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파 Nov 30. 2024

점심 시간의 감옥

"다 같이 먹어야지~"

김 부장의 이 한마디로 시작되는 점심시간. 우리에게 그것은 자유를 잃은 한 시간이었다.

"서현동에 새로 생긴 중국집에 가보자고. 거기가 탕수육과 짬뽕이 맛있다나?"

김 부장의 제안은 사실상 명령이었다. 점심시간에 개인 약속? 그런 건 이 회사에서는 사치였다.

"부장님·····. 저는 오늘 약속이······."

이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속? 또 무슨 약속?"

김 부장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오랜만에 친구와······."

"이수진 씨, 회사 생활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나? 팀워크가 뭔지도 모르고······."

결국 이수진은 고개를 숙였다. 친구와의 약속은 또다시 취소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 팀은 중국집으로 향했다. 신입 직원들은 앞장서서 자리를 잡고, 물수건을 나르고, 메뉴를 정리하는 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자네들은 자리 배치도 모르나?"

박 과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호가 재빨리 메모를 건넸다.


[점심시간 자리 배치도]

상석 : 김 부장님 (창가 쪽)

우측 : 이 차장님, 박 과장님

좌측 : 송 대리님

말석 : 신입사원들

※ 중요 사항 : 젓가락, 숟가락 방향 통일

...


"아, 참. 오늘은 부장님이 고기 스타일이시네."

송 대리가 귀띔해줬다.

"그게 무슨······.?"

민준이 묻자 태호가 또 다른 메모를 건넸다.


[상사별 식사 스타일 분석]

김 부장 : 고기류 주문 시 → 저녁 술 약속 예고

이 차장 : 면류 선호 시 → 야근 예고

박 과장 : 식사 속도 빠름 → 오후 회의 암시

...


'이런 것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고?'

놀라움도 잠시, 주문이 시작됐다.

"자, 다들 짬뽕으로 통일하지~. 그리고 탕수육 추가."

김 부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의 취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는 짜장면으로······."

김동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짬뽕으로 하겠습니다."

식사가 시작되고, 또 다른 규칙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야, 젓가락질하는 것 좀 봐. 그리고 선배보다 먼저 먹으면 어떡해?"

"수저를 놓는 방향도 틀렸잖아!"

"국물 소리를 내면서 먹지 마!"

마치 궁중 식사 예절을 배우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은 그렇게 또 다른 업무 시간이 되어갔다. 상사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웃음소리를 적절히 내고, 음식을 알맞게 나눠주는 등······.

"강 사원, 김치 좀 더 가져오지?"

"네, 부장님!"

식당 주방까지 뛰어가며 생각했다.

'이게 정말 제대로 된 점심시간이 맞나?'

문득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자유로웠다. 혼밥도 가능했고, 도시락을 싸 와도 됐고, 약속이 있으면 개인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야, 뭐해? 빨리 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호출이 떨어졌다.

테이블로 돌아와 보니 이미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의 짬뽕은 아직 절반도 못 먹은 상태.

"민준 씨, 다들 식사를 마쳤는데 자네는 뭐 하고 있나? 빨리 먹어야지!"

결국 뜨거운 짬뽕을 급하게 들이켜야 했다. 목이 데어도 말할 수 없었다.

"자, 이제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김 부장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녹차를······."

민준의 말은 또다시 무시됐다.

카페에서도 자리 배치와 주문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커피 마시는 속도까지.

"부장님의 커피가 식기 전에 다들 마셔야지?"

이 차장의 말에 모두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들이켜야 했다.

그렇게 험난했던 점심시간은 흘러갔다. 자유라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고, 오직 규칙과 서열만이 존재했다.


다음 날.

"오늘은 일식집에 가볼까?"

김 부장의 새로운 제안에 모두가 긴장했다.

태호가 슬쩍 메모를 건넸다.


[일식집 예절]

우동 소리 절대 금지

초밥은 한입에

와사비 조절은 사치

...


식당으로 가는 길, 송 대리가 귓속말로 전했다.

"오늘은 일식이니까 회식 각오하세요."

"네?"

"부장님이 일식을 고르실 때는 십중팔구 저녁에 회식······."

한숨이 나왔다. 점심시간이 저녁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일식집에 도착하자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자리 배치는?"

"수저는?"

"덮밥 비비는 소리는?"

끝없는 규칙들이 이어졌다.

"아, 맞다. 오늘 김 이사님도 오신대."

순간 모든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태호가 급하게 새로운 메모를 건넸다.


[임원 동석 시 특별 규칙]

목소리 톤 3단계 하향

젓가락질 각도 30도 이하

국물 남기기 금지

...


점심시간이 마치 국가 의례처럼 변해갔다.


일주일 후.

"오늘은 개인 약속이 있어서······."

민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순간 사무실이 얼어붙었다.

"뭐? 도대체 무슨 약속인데?"

김 부장의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여자친구 생일이라······."

"생일? 점심시간에? 퇴근 후에 하면 되잖아!"

"저녁에는 여자친구가 야근이라······."

"흠······. 요즘 젊은 애들은 회사 생활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나?"

결국 그날도 여자친구와의 약속은 취소됐다. 세 번째 취소였다.

"미안해······."

문자를 보내며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너무 슬프네······."

여자친구의 답장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새로운 규칙을 배웠다.


한식당에서의 예절

중식당에서의 예절

일식집에서의 예절

양식당에서의 예절

...


심지어는 구내식당에서도 규칙이 있었다.

"이게 뭐야? 밥 비비는 소리가 너무 크잖아!"

"된장찌개 젓는 각도가 잘못됐어!"

"수저 놓는 위치가 틀렸잖아!"


한 달이 지나자 우리는 완벽한 '식사 로봇'이 되어 있었다.

감정 없이, 자유 없이, 오직 규칙대로만 움직이는······.

"옆 팀 신입 직원들 봤어? 다들 혼자서 밥을 먹더라?"

"저러다 잘리겠죠."

"팀워크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 뭘 할 수 있겠어?"

다들 그저 상사들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자신들도 한때는 그런 자유를 꿈꿨었다는 걸 떠올리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늘은 다들 개인적으로 식사하세요."

김 부장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모두가 놀랐다.

"네?"

"가끔은 그래도 되는 거야. 다들 고생했으니까."

잠시 환호가 터져 나올 뻔했지만, 모두 참았다.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오늘은 개인적으로 해도 되나요?"

이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대신······."

역시 조건이 있었다.

"핸드폰은 반드시 켜놓고."

자유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긴 목줄을 받은 것일 뿐.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멀리 가지는 못했다.

결국 다들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혼밥을 했다.

진정한 자유는 아직 멀기만 했다.

"띠링-"

점심시간 중에도 카톡이 왔다.


[김 부장님]

"다들 뭘 먹고 있나? 사진 찍어서 보내.“


한숨이 나왔다.

이것이 '자유'였다.

그렇게 점심시간은 계속됐다.

때로는 감옥이 되고, 때로는 전쟁터가 되면서······.


"내일은 새로 생긴 베트남 식당 가보자고~"

김 부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꼰대 왕국'의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계속해서 이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도······.


다음 날 아침, 태호가 새로운 메모를 건넸다.


[베트남식당 필수 규칙]

쌀국수는 소리 내지 말고

월남쌈은 한입 크기로

느억맘은 조금씩 부어가며

...


"역시 베트남 음식에도 규칙이 있네요?"

민준이 한숨을 내쉬자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부장님이 베트남 출장을 다녀오신 후로 더 까다로워지셨어요."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사무실이 분주해졌다. 모두가 베트남식당에서의 생존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기······. 혹시 베트남어로 '감사합니다'는 어떻게 말해요?"

이수진이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캄 언······."

김동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발음이 틀렸어요! '깜 온'이라고 말하면 돼요."

송 대리가 급하게 수정해줬다.

이제는 외국어까지 공부해야 하는 점심시간이 된 것이다.

식당에 도착하자 김 부장이 베트남 문화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베트남에서는 말이야······."

다들 해외연수라도 온 것처럼 진지하게 경청해야 했다.

"쌀국수 먹을 때 소리를 내면 절대 안 돼! 베트남에서는 그런 게 실례야!"

"하지만 부장님, 제가 베트남 가봤을 때는 현지인들도······."

민준의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잘렸다.

"뭐? 자네가 나보다 베트남을 더 잘 안다는 거야?"

민준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상사의 '진실'만이 존재할 뿐.

그렇게 그들의 점심시간은 계속해서 감옥이 되어갔다.

자유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고, 규칙은 끝없이 늘어만 갔다.

"내일은 인도 카레 전문점 가보자고!"

새로운 지옥의 예고였다.

내일은 또 어떤 규칙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다음 날, 인도 카레 전문점으로 향하는 길, 송 대리가 새로운 정보를 알려줬다.

"오늘도 특히 조심해야 해요. 부장님이 작년에 인도 출장을 다녀오신 후로 인도 음식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리는 송 대리의 표정이 심각했다.

"인도에서는 말이야······."

예상대로 김 부장의 강의가 시작됐다.

"카레는 오른손으로만 먹어야 해! 왼손으로 먹으면 큰 실례야!"

"난은 찢어서 먹되, 한 조각은 반드시 남겨둬야 해!"

"물은 한 번에 다 마시면 안 돼! 조금씩 마셔야 해!"

끝없는 규칙들이 쏟아졌다.

"부장님,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태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뭐? 뭔데?"

"아니······. 아닙니다."

이제는 진실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상사의 '진실'에 반하는 말은 곧 불이익으로 이어질 테니까.

식사가 시작되고,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자, 다들 보고 있나? 내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

김 부장은 마치 의식을 집전하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치 무술 도장에서 사범님의 시범 동작을 배우는 제자들처럼.

"저기······. 화장실 좀······."

이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식사 중에 자리를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참아!"

그렇게 기본적인 인권마저 침해받는 점심시간이 이어졌다.

문득 옆 테이블을 보니 다른 회사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대화하며 식사하고 있었다. 웃음소리도 자연스럽게 들렸다.

'저렇게 먹는 것도 가능하구나······.'

부러운 마음에 그들을 바라보다가 김 부장의 눈초리에 급히 시선을 돌렸다.

"남의 테이블은 구경하지 말고 우리 식사에나 집중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새로운 공지가 떨어졌다.

"내일은 태국 음식점이다. 다들 태국 음식을 먹는 법 좀 찾아보고······."

순간 모두의 어깨가 축 처졌다. 또 다른 나라의 음식, 또 다른 규칙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태호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세계 음식 문화까지 공부해야 한다니······."

"맞아요. 어제는 베트남, 오늘은 인도, 내일은 태국······."

이수진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저녁이 되어 퇴근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점심시간 때문에 저녁 공부까지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태국 음식 먹는 법'

'태국 식사 예절'

'팟타이 먹는 순서'

...


이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영업관리팀 공지 방]

김 부장 : 내일 점심에는 태국 음식 관련 테스트가 있을 예정

김 부장 : 식사 예절부터 음식 이름까지 다 외우기

김 부장 : 틀리면 다음 주 점심시간 없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점심시간을 위한 시험까지 치러야 한다니.

새벽까지 태국 음식과 문화를 공부하면서 생각했다.

'이게 정말 제대로 된 회사 생활인가? 아니면 해외 음식 문화 연구원인가?'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동기들과 급히 모였다.

"다들 외웠어요?"

"네······. 근데 발음이 너무 어려워요."

"소스 순서는? 전 도저히 기억이 안 나요."

마치 대학 시험 기간처럼 서로 문제를 내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여러분······."

송 대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어차피······. 부장님이 말씀하시는 게 모두 옳다고 하면 돼요."

그 말에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 모든 게 상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모두의 얼굴이 굳어갔다.

오늘은 또 어떤 '문화충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