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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Nov 21. 2024

복사기와 커피

"신입은 커피부터 잘 배워야지!"

아침부터 울리는 김 부장의 호통이 온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출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커피 서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민준을 다그치는 중이었다.

"부장님은 아메리카노 농도 강, 이 차장님은 라떼 농도 중, 박 과장님은······."

태호가 살짝 건넨 쪽지에는 빼곡하게 '커피 서열 표'가 가지런히 적혀있었다.


[영업관리팀 커피 서열 표]

김 부장 : 아메리카노 / 농도 강 / 시럽 없음 / 얼음 보통

이 차장 : 카페라떼 / 농도 중 / 시럽 1개 / 얼음 많이

박 과장 : 카페모카 / 농도 약 / 시럽 2개 / 얼음 적게

송 대리 : 아이스티 / 농도 중 / 레몬 추가

...


"이걸 다 외워야 한다고요?"

민준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묻어났다.

"당연하죠. 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겠어요?"

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복사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이것 좀 도와줘!"

이 차장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허겁지겁 복사실로 달려갔다.

"종이가 걸렸는데······. 아, 강 사원이네. 잘됐다. 이거 좀 봐줘."

복사기 안에 종이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 차장은 그것을 본체만체한 채 나가버렸다.

"휴······."

한숨을 쉬며 복사기 덮개를 열었다. 구겨진 종이를 꺼내다가 종이에 손가락이 베었다.

"악!"

"조심해야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송 대리가 서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많이 다쳤어요. 우리 회사에서 복사기랑 싸우는 건 일상이죠."

"우리 회사 복사기는 참 대책에 없네요······."

"이제 시작이에요. 잠깐 커피 마시러 갈래요?"

자판기로 향하는 길에 송 대리가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신입이 알아야 할 게 셋 있어요. 커피, 복사기, 그리고 잡심부름."

"잡심부름이요?"

"네. 복사, 스캔, 택배, 은행, 심지어 부장님 차 주차까지······."

송 대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과장이 소리쳤다.

"강 사원! 이리 좀!“


결국 그날 오전, 민준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했다.

복사기 종이 걸림 해결 (3회)

커피 제조 및 배달 (12잔)

택배 보내기 (4건)

은행 업무 (2건)

부장님 차 주차 이동 (1회)

회의실 정리 (2회)

프린터 토너 교체 (1회)

...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동기들과 모였다.

"다들 어때요?"

이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오늘 복사기를 고치다가 종이에 세 번이나 손가락을 베였어요."

김동현이 붕대가 감긴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저는 커피 배달하다가 옷에 쏟았어요."

태호가 셔츠의 묻은 얼룩을 가리켰다.

그들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요?"

민준이 물었다.

"글쎄요······.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문화라고 해야 할까요?"

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후가 되자 다시 새로운 임무가 시작됐다.

"강 사원, 이거 복사 좀 해줘."

박 과장이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네······. 몇 부로 하면 될까요?"

"어? 당연히 팀원 숫자 대로지."

복사실로 향하는 길에 태호가 따라왔다.

"복사할 때 주의할 점을 알려줄까요?"

"네?"

"양면이냐 단면이냐, 스테이플러냐 클립이냐, 제본이냐 아니냐······. 이런 거 다 물어봐야 해요. 안 그러면 다시 해야 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차장이 소리쳤다.

"신입! 여기 커피 한잔!"

민준은 복사실과 탕비실을 달리기하듯 오갔다. 아니, 정말 이걸 업무라고 해야 하나?

오후 3시, 드디어 복사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어? 이거 단면으로 했어? 양면으로 해야지!"

박 과장의 말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다시 처음부터 복사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용지가 부족했다.

"용지가 없어? 그럼 당연히 사 와야지!"

김 부장의 호통이 이어졌다.

문구점에 다녀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뛰어가는데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스타트업에서 함께 일하던 전 동료였다.

"어? 민준아!"

"아······. 안녕하세요."

양손 가득 복사 용지를 들고 비를 맞으며 인사하는 민준의 모습이 처량하게 보였다.

"바빠 보이네. 우리 회사에는 아직도 자리가 있는데······."

가슴 한편이 아팠다. 스타트업에서는 이런 잡심부름은 없었다. 각자의 업무에 충실했고, 커피는 알아서 마셨으며, 복사는 필요한 사람이 직접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줘."

"택배 좀 보내줘."

"회의실 정리 좀 해줘."

끝없는 요청이 이어졌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 사원, 내일 회의 준비는 다 됐어?"

"네? 무슨 회의요?"

"아침 8시 회의 있잖아. 자료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온종일 커피를 타고 복사하느라 정작 중요한 회의 자료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저······.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휴······. 요즘 애들은 일의 우선순위도 모르나······."

김 부장의 한숨 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그럼 이런 잡일 말고 진짜 일을 시켜주세요.'

밤 11시, 회의 자료를 겨우 완성하고 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문득 깨달았다. 이게 바로 '꼰대 문화'의 실체구나. 업무와 상관없는 온갖 잡일로 신입을 부려 먹고, 정작 중요한 일은 야근으로 해결하게 만드는······.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커피 주문이 시작됐다.

"강 사원! 오늘은 아이스로 해줘!"

"따뜻한 걸로 부탁해~"

"시럽 두 개 넣어서······."

한숨을 쉬며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이제는 커피 타는 기술이 늘어서 실수는 줄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이게 정말 일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서열을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일까?'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다. 복사기와 커피 사이를 오가며, 끝없는 잡심부름을 하면서······.

오전 회의가 끝나고 복사실에서 마주친 다른 팀의 신입사원과 대화를 나눴다.

"저희 팀도 똑같아요. 커피부터 복사까지······."

회계팀 신입 박지훈이 말했다.

"다른 팀도 이래요?"

"네. 특히 우리 회사는 부서 간 서열도 있어서 더 힘들어요. 영업팀한테 복사를 부탁하면 안 된다느니······."

"아······. 그런 것도 있었군요."

"네. 그래서 전 이제 복사실 오기 전에 다른 팀의 사람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요. 마주치면 서로 불편하니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복사기에서는 '삐-삐-' 하는 에러 음이 계속 울렸다.

"아, 또 걸렸네······."

둘이서 한숨을 쉬며 복사기와 씨름을 시작했다.


점심시간,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송 대리가 다가왔다.

"민준 씨, 이제 커피 타는 건 좀 익숙해졌어요?"

"네······. 근데 이상해요. 제가 취업한 건 영업 관리 업무인데, 지금 하는 일이라곤······."

"네. 알아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근데 이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하세요."

"경험이요?"

"네. 나중에 후배가 들어오면 이런 거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이 될 수도 있죠."

송 대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나중에 자신이 그 자리에 가면 달라질 수 있을까?

오후에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강 사원, 이거 스캔해서 PDF로 만들어줘. 근데 이미지 말고 텍스트 검색이 가능하게."

박 과장의 요구사항이 점점 더 구체적이고 까다로워졌다.

"저기······.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뭐? 아직도 그것을 모르나? 허······."

결국 태호에게 또 도움을 청했다.

"OCR 기능 써야 해요. 자, 제가 보여줄 테니까 잘 봐요."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 과연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일까?

저녁이 되자 김 부장이 특별 지시를 내렸다.

"내일 임원 회의가 있으니까 회의실을 완벽하게 정리해. 물의 온도는 중간으로 맞추고, 커피는······."

꼼꼼한 지시사항이 이어졌다. 마치 카페 매뉴얼 같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지만, 아직도 할 일이 산더미였다.

복사할 것, 스캔할 것, 정리할 것······.

"저기······. 이거 내일 아침에 일찍 와서 하면 안 될까요?"

"뭐? 그게 말이 돼? 오늘 할 일은 오늘 끝내야지!“

김 부장의 불호령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결국 또다시 야근이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했다. 커피와 복사기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탕비실에는 이미 이수진이 와있었다.

"민준 씨도 일찍 오셨네요."

"네. 이수진 씨는 왜 이렇게 일찍······."

"어제 커피 타는 걸 실수해서 혼났거든요. 오늘은 미리 연습하려고요."

민준과 수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커피를 타는 연습까지 해야 하다니.

"어제는 아메리카노 농도가 진하지 않다고 혼났어요. 근데 농도를 어떻게 맞추는 건지······."

"저도 그거 때문에 고민이에요. 같은 설정으로 해도 매일 맛이 다르다고 하시니······."

그때 김동현이 탕비실로 들어왔다.

"저기······. 혹시 프린터 토너를 교체하는 법 아세요?"

"아, 그거 저한테 물어보세요!"

태호가 뒤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이제 우리끼리라도 비법을 공유해야죠. 서로 도와가면서······."

그들은 그렇게 아침부터 '생존 비법'을 공유했다.


프린터 토너 교체법

복사기 용지 걸림 해결법

스캐너 해상도 설정법

상사별 커피 취향······.


마치 비밀 결사단 같았다.

8시 10분이 되자 사무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 벌써 다들 와있었네요?"

송 대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일찍 와서 준비하려고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송 대리의 말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회사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오전 내내 이어진 잡무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이게 바로 '꼰대 문화'의 실체구나.

단순 반복적인 일을 시키면서 '기본'이라고 포장하는······.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다시 모였다.

"저는 오늘 복사기랑 세 번째 전쟁 중이에요."

이수진이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계속 커피 제조 시험 중······."

김동현은 손에 붕대를 더 감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전쟁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다.

이제는 이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밤늦게 퇴근하는 길, 텅 빈 사무실을 둘러봤다.

커피추출기, 복사기, 프린터······.

이것들은 이제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변할까?'

하지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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