피잔 방향을 돌리는데, 또다시 지적이 이어졌다.

"이 생수병은 뭐야? 라벨 방향이 제각각이잖아!"

"블라인드 각도가 43도잖아! 45도라고 했지!"

"의자 간격이 45cm네? 50cm로 맞추라고 했잖아!"

김 부장의 지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군대 검열을 받는 것 같았다.

9시 50분,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임원들이 들어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태호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이죠?"

"회의가 시작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져요."

그의 말대로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그들의 진짜 임무가 시작됐다.


발언하는 임원 뒤에서 블라인드 각도 조절하기

물 반쯤 마신 컵 살며시 교체하기

에어컨 바람 방향 미세 조절하기

화면 밝기 실시간 조절하기

임원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 읽기

...


모든 게 완벽해야 했다. 임원 한 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 바로 에어컨을 조절하고, 누군가 물을 반쯤 마시면 즉시 새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저기······. 발표 자료 좀 수정해줘."

회의 중간에 이 차장이 쪽지를 건넸다.

"지금요?"

"그럼 언제? 빨리!"

결국 회의실 한쪽 구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실시간으로 자료를 수정해야 했다. 마치 생방송 PD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지만, 회의는 계속됐다. 배고픔을 참으며 계속해서 임원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휴······."

잠깐 한숨을 쉬려는 순간, 김 부장의 매서운 눈초리가 날아왔다. 한숨도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후 2시,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자, 이제 회의록을 정리해서 오늘 안으로 공유해."

김 부장의 말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네······."

"아, 그리고 내일 있을 VIP 회의 준비도 시작해야지."

"VIP 회의요?"

"그럼? 이런 회의들이 계속 있다는 것을 몰랐어?"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회의록을 완성했다. 하지만 김 부장의 검토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이게 뭐야? 회의록이 왜 이렇게 부실해?"

"죄송합니다······."

"다시 해와! 아니, 잠깐만."

김 부장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다들 남아. 회의록 작성하는 법 좀 가르쳐줄게."

결국 그날도 야근이었다. 회의록 작성법을 배우는 데 무려 3시간이 걸렸다.


글꼴은 맑은고딕 12포인트

줄 간격은 1.5

중요 발언은 진하게

담당자 이름은 파란색

기한은 빨간색

...


끝없는 규칙들이 이어졌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집에 갈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이수진과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오늘 처음 알았어요. 회의실에도 이렇게 많은 규칙이 있다는 것을······."

"맞아요. 저도 처음엔 이해가 안 됐어요. 이게 다 뭐 하는 건가 싶었죠."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게 정말 필요한 걸까? 아니면 그저 꼰대들의 자기만족일까?'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은 또 어떤 규칙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강민준 씨! 어서 와요. 오늘은 오후에 있을 VIP 회의실을 미리 준비해야 해요!"

태호가 다정하게 말했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이제는 회의실이 전쟁터가 되어버린 이곳에서 태호가 새로운 체크리스트를 건넸다.


[VIP 회의실 특별 규칙]

공기청정기 가동 2시간 전부터

가습기 습도 60% 유지

테이블 광택 체크

카펫 먼지 한 톨도 없이

화분 잎사귀 하나하나 닦기

창문 유리 얼룩 없애기

회의실 입구부터 방향제 농도 점진적 증가

...


"이건 또 뭔가요?"

"VIP 회의실은 더 까다로워요. 우리 전임자가 여기서 실수하다가 잘렸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회의실 관리 때문에 잘리다니······.

"자네들, 거기서 뭐 해!"

김 부장의 고함에 모두 화들짝 놀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VIP 자리 배치도를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박 과장이 다가와 소형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 창가 쪽은 절대 안 돼. 역광 때문에 눈이 부시거든. 그리고 에어컨 바람이 직접 닿는 자리도 피해야 해."

마치 전략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전쟁터가 된 회의실에서 우리는 온갖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박 과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VIP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있어서, 서로 마주 보는 자리는 피해야 해."

'이게 정말 회의 준비가 맞나?'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오후 회의가 시작되고, 모두는 마치 특수부대원처럼 움직여야 했다.

"물 잔이 비었어!"

태호가 무전기로 속삭였다.

"지금은 교체하기 힘든데······."

임원 한 분이 발표 중이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기회를 봐서······."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는 물 잔 하나를 교체하기 위해 온갖 전략을 짜내야 했다.

"앗!"

순간 누군가가 물을 엎질렀다.

온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강 사원! 빨리!"

김 부장의 다급한 목소리.

모든 직원은 즉시 비상 상황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송 대리 : 임원 안내

윤태호 : 새 자료 준비

강민준 : 물기 제거


모든 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진행됐다.

"휴······. 잘 넘어갔네."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였다.

"저기······. 프로젝터 화면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그렇게 회의실 생존기는 계속됐다. 한 번의 실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이곳에서.

밤이 되어서야 모든 회의가 끝났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일은 더 중요한 회의야."

김 부장의 말에 모두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오늘보다 더······. 내일은 해외 바이어들도 오시거든."

그 순간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자, 새로운 체크리스트를 나눠 줄게."

김 부장이 A4용지를 꺼냈다.


[글로벌 미팅 준비 사항]

온도는 화씨로 환산해서 체크

각국 입맛에 맞는 음료 준비

의자 높낮이 센티미터로 정확히

통역사 위치를 고려한 좌석 배치

...


이제는 국제적인 수준의 회의실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저기······. 부장님."

용기를 내어 민준이 입을 열었다.

"뭐야?"

"이런 게······. 이렇게 형식적인 것이 정말 필요한 걸까요? 회의는 내용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 순간 사무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김 부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강 사원."

김 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아직 모르는 게 많군. 회의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야. 여기서 우리 회사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지."

"하지만······."

"그만큼 완벽해야 한다는 거야. 알겠나?"

결국 그날도 밤늦게까지 회의실을 준비했다.

내일의 글로벌 미팅을 위해······.

퇴근길 지하철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

"띠링-"

그 순간 메시지가 날라왔다.


[김 부장님]

"내일은 7시까지 출근해서 준비하자."


또 한숨이 나왔다.

이제는 회의실이 모두의 운명을 좌우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게 정말 우리가 원하는 모습일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회사 앞에 도착했다. 이미 동기들이 모두 와있었다.

"다들 일찍 왔네요."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글로벌 미팅이라니······. 무서워서 잠도 못 잤어요."

이수진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김 부장이 이미 와있었다.

"자, 오늘은 절대 실수하면 안 돼. 회사의 미래가 걸린 날이야."

모두는 마치 올림픽 개막식을 준비하듯 긴장된 마음으로 움직였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회의실이라는 전장에서 완벽해져야 한다는 것을.

"띠링-"

또 다른 회의 준비를 알리는 메시지가 왔다.

신입사원들의 회의실 생존기는 오늘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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